170화 겨울 전쟁 (10)
순식간에 조양, 어양을 포함한 주요 요충지를 함락한 강이식과 온달은 다시 만리장성을 넘기 위해 빠르게 군을 정비해 방향을 돌렸다.
함락한 성들과 요충지엔 조금의 병력도 남기지 않았기에, 병력은 고스란히 유지한 상태였다.
한편, 북으로 산맥과 남동 방향으로 평야를 낀 어양 앞으로 공손성의 십만 기병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었으니, 온달과 강이식도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대로 행군하면 배후를 급습당합니다.”
강이식의 부장 공별이 입을 열었다.
“십만이라…….”
강이식이 지도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온달이 육천의 기병을 지녔고, 자신이 삼천 기병을 지녔으며,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이 삼만이었다.
이곳까지 진군하는 동안 올루스를 통해 부족함 없이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십만 기병의 공세에 올루스까지 무너질 수 있었다.
이때, 정탈 나갔던 쇼락이 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와 보고하였다.
“오만 기병이 서쪽에서 합류하고 있소.”
아마도 이연이 이끈 군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강이식과 온달의 표정이 굳어지자, 평강이 차분히 말하였다.
“수는 역시 큰 나라군요. 삼십만 대군이 만리장성 밖에 있고, 수군 칠만이 동쪽 해안에 집결한 상황에서 십오만이나 되는 기병을 모울 수 있다니… 이들을 그대로 둔다면 반드시 고구려의 후한이 될 것이옵니다.”
“허허, 우리가 십오만 기병을 두고 물러나서는 안 된단 말이구려.”
온달이 허허 웃으며 말하니, 평강이 따라 웃으며 답하였다.
“아녀자의 좁은 소견이었을 뿐이옵니다.”
“공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적을 두고 쉽게 물러나면 안 되지요.”
막바우도 평강을 거들고 나서니, 강이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일세. 을지문덕은 적당히 휘젓고 만리장성을 넘어 요서에서 유격전을 펼치라 했거든. 임유관도 걱정이고… 생각보다 적의 수도 많고… 음…….”
강이식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다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평강이 다시 의견을 내었다.
“어차피 적들이 우리 앞에 진을 펼친 이상, 쉽게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한바탕 싸움을 벌여 적을 물러나게 한 후 만리장성을 넘도록 하시지요.”
십오만에 달하는 적을 너무도 쉽게 여기는 평강의 말에 공별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공주 마마, 적을 가볍게 여기면 아니 되옵니다. 적이 이토록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올 줄은 아마도 서부총관께서도 예측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신속히 군을 물리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 생각되옵니다.”
평강을 나무라듯 말하는 공별의 태도에 가만있을 막바우가 아니었다.
“뭐라? 말린 생선같이 생긴 놈이 감히 공주님께!”
버럭 소리 지르며 큰 주먹을 치켜 들으니, 공별도 코웃음 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틀린 소리했소? 그 주먹으로 무엇을 하려고 내게 들이대는 게요? 매가 그리운 게요?”
당장이라도 막바우와 공별이 치고받을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에 경우와 황우가 동시에 일어나 막바우와 공별을 붙잡아 앉혔다.
“막바우 진정하시게. 말린 생선 따위와 다툴 신분이 아닐세. 자넨 이제 어엿한 장군이라네. 저런 수졸 따위는 병사들을 불러 매질하라 명하면 그만일세.”
막바우를 말리는 경우의 말이 오히려 공별의 심기를 건드렸다.
“무엇이라? 수졸?”
당장이라도 막바우와 경우를 향해 몸을 날릴 듯 파닥거리는 공별을 황우가 억센 힘으로 눌러 앉히자, 강이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평강에게 머리 숙여 사죄를 하였다.
“공주 마마, 송구하옵니다. 제 부장이 본디 배운 바가 없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 전쟁이 끝난 뒤 소장이 엄히 벌을 내릴 터이니 부디 용서하소서.”
이에 평강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대장군, 저 장수가 크게 잘못한 일 없으니, 벌하지 마시고 공을 세우라 격려하소서.”
평강의 당부를 허투로 여길 강이식이 아니었기에 바로 공별에게 시선을 옮겨 명하였다.
“너는 공으로서 과를 덮으라.”
이에 온달도 가만히 있기 어려워 엉거주춤 일어나 막바우에게 엄히 명하였다.
“그대, 막바우… 막바우 장군도 공을 세워 보시구려.”
이에 기다렸다는 듯 막바우가 입이 귀에 걸리며 좋아 벌떡 일어나 답하였다.
“장군,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소장, 막바우. 장군과 더불어 불패장군올시다. 장군만 불패장군이 아니라, 소장도 불패장군이니, 이 막바우의 앞을 막는 적은 그저 패배뿐이 없다는 말이지요. 하하하.”
온달이 막바우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막바우와 경우 역시 단 한 차례도 패한 적 없는 불패장군들이었다.
“허허, 듣고 보니… 정녕 불패장군이었구려. 믿겠소.”
기세 오른 막바우가 공별을 노려보며 이죽거렸다.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구처럼 패주한 적 없는 불패장군이니 믿으셔도 되십니다. 하하하.”
공별이 콧방귀를 뀌며 막바우의 시선을 피하였으나, 내심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수나라 놈들을 박살내어 저놈 기를 꺾어야겠구나.’
씩씩거리는 공별을 힐끔 쳐다본 강이식이 지도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만 씩씩거리고 자리에 앉아. 회의하다 말고 뭐하는 짓이냐?”
모두 자리에 앉으니, 강이식이 지도에 수나라 잔영과 고구려 진영을 펼치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한바탕하고 물러날 계획이었으나, 적이 좀 많아져서 부담이 생긴 것뿐이야. 그렇지? 마침 막바우와 공별이 기세 올라 적에게 맛을 보여줄 모양이니, 그럼 됐어. 아무튼 대회전을 펼쳐야 할 듯한데…….”
잠시 말을 멈춘 강이식이 평강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공주께선 올루수와 함께 먼저 만리장성을 넘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대장군 대회전은 아니 되옵니다.”
이에 평강이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이견을 내었다.
“대회전은 불가하옵니까?”
강이식이 의아해 물으니, 평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돌궐을 상대해 온 수의 최정예 기병입니다. 대회전은 쉽지 않습니다.”
기마 민족마다 제각각의 특성이 있었으니.
북방 고원에 펼쳐진 초원 위를 내달리는 초원의 민족들은 시야가 넓고 이들의 말은 지구력이 좋았다.
몽고와 커레이트 전사들은 넓은 시야와 뛰어난 지구력을 지닌 말을 이용해 쉼 없이 달리며 화살을 날려 적을 몰아내곤 하였다.
이에 비해 백두산과 요동벌이 주 무대인 말갈기병은 산악 지형에 강하고 매복에 능하였다.
한편, 돌궐은 상대적으로 체구가 큰 군마를 사용하였는데, 힘이 좋고 순발력이 뛰어난 이 군마로 돌궐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에 맞선 수나라 대 돌궐 사령부의 최정예 기병들 역시, 체구가 큰 군마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돌궐 못지않은 빠른 기동력을 펼치며 긴 창을 이용하여 돌진을 펼쳐 돌궐 군을 내쫓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만약 어양 일대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고구려 군이 넓게 진을 펼쳐 대회전을 벌인다면, 공손성은 반드시 기동전을 펼쳐 수적 우위를 앞세워 일거에 몰아쳐 공격해 올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결코 속도에서 그들의 말을 앞설 수 없으며,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여 매복과 기습을 펼칠 수도 없사옵니다. 또한 카사르 대족장과 호타크 족장의 부족 전사들이 마음껏 내달리며 전투를 펼칠 수도 없으니, 대회전은 불가하옵니다.”
“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강이식이 평강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공성전을 펼치게 해야 하옵니다. 돌궐을 대적해 온 저들은 결코 공성전엔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양에 다시 들어가 공성전을 펼치잔 말씀이시옵니까? 공주 마마 송구하오나, 우리도 공성전엔 익숙하지 않습니다.”
강이식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니, 평강이 빙그레 웃었다.
“어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저도 말갈기병과 북방 초원의 민족이 공성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면?”
이에 평강이 지도에 펼쳐진 올루스를 가리켰다.
“북방 초원의 민족은 올루스를 지키길 마치 수성전을 펼치듯 잘 지키나이다. 적이 공성전을 펼치듯 이 올루스를 공격하도록 두십시오.”
평강의 대답에 강이식이 놀라 온달을 바라보니, 무심한 온달은 그저 지도에 펼쳐진 올루스만 응시할 따름이었다.
“아우님, 아무 말도 안 할 것인가?”
답답함을 참지 못한 강이식이 묻자, 그제야 온달이 입을 열었다.
“매번 공주의 말이 옳았으니, 이견은 없습니다.”
경우의 통역으로 카사르와 호타크도 고개를 끄덕이니, 강이식의 시선은 다시 평강으로 향했다.
“대장군, 올루스 내 카사르 대족장의 백성들까지 합하면 우리의 군세도 적들 못지않사옵니다.”
북방 초원의 민족은 아이부터 노인 물론, 여인들까지 활을 잘 다루었기에 반드시 전투에 도움이 되었다.
“고작, 수레와 천막이 전부인 올루스로 수성전을 펼친다니… 허허. 다들 이 계책을 마음에 들어 하니, 내가 뭐라고. 허허허… 나 역시 참 좋습니다. 허허허.”
강이식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평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막바우 장군과 공별 장군께서 적들을 이 올루스까지 잘 데려와주십시오.”
이에 막바우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소리쳐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장 막바우입니다. 불패장군! 하하하.”
공별 역시 막바우에게 지고 싶지 않아 당당히 명을 받았다.
“적을 반 죽여 끌고 오겠나이다.”
* * *
수레에 갇힌 온동을 들여다보며 공손성이 빙그레 웃었다.
“고구려 위장군 온달의 일가라 하여 누군가 궁금하였더니… 고작 잡초(雜草)였구나.”
온동도 공손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쏘아 붙였다.
“나는 이제 잡초라 불리지 않는다! 나는 온 씨란 성을 지녔고! 동이란 이름도 지녔다!”
허나, 공손성은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온동을 향해 말하였다.
“아니야. 너희들은 이름도 성도 없다. 내가 너희에게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너희는 늙은이나 애나 그저 잡초일 뿐이다. 잡초는 모두 나의 소유물인 소와 돼지보다 못한 그저 잡다한 풀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곁에 선 이연이 의아해 물었다.
“총관, 저 아이를 아시옵니까?”
“알지요. 잡초 아닙니까? 하하하. 그저 밟아도 되는 잡초. 소가 뜯어 먹는 잡초 말입니다. 하하하.”
공손성은 거친 돌궐인보다 삼한인을 노예로 부리길 좋아하였고, 산동 해적들은 그에게 노예를 바치며 재물을 취하였다.
삼한인 노예들은 공손성이 잡초라 부르며 험하게 다룬 탓에, 이 년을 버티지 못하고 명을 다하기 일쑤였다.
허나, 잡초는 다시 자라고, 노예는 잡아다 다시 채우면 그만이란 공손성의 생각은 변하지 않아 산동 해적들만 배를 불리는 형국이었다.
“이놈은 고구려 위장군 온달의 일가가 맞습니다. 총관께선 어떤 인연을 지니셨는지요?”
이연이 재차 물으니, 공손성이 그제야 시선을 온동에게서 거두며 말하였다.
“이놈은 잡초치곤 꽤 영특하여 눈여겨보았지요. 도망친 가노인데, 온달의 일가가 되었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총관의 가노라… 참으로 기이한 인연입니다. 고구려 위장군 온달의 일가를 노에로 부리셨다니…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이놈을 앞세워 나가며, 온달을 자극해 보도록 합시다. 이놈이 정녕 온달의 일가라면, 그가 가만있지는 않겠지요. 하하하.”
공손성의 이 말에 옥에 갇힌 온동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온달님이… 이곳에 계신 거여. 오셨구먼. 헌데… 내가 온달님의 발목을 붙잡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면 좋다냐?’
온동의 근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나라 군은 온동이 갇힌 수레를 앞세우고 천천히 진군을 시작하였다.
“고구려 놈들이 감히 대회전을 펼칠 요령으로 진을 치고 있으니, 일거에 몰아붙여 쓸어버립시다.”
공손성의 말에 이연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공손성, 이자는 돌궐을 상대하듯 고구려 군을 몰아낼 요령이구나. 허나, 나의 기병은 이자의 기병과 다르니, 앞장서 돌격할 필요는 없다.’
이연이 이끈 기병은 공손성의 기병과 달리, 단창을 지니고 등에 활을 메었으며 허리에 도검을 차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가벼운 가죽 갑옷을 걸쳐 기동력에 중점을 두었는데, 돌격보단 기사와 속공을 주력 전술로 사용했다.
이연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니, 공손성은 내심 이연을 겁쟁이라 비웃으며 진군을 서둘렀다.
“곧 고구려 진영이다. 행군을 서둘러라. 일거에 쓸어버리기 좋은 진영을 펼칠 수 있도록 서둘러 거리를 유지하자.”
공손성의 재촉에 수의 최정예 기병 십오만 기가 말발굽을 요란히 울리며 고구려 진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