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겨울 전쟁 (9)
“소 장군, 우린 어디쯤에 있는 게요?”
태자 양광이 지평선 끝에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며 물었다.
눈부신 햇살에 눈살을 찌푸린 태자 양광이 고개 숙인 소장황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이 어디 쯤인지는 소장도 상세히 알 수는 없사오나, 다만… 한왕의 진영과 이틀 거리 쯤으로 사료되옵니다.”
“이틀 거리라…….”
죽음을 각오하고 당장 포위를 뚫더라도 이틀 거리를 고구려 군에게 쫓겨야 할 신세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이 쉽사리 뚫려줄 리도 만무했다.
삼면을 포위한 고구려 군은 밤이 되면 도주로를 막고 화살을 날리며 압박을 하였고.
아침이 찾아오면 여지없이 포위망을 좁혀오며 공격을 해왔다.
양광 일행은 삼면에서 퍼붓는 고구려 군의 공세를 피해 일부러 열어 준 퇴로로 무작정 도망쳐야 했다.
진을 치고 고구려 군의 공세에 맞서며 원군을 기다리고자 하면, 고구려 군은 여지없이 화공을 펼쳐 주위를 불태우기에, 양광으로선 버틸 재간이 없었다.
소장황이 이끈 기병과 달리, 양현감의 군사들은 보군이었으며 보급 물자를 실은 수레까지 있었기에, 행군 속도가 느려 결코 고구려 군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양현감이 수차례 소장황과 먼저 탈출하라 권하였으나, 태자 양광은 결코 양현감의 일만 보군을 버리지 않았다.
소장황의 도움으로 구릉에서 내려온 뒤로 삼 일이나 쫓겨 다니고 있었으니, 양광으로선 고구려 군의 의도가 궁금할 만도 했다.
“군사, 도대체 이놈들의 의도가 무엇으로 생각되오?”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담담히 답하였다.
“전하, 놈들은 우리를 사로 잡지도 몰살시키지도 않을 듯하옵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허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소?”
이제 해가 떠올랐으니, 서둘러 식사를 마친 고구려 군이 다시 공격해 올 시간이었다.
양소의 시선이 고구려 진영 쪽으로 향하더니, 아침 해가 떠오른 동쪽으로 다시 옮겨졌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몰아, 한왕과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지요. 이는 곧 한왕의 발을 묶겠다는 수작이옵니다.”
양소의 대답에 태자 양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렇군. 생각했던 대로야. 어리석은 양이가… 자초한 일이야.”
한왕 양양이 소장황의 삼만 기병과 두 식경 거리를 두고 진을 펼친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만약, 한왕이 대군을 이끌고 소장황의 뒤를 따라 진군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한왕의 원군이 있을 것이옵니다.”
소장황이 머리 숙여 아뢰니, 태자 양광이 피식 웃었다.
“원군이야 당연히 있겠지. 허나 그 수가 결코 적어선 아니 될 게요.”
이때, 양현감이 급히 다가와 조심스럽게 태자 양광에게 아뢰었다.
“전하, 놈들이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곧 다시 공격을 가해 올 듯하옵니다. 하여.”
“하여?”
“지금이라도 소인과 소인이 이끄는 군사들이 놈들을 막고, 전하께선 소 장군과 함께 퇴로를 열어 한왕 전하께 가시옵소서.”
양현감이 진정을 담아 말하였으나, 양광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허허허, 그대의 보군이 느려 계속 고구려 놈들에게 뒤를 잡히는 게 아니오. 소 장군의 기병이라 해도 놈들에게 포위되어 쫓기고 말 터이니, 그대와 그대의 보군을 버릴 필요는 없다오.”
“…….”
“그대가 보급 물자를 성실히 지키며 운송한 덕에 이렇게 우리가 굶지 않고 도주할 수 있는 게요. 이제 더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그저 양현감을 달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태자 양광은 진심으로 양현감이 보급 물자를 지키며 운송해 온 공을 높이 사고 있었다.
이에, 양현감이 감읍하여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이니, 태자 양광의 시선이 양현감의 등을 지나 고구려 군에게로 향했다.
양소도 삼면을 에워싼 고구려 군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급히 말하였다.
“전하, 속히 말에 오르소서. 놈들의 공세이옵니다.”
“좋아! 어디까지 우리를 몰고 갈지 어디 한 번 지켜보겠노라.”
양광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에 오르니, 마치 이를 기다린 듯 고구려 군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었다.
“화살을 막아라! 진열을 이탈하지 마라!”
양현감이 소리쳐 전열을 가다듬으니, 양소가 손을 들어 명하였다.
“곧 개마무사들의 돌진이 있을 것이다. 애써 막지 말고 놈들을 돌파시켜 주거라!”
개마무사들의 돌파를 막기 위해 펼쳤던 진열은 매번 무너지고, 그때마다 병력 손실이 발생하였기에, 양소는 개마무사들의 돌파를 허용하라 명하고는 서둘러 퇴로가 열린 서쪽으로 행군을 명하였다.
“화살을 막으며 이동한다. 서둘러라!”
양소의 판단대로 말린 고기로 배를 채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요란한 쇳소리를 일으키며 돌파를 강행해 왔다.
이에 수나라 군은 또다시 서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 * *
“아니, 그대는 어찌… 혼자 온 게요? 형님은?”
한왕 양양이 초췌한 몰골로 돌아온 무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매복이 있었사옵니다.”
“하여?”
한왕 양양이 노기를 억누르며 물었다.
“간신히 막아 냈사오나, 보급이 부족하여…….”
“굶고는 못 싸우겠다라… 하긴 먹어야 살지.”
“보급이 없는 상황에서 전장을 유지함은 필패를 의미하옵니다.”
“필패? 그래, 질까 봐 돌아온 게요?”
조롱섞인 말을 내뱉은 한왕 양양이 벌떡 일어나 무석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찼다.
무석의 탄탄한 가슴팍은 조금의 타격도 없는지 무석의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전하, 보급을 마친 후 다시 태자 전하를 구하러 출정하겠나이다.”
무석의 당당한 어조에 한왕 양양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이번엔 어련하겠소.”
수치심에 무석이 고개를 숙이니, 제갈여가 한왕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말하였다.
“전하, 태자 전하를 고구려 군이 사로잡도록 두소서.”
“뭐라?”
“전하께옵선, 속히 군을 나누어 방비가 허술해진 영주를 수복하고, 이곳을 지키시옵소서.”
“허면?”
“태자 전하를 사로 잡은 고구려는 강화를 요청할 것이고, 우리는 영주를 수복한 상태에서 강화를 맺을 수 있사옵니다.”
“…….”
“허면, 대군을 보전한 채 봄을 맞이할 수 있사옵니다. 결국! 봄은 올 것이고, 충분히 보급 물자를 구비하고, 보급로를 마련한 채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 되옵니다.”
“강화를 맺었는데도?”
“강화는 깨면 그만이옵고, 태자 전하는 무사히 돌아오신 뒤이니 성가신 일 없이 고구려 정벌에 임하실 수 있사옵니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한왕 양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말은 백 번 옳으나, 황제 폐하의 진노가 두렵소. 대군을 이끌고도 태자를 구하지 않은 죄를 물을 것이고, 또한 형님도 나를 원망할 것인데… 차라리 형님이 놈들 손에 죽으면 속 편하겠으나, 사로잡힌 뒤 강화를 맺고 돌아온다면 나를 두고 보겠소?”
한왕 양양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제갈여가 바로 답을 내었다.
“그렇다면, 군을 나누지 않고 대군으로 태자 전하를 구하소서. 놈들도 우리가 원군을 계속 보내리라 여겨 방비할 터이니, 차라리 대군을 몰아 일거에 쓸어버리는 길이 가장 확실한 방도이옵니다.”
이에, 한왕 양양도 제갈여의 의견을 받아들여 즉시 명을 내렸다.
“속히 전군 진군을 명한다. 군을 나누지 않고 태자 전하를 구한다. 무석! 그대는 길을 안내하거라!”
한왕 양양의 명을 따라 행군원수부 전군이 일거에 움직이니, 광야에 흙먼지가 거대한 모래 바람처럼 일었다.
* * *
막리지 연태조는 임유관 관문 위에 서서 넓게 진을 펼친 수나라 군을 응시하였다.
“우리가 저곳에 진을 펼치고… 저들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역할이 바뀌었군.”
연태조의 중얼거림에, 곁에 선 모용상이 입을 열었다.
“그 역할이 바뀌면 어찌 되옵니까?”
“을지문덕의 계책이 모두 헛수고가 되지. 그리고… 우리는 결국 수나라 군을 앞뒤로 맞이해야 할 게야.”
“합하, 고작 역할이 조금 바뀐 것만으로 이 유리한 전황에 문제가 있겠사옵니까? 우리는 임유관을 점령하였고, 저들은 고작 광야에 진을 친 신세 아니옵니까?”
모용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대장군과 온달이 한바탕 휩쓸고 다시 만리장성을 넘는다면, 황제 양견은 대군을 이곳으로 보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임유관은 수나라가 탈환하겠지. 보급로까지 더불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오리까?”
모용상의 물음에 연태조가 한숨을 내쉬고는 명하였다.
“상장군 대건상을 불러오라. 그에게 명할 것이 있노라.”
이에 모용상이 즉시 군사를 불러 대건상에게 보내었다.
잠시 뒤, 대건상이 다가와 연태조 앞에 섰다.
대건상의 시선도 연태조를 따라 자연스럽게 수나라 군의 전영으로 향하였다.
“상장군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소?”
연태조의 물음에 대건상은 망설임 없이 바로 답하였다.
“소장이 군을 몰아 물리치겠나이다.”
이에 연태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명하였다.
“그대는 즉시 군을 이끌고 대장군에게 합류하시오.”
“합하…….”
대건상이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상장군, 그리 놀라실 것 없소이다. 저들을 물리치려면, 대장군과 군을 합쳐 만리장성 밖으로 나가야 하오.”
“하오면… 이 임유관은 누가 지키나이까?”
“그대가 만리장성을 넘어 저들의 배후를 칠 때까지 내가 이곳에 남아 지키도록 하겠소. 속히 군을 몰아 대장군에게 가시오. 곧 대장군이 만리장성을 다시 넘을 것이니, 늦어선 아니 되오.”
군권을 쥔 막리지의 명이었기에 감히 거역할 수 없었으나, 앞에 진을 펼친 수나라 군의 군세가 상당하여 대건상은 쉽사리 명을 따를 수 없었다.
“소장이 군을 끌고 떠난다면, 함락될 것이옵니다.”
“알고 있소. 허나, 이 앞에 다시 진을 펼쳐 보급로를 끊으면 되니, 그것으로 족하오.”
“합하께선 적에게 사로잡히실 것이옵니다.”
“죽을 수도 있고,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게요. 혹은 그대가 군을 몰아 저들의 배후를 칠 때까지 버틸 수도 있을 게요. 무엇이든,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앞뒤로 수나라 군을 맞이하는 것보다 좋은 방향이오.”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였다.
마침내 대건상도 머리 숙여 막리지 연태조의 뜻을 받아들였다.
“소장, 대건상. 막리지의 명을 받사옵니다. 반드시 군을 몰아 적의 배후를 칠 터이니, 부디… 강녕하옵소서.”
“상장군, 내 목숨은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곳을 지킬 생각은 없소. 상황이 어려워지면 항복할 터이니, 목숨은 건질 게요. 내가 항복한다면 그땐 고구려의 적이니, 그대가 내 목을 취하시구려.”
이에, 대건상은 아무 말도 답하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등을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합하…….”
곁에 선 모용상이 연태조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지막이 불렀다.
이에, 연태조가 무심히 명을 내렸다.
“상아, 상장군이 최대한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가도록 내려가 돕거라.”
“합하…….”
모용상이 명을 따르지 않고 자리를 지키니, 연태조가 부드럽게 다시 명하였다.
“상아, 우리 고구려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느니라. 나를 돕겠느냐?”
세상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는 자신과 누이를 받아준 연태조의 부탁이었다.
모용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곧 돌아오겠나이다. 상장군에게 군사 오천만 남기라 전할 터이니, 부족하다 탓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연태조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잠시 뒤, 대건상이 이끈 사만오천의 군사들이 신속하면서도 소리 없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이 순간에도 연태조의 시선은 임유관 앞에 진을 펼친 수나라 군에 향해 있었다.
모용상을 따라 모용설이 관문 위로 올라와 곁에 서니, 그제야 연태조가 시선을 이들 남매에게 돌렸다.
“설아, 아직도 운명은 바뀌지 않았느냐?”
임유관 앞에서 자신과 모용상이 경우와 막바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란 모용설의 말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아직 운명은 변하지 않았사옵니다.”
모용설이 차분히 답하니 연태조가 다시 시선을 수나라 진영으로 옮겼다.
“그래, 그렇구나. 만리장성을 무사히 되넘은 온달이 저 앞에 진을 펼쳐 수의 보급로를 끊게 될 것이구나.”
“합하… 그렇다한들 어찌 우리가 그들의 손에 죽는단 말이옵니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모용상이 강한 어조로 말하자, 연태조가 그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일이 잘 되려고. 우리 고구려가 대승을 거두려고… 벌어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