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겨울 전쟁 (8)
태자 양광과 소장황이 고작 두 식경 거리 밖에서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그 순간.
한왕 양양의 앞에 임유관을 지키던 공지열이 고개 숙인 채 서 있었다.
“아니, 공 장군. 임유관을 적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온 게요? 그런 게요? 허허허.”
한왕 양양이 어이없어 허허 웃으며 물으니, 공지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송구하옵니다.”
“아니, 이게 송구하고 말 일이오? 그래 그럼…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만리장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 아니오? 허허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송구하옵니다.”
“아니, 송구는 되었다고 하지 않소. 나 이것 참.”
한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지열을 매섭게 노려보니, 채휘가 급히 나서며 말하였다.
“급히 태자 전하를 모시고 탁현으로 돌아가 고구려 군을 몰아내야 하옵니다.”
이에 한왕이 고개를 끄덕이니, 채휘가 안심해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들어 한왕이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나름 반갑고도 놀라운 모양이었다.
이때, 척후병이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와 급히 아뢰었다.
“소 장군이 태자 전하를 무사히 구하시어 돌아오시던 중, 고구려 군이 삼면에서 에워싸 공격을 가하고 있사옵니다.”
이에, 한왕 양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그럴게다. 원군을 보내긴 해야겠지.”
전장에선 두 식경의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였다.
한왕 양양은 일부러 이 거리를 유지하여 태자 양광을 곤경에 처하게 한 후 사지에서 구하고자 하였으니 나름 뜻한 바를 이룬 셈이었다.
“소장이 가겠습니다.”
지금껏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던 무석이 입을 여니, 한왕 양양이 빙그레 웃었다.
“형님께서 고생이 심하실 터이니, 가서 구해드리시게.”
한왕 양양이 무심히 말하니, 무석이 바로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이때, 제갈여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왕과 무석 사이에 서더니 입을 열었다.
“무 장군의 위명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사오니, 반드시 공을 세우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하온데, 전하.”
“말하시게.”
“태자 전하를 구하시고 다시 탁현으로 돌아가 고구려의 대장군을 몰아내기는 어렵사옵니다.”
“뭐라?”
한왕 양양이 의아해 바로 물으니, 제갈여가 지도를 가리켰다.
이곳 임유관을 고구려의 막리지가 차지하고 있사온데, 우리가 이대로 대군을 이끌고 탁현으로 돌아가면, 고구려의 대장군이 우리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겠나이까?"
듣고 보니, 제갈여의 말이 옳았다.
“채 장군은 즉시 공 장군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향하라. 그 앞에 진을 치고 고구려 놈들이 만리장성 밖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한왕 양양의 명에 채휘가 당황하여 바로 물었다.
“하오면 전하께선 태자 전하를 구하신 후 탁현으로 돌아가 군을 재정비하여 고구려의 대장군을 몰아내실 계획이옵니까?”
“그렇소!”
한왕의 대답에 채휘도 내심 안심하여 바로 명을 받았다.
“명을 받사옵니다.”
그러나 이때 다시 제갈여가 의견을 내었다.
“아니옵니다.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셨으니, 전하께선 더욱 큰 공을 세우셔야 하옵니다.”
“뭐라?”
한왕의 물음에 제갈여가 바로 답하였다.
“고구려의 막리지가 임유관으로 향한 이상, 영주는 비워진 상태이옵니다. 하여, 속히 군사를 보내어 영주를 수복하라 명하시고, 따로 군사를 추려 만리장성 안으로 침입한 고구려 군을 요격하라 명하시옵소서.”
“…….”
“또한 전하께선 태자 전하를 모시고 탁현으로 돌아가시어 군을 재정비하여 고구려의 대장군을 물리치시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러나 채휘가 제갈여의 의견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아니 되옵니다! 영주를 수복하기엔 군량미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임유관을 탈환하여야 보급로가 확보되오니, 그때까지 결코 군을 나누어선 아니 되옵니다.”
이에 한왕도 채휘의 의견을 받아들여 말하였다.
“속히 임유관을 수복하시오. 그리고 무 장군은 형님을 구해 오시오. 형님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 진을 펼치며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한왕 양양은 만리장성 안으로 침입한 고구려 군의 수가 대단치 않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원군을 보내면 바로 태자 양광을 구해올 수 있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결코 회군을 조급해 하지도 않았다.
다만, 보급로를 끊은 고구려의 막리지를 껄끄럽게 여겨 임유관으로 군을 보내고는 진영은 그대로 유지하며 소식을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무석이 기병 이만의 원군을 이끌고 태자 양광을 구하러 출전하였다.
또한 채휘가 보군 삼만을 이끌고, 공지열도 보군 오만을 이끌며 임유관으로 향하였다.
“제갈 선생, 우리가 대군이지만 군을 계속 나누다간 결국 부분적인 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소이다. 영주 탈환은 나도 원하는 바이나, 시기상조이니, 태자 전하를 구한 후 차근차근 진행하도록 합시다.”
한왕이 제갈여에게 말하였다.
왜인지 한왕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한왕은 태자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사로잡히지 않을 정도로만 군을 보내어 구하고, 그 와중에 태자가 죽으면 좋다 여기는 게야. 하여, 태자의 죽음을 확인한 후, 군을 움직여 공을 세울 생각인 게야. 한왕이 공을 세운다면 나로선 나쁠 것이 없으니, 일단 두고 보자.’
제갈여도 한왕이 서두르지 않는 이유를 눈치 채고는 두 손을 모아 읍하며 답하였다.
“소인은 그저 전하의 건승만 바랄 뿐이옵니다.”
* * *
한왕의 진영과 고작 두 식경 거리였던 태자 양광의 행렬은 고구려 군에게 쫓겨 어느새 반나절 거리까지 벌어져 있었다.
태자를 구하기 위해 원군을 이끌고 출전한 무석은 지평선 끝에도 보이지 않는 태자 행렬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었구나.”
광야에 사람과 말의 시신이 드문드문 널려 있어 태자 일행이 쫓겨 간 방향은 짐작할 수 있었다.
“태자 전하가 고구려 놈들에게 사로 잡혀선 안 된다. 서둘러라!”
무석이 앞장서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내달리니, 이만 기의 기병이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출전한 소장황의 기병 삼만 기와 함께 무석이 이끈 이들 기병 이만 기는 행군원수부 전체 기병 팔 할에 해당하였으니, 현재 한왕의 진영엔 오직 보군만이 남은 상태인 셈이었다.
말을 달려 해질녘이 되자, 매복을 펼칠 산이나 계곡이 전무하던 광야가 끝나고 높고 낮은 구릉이 황야 위에 군데군데 솟기 시작하였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황야였으나, 구릉과 고원이 펼쳐지니 무석이 손을 들어 속도를 늦추었다.
흙먼지와 누런 모래 바람이 황혼을 받아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자 전하가 고구려 놈들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치셨을 리는 없다. 고구려 놈들이 태자 전하를 이곳으로 몰았을 게야. 더불어, 원군도 예상했겠지.”
황야에 솟은 구릉 사이로 들어서거나, 고원 위로 오를 경우.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노린 화살이 날아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태자를 구해야 서둘러 탁현으로 돌아가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물론, 만리장성을 침입한 고구려 군을 황제 양견이 두고 볼 리는 없겠으나, 시간을 끌다간 침입을 허용한 책임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고구려 놈들이 매복하고 있을 것이다. 사위를 살피며 진군한다.”
무석의 명에 사위 경계를 하니, 진군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리니 이마저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졌다.
이에 무석이 불을 밝히고 진을 세우라 명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이 야영을 시작하니, 멀리 떨어진 구릉과 고원 위에서도 불빛들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저곳들 중에 태자 전하가 계실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놈들도 있을 게야.”
고구려 군의 매복을 걱정했던 것은 자신의 기우라 여기며 우석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한 식경 남짓 되어 보이는 거리였기에, 무석이 바로 말에 오르며 소리쳤다.
“오늘 밤 야영은 없다. 속히 말을 몰아 태자 전하를 구한다.”
이에, 이만의 기병이 일시에 말에 오르니, 기다렸다는 듯 이들의 좌우 양옆 구릉 위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말들이 놀라 날뛰고, 군사들이 당황해 허둥지둥 거리자, 무석이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소리쳐 명하였다.
“좌우 양옆 구릉 위로 올라 적을 물리친다! 돌격하라!”
이에 기명 이만 기가 둘로 나뉘어 좌우 양옆 구릉 위로 휘몰아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구릉 위로 오르기도 전에 화살을 날리던 고구려 군은 반대편으로 내려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말았다.
불도 밝히지 않은 채 황야에 내린 어둠 속으로 사라진 고구려 군은 말발굽 소리조차 내지 않아 더는 추적하기 어려울 듯하였다.
“멀리 가지 않았다. 저 어둠 속. 바로 저곳에 놈들이 숨어 우릴 지켜보고 있다. 휘몰아쳐 잡아야 한다.”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무석이 다시 말에 오르며 구릉 아래로 내려가니, 좌우 구름에 올랐던 수나라 기병 이만 기가 붉을 밝힌 채 구릉을 내려왔다.
“저곳에 놈들이 있다! 휘몰아쳐 짓밟아라!”
무석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고구려 군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이만 기의 기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말을 몰았다.
그 순간, 이들이 향한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들더니, 선두에 선 군사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이에 무석이 소리쳐 명하였다.
“횃불을 꺼라! 놈들이 불빛을 보고 살을 날린다. 횃불을 꺼라!”
무석의 명에 일시에 횃불을 내던졌으나, 이미 목표를 포착한 화살들이 여지없이 수나라 군사들을 말 위에서 떨구었다.
“돌격하라! 멈추지 말고 돌격하라! 살을 날리며 돌격하라!”
더는 망설일 수 없어 무석이 돌격 명령을 내리며 말을 몰아 앞서 나가니, 부장들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뒤를 따랐다.
어둠 속을 향해 무작정 화살을 날리며 맹렬한 기세로 수나라 군사들이 말을 몰아 돌격하였으나, 이미 그곳엔 고구려 군이 흔적을 감춘 뒤였다.
“이놈들도, 어두워 결코 우리를 노리지 못할 것이다. 불을 밝히지 마라.”
무석이 어둠 속에서도 재차 명령을 내리며 사라진 고구려 군의 흔적을 찾고자 애썼다.
그때, 또다시 좌우는 물론이요.
앞뒤 구릉 위에서 횃불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고구려 군이 아래를 향해 횃불을 내던지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횃불이 날아들자, 이내 곧 수나라 군사들의 주변이 밝아졌다.
그리고, 사위 구릉 위는 다시 어둠에 잠기고는 바람을 가르는 화살 소리만이 귀청을 때렸다.
“횃불을 꺼라!”
무석이 급히 명하였으나, 말에 오른 군사들은 횃불을 끄기보단 놀라 날뛰는 말을 달래기에 정신이 없었다.
“퇴각하라!”
마침내 무석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사위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말을 몰았다.
그러나 이들의 뒤를 노린 화살들은 악착같이 쫓아와 기어코 말 위에서 군사들을 떨구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무석이 이끈 군사들은 어둠 속을 정신없이 내달리며 고구려 군의 추격을 피해야 했다.
날이 밝아서야,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된 무석의 시야에 구릉고 구릉 사이 황야에 널브러진 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겨우 목숨을 건진 군사들이 곳곳에서 말을 몰아 그를 향해 달려왔다.
두 식경 거리로 생각하여 별도로 보급 물자조차 지니지 않았기에, 모두가 밤새 굶주려 하나 같이 눈이 퀭하니 들어가고 초췌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