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67화 (167/328)

167화 겨울 전쟁 (7)

만리장성을 따라 서쪽으로 쾌속 진격한 강이식과 온달의 고구려 군이 북평과 대산을 점령하고, 어양과 조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공손성에게 전해졌다.

대 돌궐 총사령관 공손성은 황제 양견에게 요격대총관으로 임명되어 이미 십만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출병 중이었기에, 목적지를 바로 조양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공손성의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적 대 돌궐 사령부가 마련된 태원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는데,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이 그의 오랜 벗 배적과 함께 출병을 시작한 것이다.

관릉집장의 수장 중 한 명인 이연은 팔주국 대장군의 신분으로 한왕 양양의 행군원부에 지원한 군사 이외에도 따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공손성이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군을 요격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니, 이에 이연이 받아들여 출병이 이루어졌다.

“요격대총관이 이 아이를 데려오라 하니, 불쌍하지만 데려가야겠구려.”

이연이 손발은 물론, 짐승처럼 목에까지 쇠사슬을 채운 온동을 가리켰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옥에 갇힌 온동이 잡아먹을 듯 이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옥은 바퀴가 달려 한 마리의 소가 끌게 되어 있었는데, 옥 주위에는 칼과 활로 무장한 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배적이 고개를 저으며 이연의 시야를 가렸다.

“듣자 하니, 온달의 일가라 합니다. 아마도 요격대총관께서 요긴하게 사용하시려나 봅니다. 어차피 처형될 아이였으니, 불쌍히 여기시지 마소서.”

이때, 온동이 이연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죽어도 좋구먼유. 그런디, 우리 영이는 잘못이 없어유! 나를 처형하러 끌고 간다고 혀도 원망하지 않을 거구먼유. 그러니 제발 영이는 살려 주셔유!”

정확한 성조와 억양이었다.

이에, 이연이 시야를 가린 배적을 손으로 제치며 온동에게 답하였다.

“그 아이는 잘 있고, 죽일 일도 해칠 일도 없으니, 마음 편히 가져라.”

“고맙구먼유. 결코, 원한을 갖지 않겠구먼유. 고맙구먼유.”

온동이 연신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때, 온동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 음성이 이연의 뒤에서 일었다.

“하하하. 이놈 참… 아버지, 이놈이 어찌 이리 우리말을 잘한답니까?”

이연의 둘째 아들 세민이었다.

세민의 뒤에는 첫째 건성과 셋째 원길도 나란히 서 있었다.

이 아이들은 부친의 출정을 배웅하러 나온 듯했으나, 둘째 세민의 표정은 마치 사냥 놀이를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러 나온 것처럼 근심 걱정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이연이 세 아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며 말하였다.

“나 없는 동안은 건성이 집안의 기둥이다. 너희는 형을 따르고, 집안일을 돕거라.”

첫째 건성이 고개를 끄덕이니, 둘째 세민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감히 우리 집안에 생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심려치 마시옵고 대승을 거두소서.”

고작 열 살 남짓 된 세민이 이처럼 어른스럽게 말하니, 이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래,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겠노라.”

“하온데, 이 아이는 대체 무엇이기에, 내내 갇혀 지내다가 전장에까지 끌려가나이까?”

이미 몇 달 전부터 갇혀 지내던 온동의 존재를 이상히 여겨 왔던 세민이 출병하는 부친에게 물은 것이다.

아마도 오늘이 아니면 더는 온동을 볼 날이 없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연이 온동의 조그만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고구려 위장군 온달의 일가라고 하는구나. 끌고 오라 하니, 이렇듯 데려는 가는데… 어찌 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이연의 말투 속엔 온동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살며시 담겨 있었다.

“고구려의 위장군 온달이라면… 그 무예가 신기에 달했다는 장수 아닙니까? 우리 수와 맞서고 이미 만리장성까지 넘은 장수의 일가라면 이곳에 남아 있는 듯 언젠간 참수될 것이니, 전장에 끌려간들 불쌍히 여기실 것 없사옵니다.”

어린 아들의 말에 이연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우리 세인이가 마치 배적처럼 말하는구나. 이 아이가 영특하나, 아이답지 않으니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구나.’

부친 이연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 세민이 바로 화제를 바꾸어 말하였다.

“아버지, 영이는 제가 부족함 없이 잘 돌보겠나이다.”

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세민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 아이와 너희는 남이 아니란다. 이것은 내가 황제 폐하와 남이 아니듯 같은 이유이니, 더는 묻지 말고 잘 돌봐야 하느니라.”

부친의 당부에 세민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속으로 삼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일가라 여기고, 동생으로 생각하여 살피고 돌보겠습니다.”

이에 이연이 만족하여 말에 오르니, 배적도 뒤따라 말에 올랐다.

* * *

고구려 군은 조양을 지척에 두고 올루스 속 게르 안에서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엔 고구려 장수뿐만 아니라, 카사르와 호타크, 쇼락 등이 참여했고 평강도 온달의 곁에 자리하였다.

“대 돌궐 총사령관인 공손성이 요격대총관에 임명되어 기병 십만을 이끌고 오고 있다하옵니다.”

우랑이 지도를 가리키며 운을 띄우니, 공별이 쓴 입맛을 다셨다.

“돌궐을 상대하던 기병들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수의 정예지요. 대장군,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나이까?”

기마민족인 돌궐에 맞섰던 수의 기병 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다.

강이식도 쉽게 답하지 못하니, 우랑이 말을 이었다.

“더구나, 태원에서도 태원유수 이연이 기병 오만을 이끌고 오고 있사온데, 이들 역시 돌궐에 맞서던 기병 전력이옵니다.”

우랑의 설명에 강이식이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온달은 강이식이 무척 근심이 크다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적지라, 적의 수가 많고 강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쉽지 않은 적이겠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든다면 못 당해낼 적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아우님, 내 걱정은 우리 앞으로 몰려올 적 때문이 아닐세.”

“하오면?”

“실은 말일세. 을지문덕이 계책을 내기를 나와 아우님이 빠르게 북평, 대산, 조양, 어양을 무력화시킨 후. 다시 만리장성 밖으로 나오라 했다네. 을지문덕은 공손성이 움직일 것을 예견했다네. 우리는 만리장성 밖에서 공손성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도록 되어 있었다네.”

“다시 만리장성 밖으로 물러난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우리의 목적은 한왕 양양의 삼십만 대군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다 꽃피는 봄에 재진격하게 하는 것일세. 하여, 공손성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물러나 만리장성 밖에서 그들의 앞을 막도록 되어 있네. 헌데…….”

“하온데?”

“임유관이 문제일세.”

이미 임유관은 막리지 연태조가 진입하였다고 전령의 보고가 있었다.

“임유관이 어찌 문제이옵니까?”

온달이 의아해 물으니, 평강이 강이식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임유관은 막리지께서 취하셨으니, 적의 보급로를 원천 봉쇄할 수 있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오나, 우리가 만리장성 밖으로 군을 물릴 경우, 공손성이 막리지의 배후를 치고 보급로를 열 수 있다는 약점이 남게 되지요.”

임유관은 만리장성 밖 적을 막는데 탁월하였으나, 배후의 공격엔 취약했다.

사실, 연태조도 공성병기를 끌고 가 공성을 펼칠 듯 전개만 하며 시간을 끌 계획이었으나, 상장군 대건상이 먼저 진입하니, 뒤따라 군을 몰아 들어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막리지께 전령을 보내어 당장 임유관에서 나와 다시 진을 펼치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온달이 물으니, 평강이 고개를 저었다.

“막리지께서 임유관에 진입하신 이유는 적이 우리 계책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임유관에서 쉽게 물러난다면 적들이 수상히 여길 것입니다.”

“허면 어찌해야 되겠소?”

“우린 일단 공손성과 대적하다 만리장성 밖으로 물러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물러나면 수나라 군이 임유간으로 향할 것이고 막리지께선 그때 자연스럽게 임유관에서 물러나 앞에 진을 치면 되실 것이옵니다.”

온달과 강이식은 평강이 말한 진행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평강이 한마디 덧붙여 당부하였다.

“막리지가 쉽게 임유관에서 물러날 것이라 적들이 알아서 아니 되옵니다. 만일 적들이 눈치 채고 먼저 임유관 앞에 진을 펼칠 경우, 막리지께선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됩니다.”

“…….”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수나라 군은 만리장성 밖 한왕과 연락이 쉽지 않을 터이니, 우리만 조심하면 공손성이 눈치 챌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강이식이 허허 웃으며 장담하였다.

“공주마마,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장, 전력으로 싸우다 패하여 물러나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오기에, 감히 적들이 눈치 채지 못할 것이옵니다.”

평강이 강이식을 따라 미소 지으며 온달을 바라보니, 매사 진심인 온달이 난처해하였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사력을 다해 적에 맞서는 것은 부담 없으나, 일부러 패하여 군을 물리는 재주는 온달에게 없는 능력이었다.

보다 못한 막바우가 온달을 대신하여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하였다.

“제가 장군을 모시고 잘 패하여 만리장성 밖으로 물러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막바우의 장담에 평강이 고개를 끄덕이니, 강이식이 한마디 덧붙였다.

“불패장군 온달이 패하는 것이니, 대충 물러나면 아니 되네.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한 후 패하여 물러나야 적들도 믿을 걸세.”

“그건 염려치 마십시오. 타격은 우리 장군께서 알아서 줄 것이고, 잘 패하는 것은 제가 할 터이니, 여기에 실수는 없습니다.”

이에, 강이식이 흡족해 지도로 시선을 옮기며 말하였다.

“우린 겨우내 이 만리장성 밖에서 유격전을 펼칠 것이네. 공손성의 기병을 만리장성에 묶어 두는 동시에, 한왕의 대군을 수시로 공격하게 될 것이네.”

“…….”

“적은 가을에 탁현을 떠난 터라, 겨울을 넘길 채비가 안 되어 있네. 우리에겐 이 올루스가 있으나, 그들은 없으니 이 전쟁! 반드시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일세.”

강이식의 말을 경우가 카사르와 호타크에게 통역해 주니, 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마도 자신들의 올루스가 고구려의 대장군에게 인정받는 것 같아 흡족한 모양이었다.

* * *

고구려 군이 조양 앞에서 작전 회의를 펼치기 칠 일 전.

이름 없는 구릉에서 내려온 태자 양광은 서둘러 한왕 양양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작 두 식경 거리였기에, 호위를 맡은 소장황의 마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이 두 식경의 거리를 결코 편히 두지 않았다.

소장황이 부장 설달화와 군을 나누어 휘몰아치듯 쫓아낸 고구려 군이 드넓은 광야 끝까지 흩어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삼면으로 넓게 진을 펼치며 에워싸 오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반원을 그린 고구려의 포위망은 고작 남서 방면만이 열려 있었고, 이 방향은 묘하게도 한왕 양양의 진영과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상장군 주영과 모달 화전이 이끈 말갈기병들은 결코 거리를 좁히지 않고 기사로 살을 날리며 수나라 군사를 괴롭혔다.

이에, 소장황이 크게 노하여 설달화에게 몰아치라 명하니, 또다시 설달화가 군을 나누어 살을 날리는 말갈 기병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허나, 이때를 노려 대모달 흑비걸이 개마무사 일만 기로 설달화가 이끈 수의 기병을 향해 돌진하니.

설달화의 군사들은 앞에선 말갈 기병을 대적해야 하고, 옆에선 개마무사의 공격을 막아 내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소장황이 급히 기병을 이끌고 설달화를 구원하러 내달리니, 요동성주 고승의 삼천 기병이 곧 바로 태자 양광의 행렬을 급습하였다.

태자를 구하기 위해 소장황이 다시 말머리를 돌리자, 요동성주 고승이 급히 군을 물리고 거리를 두며 살을 날리라 명하였다.

겨우 개마무사들의 공격에서 벗어난 설달화가 다시 소장황과 군을 합치니, 고구려 군은 이들을 삼면에서 넓게 에워싸고 화살을 날렸다.

살 길은 오직 고구려 군이 에워싸지 않은 남서 방면뿐이었다.

“이놈들이 우리를 한왕과 멀어지게 하려는구나.”

태자 양광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양소가 소장황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

“어찌 한왕이 대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 것이오! 당장 한왕에게 전령을 보내 군을 이끌고 오라 하시오!”

고작, 두 식경 거리였기에, 애써 전령을 보내지 않아도 한왕은 이미 척후대에게 보고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군을 보내지 않는 한왕의 행동에 양소가 격분해 소장황에게 호통을 치니, 태자 양광이 손을 내저었다.

“양이도 내가 포로로 잡히는 일은 원하지 않을 것이오. 너무 닦달하지 않아도, 내가 적당히 고생한 뒤에는 구하러 올 게요. 그래야 내가 무척 고마워 할 터이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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