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겨울 전쟁 (6)
임유관 앞에 진을 친 공지열은 삼일 째 꼼짝도 하지 않고 동향만 살피었다.
이미 십여 차례나 임유관 안에는 고구려 군의 흔적조차 없다는 보고를 접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에 수하 장수들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임유관 공격을 재촉하였다.
“장군, 임유관엔 고구려 놈들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서둘러 탈환하십시오.”
이에 공지열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들 같으면, 저 임유관을 버려두고 갈 수 있으시오? 고구려 놈들이 숨어서 우리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요.”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성품에 이미 한차례 기습을 당한 뒤였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공지열이었다.
“하면 장군,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것이옵니까?”
“당연히 탈환해야지 두고 봐서야 되겠소? 다만 고구려 놈들의 꾀임에 빠질 수 없어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오.”
“장군,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부디 속는 셈 치시고 공격을 강행하십시오.”
“아니, 전장에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속는 셈치고 군을 움직여 사지로 몰라는 말이오?”
공지열이 버럭 역정을 내니, 공격을 재촉하던 장수들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공지열이 다시 차분한 음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대들은 들으시오. 내가 이 앞을 지키면, 기껏 임유관을 점령한 저 고구려 놈들이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오.”
“그것은 어인 말씀이신지?”
장수들이 의아해 물으니, 공지열이 자신 있게 말하였다.
“생각해 보시오. 임유관 안은 우리 수의 영토요. 더구나, 탁현의 한왕 전하가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계시니, 곧 군을 몰아 임유관으로 진격해 오실 게요. 그때 우리가 이 앞을 지키고 있으면 고구려 놈들은 앞뒤가 막힌 신세가 되는 것이오.”
만리장성을 빙 돌아 탁현으로 전령을 보냈기에, 한왕이 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오고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공지열의 설명에 수하 장수들도 더는 공격을 재촉하지 않게 되었다.
칠 일째 되는 날 아침이 되자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한왕으로부터 전령이 당도하였다.
“전하께서 내 서신을 받으신 게야. 곧 군을 몰아오신다 하더냐?”
공지열이 급히 전령에게 물었다.
“장군의 서신을 받으셨는지 소인은 알지 못하옵니다.”
“그래? 너야 모를 수 있지. 한왕 전하께서 대군을 출병하셨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래, 수가 얼마나 되더냐?”
“삼십만으로 한왕 전하께서 직접 행군원수부의 대군 전부를 이끌고 출병하였나이다.”
전령의 말에 공지열은 입이 귀게 걸릴 듯 기뻐하였다.
“이보시오! 내 뭐라 하였소? 이렇듯 한왕 전하께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임유관 탈환에 나섰으니, 우리는 이 앞을 단단히 지키면 저 어리석은 고구려 놈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하하하.”
그러나 공지열이 기뻐함과 달리 한왕이 보내온 전령은 식은땀만 쏟고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공지열이 물었다.
“너는 왜 그리 땀을 뻘뻘 흘리는 게냐? 오는 동안 고뿔이라도 걸린 것이냐?”
“그것은 아니옵고, 한왕 전하께서 공 장군께 전하라 하시길…….”
전령이 눈치만 살필 뿐 말을 잇지 못하니, 공지열이 답답해하며 재촉하였다.
“속 터지는구나. 어서 말하거라.”
이에, 한왕이 보내온 전령이 공지열의 눈치를 살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주 총관이 보급 물자를 배로 운송해 올 터이니, 공 장군은 임유관을 단단히 지키며 이를 수송해 오라 하셨나이다.”
“뭐? 뭐라?”
“더불어, 고구려의 막리지가 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오고 있으니, 방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미 임유관에 휘날리는 삼족오 기를 봤는지 전령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헉! 한왕 전령께서 내가 보낸 서신을 받지 못하신 건가?”
탁현으로 보낸 전령이 당도하기 전에 한왕이 출병했다 생각한 공지열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더니, 전령에게 물었다.
“아니, 한왕 전하께선 이곳으로 오지 않으시고 그럼 어디로 가신 게냐? 설마 벌써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더냐?”
봄에 출병하기로 정했기에, 아직 물자도 마련되지 않은 한왕이 벌써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 리 없다 생각하여 물으니, 전령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태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출병하셨나이다. 물, 물자가 부족하오니… 공 장군께선 부디… 임유관을 단단히 지키시어 주 총관이 운송해 오는 물자를 한왕 전하께 수송하여 주시옵소서.”
만리장성 밖으로 나오니,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무척이나 느리고 제한적이었다.
만리장성 안에선 이미 장안까지 고구려 군의 동향이 알려지고 있음에도, 인접한 한왕과 공지열은 서로의 움직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달과 강이식이 만리장성을 따라 서쪽으로 빠르게 진군하며 주요 요충지들을 점령하였기에, 만리장성 밖으로는 소식이 늦게 전달되고 있었다.
전장에서 정보란 전황을 파악하여 전세를 판가름 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으니, 만리장성 밖 한왕과 공지열은 계속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장군! 지금이라도 임유관 탈환에 나서야 하옵니다.”
수하 장수들이 서두르니, 공지열도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즉시 임유관 탈환에 나서시오!”
마땅한 공성병기를 지니진 못하였으나, 사다리와 갈고리를 매단 밧줄은 이미 마련하였기에 수하 장수들이 명을 받아 빠르게 일어섰다.
이때, 척후병이 급히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와 아뢰었다.
“장군! 고구려의 상장군 대건상이 기병 오천을 이끌고 접근 중이옵니다!”
“뭐라? 거, 거리는?”
공지열이 놀라 물으니, 척후병이 숨도 쉬지 않고 답하였다.
“한 식경 거리이옵니다.”
“이럴 수가…….”
만일 임유관에 고구려 군이 숨어 있다면, 성벽을 오르던 공지열의 군사들은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임유관 안에는 단 한 명의 고구려 군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 공지열이 임유관을 탈환할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허나 공지열은 임유관에 고구려 군이 매복하고 있다 믿고 있었으니, 그에게 남은 단 한 차례의 기회는 허무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공지열이 자리에 다시 털썩 앉으니, 척후병이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상장군 대건상의 뒤로… 고구려의 막리지가 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공지열이 짧게 말하고는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났다.
“이곳에 계속 진을 치는 것은 앞뒤로 고구려 군을 맞이하는 격이니, 당장 한왕 전하와 합류하도록 합시다. 행군 준비를 하시오!”
공지열의 이 명에 수하 장수 어느 하나 이견을 다는 이는 없었다.
* * *
공지열이 급히 군을 몰아 떠난 뒤, 상장군 대건상이 이끈 고구려의 기병 오천 기가 임유관 앞에 당도하였다.
관문 위와 길게 뻗은 성벽 위엔 아직도 삼족오 기가 펄럭이며, 수나라 군사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찌된 일이지? 막리지께서 말씀하시길, 임유관은 수나라 군사들이 탈환하여 단단히 방비 중일 것이니, 서둘러 공격하지 말고 공성병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저 꼴이 탈환한 모양은 아니지 않은가?”
대건상의 물음에 대모달 태홍과 모달 여범도 펄럭이는 삼족오 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깃발부터 뽑는 법인데… 이놈들이 뭔 꿍꿍이일까요?”
태홍이 물었으나 대건상이 답을 알 리 없었다.
이에 여범이 나서며 말하였다.
“소장이 정예 일백을 이끌고 성벽 위에 올라 잠시 둘러보고 오겠나이다.”
“부디 조심하며 살살 다녀오시게.”
상장군 대건상이 명을 내리니, 두려움 모르는 맹장 여범이 고작 백여 명의 정예만 이끌고 성벽에 바짝 붙어 살며시 기어올랐다.
여범과 일백의 정예가 성벽 위에 오르고도 한참 동안이나 고요가 유지되니, 대건상은 더욱 의아해 관문만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관문이 열리고 여범이 앞장서 나오며 소리쳤다.
“상장군! 진입하소서!”
대건상은 수나라 군사들이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경계를 단단히 하며 진입하였다.
바짝 긴장한 고구려 군이 말을 몰아 진입하며 언제라도 말을 돌려나올 채비를 하였으나, 막상 임유관으로 진입하고 보니 수나라 군사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인고?”
대건상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저 주위만 살폈다.
이에 여범이 다가와 아뢰었다.
“이곳을 수비하던 수나라 군사들은 모두 결방당한 채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뭐라? 그럼 수나라 놈들이 무주공산인 이곳을 탈환하지 않았단 말인 게야?”
“그런 듯하옵니다.”
“그렇다면 이놈들은 이곳들 탈환하지 않고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이게 뭔 수작이지?”
대건상은 더욱 수상히 여겨 방비를 앞뒤로 철저히 하며 곧 당도할 연태조를 기다렸다.
* * *
한왕 양양은 구릉을 포위한 고구려 군과 두 식경 거리를 유지한 채 진을 펼쳤다.
이들보다 앞장 선 선봉장 소장황은 이미 고구려 군이 포위하지 않은 구릉의 남쪽 방면으로 접근하여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태, 무탈하신가?”
소장황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한왕을 섬기는 그러선 태자의 안위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구하지 못하여 고구려 군에게 태자가 사로잡힐 경우, 강화가 맺어지고 황제의 진노가 두려울 따름이었다.
“뭐, 무고하시니 황제 폐하의 진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헌데, 어찌하여 이곳은 포위하지 않은 것일까?”
고구려 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섣불리 구릉 위로 올라 태자를 구할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이미 고구려 군도 수의 원군이 당도했음을 파악했음에도 별다른 움직임조차 없었다.
“장군, 동과 서, 북. 삼면을 에워싼 고구려 놈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태자 전하를 구하시지요.”
부장 설달화가 공격을 재촉하니, 소장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다. 군을 둘로 나누어 동과 서를 치고 빙 돌아 북까지 밀고 들어가자.”
성급히 구릉 위에 올랐다간 오히려 고구려 군이 아래에서 포위를 해올 수도 있기에 선제공격으로 방향을 정하여 설달화와 군사를 둘로 나누었다.
소장황이 동으로 방향을 정하고, 설달화가 서쪽 방면으로 방향을 정하여 공격을 개시하니, 구릉 위에서도 함성이 울리며 포위 중인 고구려 진영으로 화살을 날렸다.
“단순히 겁에 질려 숨어 계셨던 것은 아니셨구나.”
소장황이 구릉 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고는 말 잔등을 발로 차 더욱 속도를 가하였다.
“휘몰아쳐라!”
소장황의 기병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니, 고구려 군은 제대로 응전도 못한 채 말에 올라 도망치기 바빴다.
이에 구릉 위에선 더욱 함성이 크게 울리며 도주하는 고구려 군을 향해 빗발치듯 화살을 날렸고, 소장황도 기세 올라 동에서부터 북으로 마구 말을 몰아 나갔다.
고구려 군이 도망친 진영에선 군량미와 각종 보급 물자가 가득하여 뒤쫓던 수의 군사들이 말을 돌려 취하기 바빴다.
이에 소장황이 격노하여 거대한 월도를 치켜들고 약탈에 취한 자신의 군사들을 마구 베니, 겁에 질린 군사들이 다시 말에 올라 고구려 군의 뒤를 쫓았다.
파죽지세로 동에서부터 북으로 구릉을 빙 돌아 고구려 군을 몰아내며 돌진한 소장황은 이윽고 부장 설달화가 이끈 군사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장군! 대승이옵니다!”
부장 설달화가 상기된 얼굴로 말하니, 소장황도 고개를 끄덕이며 구릉 위로 시선을 돌렸다.
구릉 위에서도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 위에서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고구려 놈들의 잔수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오직 우리의 무력으로 태자를 구한 것이다! 이제 전리품은 마음껏 취해도 좋다!”
기껏해야 병장기와 군량미가 고작이었으나, 수의 군사들은 기뻐 함성을 지르며 고구려 군이 버리고 간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구릉 위에서도 양현감과 양소가 태자 양광을 호위하며 내려오니, 소장황이 말을 몰아 달려 나가 맞이하였다.
“태자 전하, 소장 소장황이옵니다. 무탈하셨나이까?”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간단히 예만 올리는 소장황을 양소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태자 양광은 개의치 않고 답하였다.
“애쓰셨소. 고구려 놈들이 함정을 파놓았을 터인데, 무척이나 용맹하셨구려.”
태자의 말에 소장황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인 말씀이온지?”
“나는 미끼요. 여기는 함정이란 말이오. 아무튼 나는 살고 봐야겠으니, 먼저 가리다. 그대는 부디 사위 경계를 철저히 하여 따르시구려.”
태자 양광이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군을 몰아가니, 소장황이 부장 설달화를 불렀다.
“여기가 함정인가?”
“우리가 접한 정보에 의하면, 고구려 군의 수는 이미 빤하여 패주한 놈들 이외에 다른 적은 없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오랫동안 시달리시어,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듯하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아무튼 태자 전하를 한왕 전하께 모시고 가세.”
부장 설달화의 말에 소장황도 동의하여 태자 양견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