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겨울 전쟁 (5)
행군원수부의 수장이며, 수 황제 양견이 고구려 정벌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한 한왕 양양.
그의 수나라 주력 군대가 이름도 없는 어느 낮은 구릉으로 향하고 있는 사이.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과 위장군 온달은 만리장성의 동단인 임해관을 무혈입성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만리장성을 따라 서쪽으로 쭉 이어진 수나라의 주요 요충지 역시 무혈입성하기 위해 쾌속 질주를 시작했다.
고구려 군의 진격은 곧 북평, 대산, 어양, 조양은 물론이요.
주변 크고 작은 성들을 경악케 했다.
그리고 곧, 봉화와 봉화를 타고, 파발과 전령들은 물론, 수많은 전서구들이 날며 장안의 황제 양견에게 전해졌다.
대륙이 들끓고 있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만리장성을 넘은 한왕 양양과 그의 군대만이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의 황제 양견은 즉시 수의 대돌궐 총사령관인 공손성을 불렀다.
밤을 새워 말을 달려온 공손성은 칼을 찬 채로 입조하여 예를 올리자마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 예로부터 그 어느 강력했던 왕조도 큰 전쟁을 두 지역 이상 동시에 치러 승리를 거둔 전사는 없사옵니다.”
“돌궐을 복속시키기 어려운가?”
양견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공손성은 거침없이 크게 답하였다.
“돌궐은 오래도록 동과 서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고 있사오며 힘에 밀린 부족장들이 우리에게 속속 귀순하고 있는 상황이옵니다.”
“…….”
“허나! 아직도 돌궐은 광활한 영토를 지니고 십여 개의 부족마저 흡수하여 지배하고 있기에 우리가 동쪽의 고구려에 집중하는 사이 언제든 서쪽에서 밀고 내려올 수 있사옵나이다.”
“음… 하여?”
양견이 주위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음을 흘리며 공손성의 말을 재촉하였다.
“이곳 장안은 고구려와는 멀리 있사오나, 돌궐과는 무척이나 가깝사옵니다. 소장이 접한 정보에 의하면 고구려의 태왕이 돌궐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하옵니다.”
“뭐라?”
양견의 미간이 좁혀지니, 감히 그 어느 신하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손성은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돌궐이 고구려 태왕을 도와 움직일 시, 이 전쟁은 우리 수에게 무척이나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사옵니다. 소장이 돌궐을 거세게 압박한다면, 돌궐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는 있사오나, 이미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군도 좌시할 수는 없는 법이오니…….”
공손성이 말을 멈추고 양견을 똑바로 쳐다보니, 양견이 답답한지 눈살을 찌푸리며 재촉했다.
“그대는 하고자 하는 말을 속시원히 하라.”
이에 공손성이 결심을 굳힌 듯 당당히 가슴을 펴고 아뢰었다.
“아뢰나이다. 돌궐을 적으로 돌리지 마시고, 사신을 보내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시며 품으소서.”
“뭐라? 그간의 노고?”
돌궐의 노고란 오직 수의 변방을 침략해 약탈을 일삼다가 공손성에게 쫓겨 물러난 것이 전부였으니, 양견으로선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폐하! 돌궐에게선 우리 수가 뺏고 얻을 것이 없사옵니다. 돌궐은 아무리 공격해도 광활한 초원 저 멀리 도망쳐 세를 키운 후 다시 돌아오는 족속들이옵니다. 허나, 고구려는 다르옵니다.”
“다르다?”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께서 돌궐을 품으시오면 소장이 대돌궐 총사령부의 군사들을 이끌고 감히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군을 물리치겠나이다.”
양견도 생각해 보니, 돌궐과 고구려를 동시에 적으로 돌려 좋을 일은 없어 보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황제에게 공손성이 큰 소리로 허락을 재촉하였다.
“폐하, 가납하여 주옵소서.”
“한왕이 군을 돌려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놈들을 소탕하는 것은 어떠한가?”
양견의 물음에 공손성이 단호히 답하였다.
“태자 전하를 버리시겠나이까?”
공손성의 이 무엄한 물음에 양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라가 우선이니, 버릴 수도 있다.”
양견의 단호한 대답에 공손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페하께서 태자를 폐위하실 수는 있사오나, 고구려에게 사로잡혀 버릴 수는 없사옵니다. 이는 우리 수의 치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옵니다.”
태자의 신변을 두고 벌이는 황제와 공손성의 대화에, 주위 신하들 모두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고요 속에서 황제 양견의 한숨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음…….”
긴 한숨 한번 내쉰 양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돌궐 가간이 우리 수나라에 공이 큰 것에 비해, 고초가 많았던 모양이다. 이에 후한 상을 내려 노고를 치하할 터이니, 준비하라!”
황제 양견의 명에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받았다.
이어서 황제 양견이 굳은 표정으로 공손성에게 다시 명하였다.
“그대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은 고구려 군을 몰아내라.”
황제의 명을 받은 공손성이 절을 올리고 물러나니, 그제야 모든 신하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 * *
상장군 주용은 구릉 위에 목책을 세우고 버티는 수나라 군사들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쪽 길을 열어 주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저기를 기어올라 버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막리지 연태조가 긴밀히 명을 내리길, 수의 태자를 사로잡지 말고 남서 방면으로 몰라 했었다.
그러나 수의 태자 양광은 어찌된 영문인지 길을 열어 줘도 도망치지 않고 버티니 구릉을 점령해 사로잡을 수도 없고, 실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들 모이셨습니다.”
모달 화전이 다가와 공손히 아뢰니, 상장군 주용이 막사로 발을 옮겼다.
막사 안에는 개마무사 일만을 이끈 선봉장 흑비걸과 요동성주 고승이 먼저 자리해 있었다.
“상장군, 어찌하면 좋소?”
젊은 성주 고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 도망가지 않는 놈을 상대로 공격할 수도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소.”
주용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니, 흑비걸이 답답한 듯 말하였다.
“제가 개마무사들을 이끌고 구릉 위를 휘몰아치겠나이다. 허면, 놈들이 쫓겨 내려갈 터이니, 그때 다시 남서 방면으로 몰아가지요.”
그러나 상장군 주용이 고개를 저으며 답하였다.
“놈들이 도망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해 싸우면?”
“설마, 수의 태자가 그리 쉽게 죽기를 각오해 싸우겠나이까?”
흑비걸이 조심스럽게 물으니, 다시 주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 설마가 현실이 되어 죽기를 각오해 싸우면? 죽일 것이오? 사로잡을 것이오? 아니면 볼기를 쳐 도망치라 내쫓을 게요?”
이에 흑비걸이 답을 못하니, 고승이 답답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막리지는 어찌 이런 명을 내려서… 허허, 이것 참… 이를 어찌한다…….”
잡을 수도, 죽일 수도 없으니, 여간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모달 화전이 조용히 들어와 상장군 주용에게 아뢰었다.
“종리위두대형의 명을 받아, 종리대형 명림신이 왔사옵니다.”
“뭐? 그자가 왜?”
“들라 하오리까?”
“날도 쌀쌀한데, 세워 둘 수야 없지. 들어오라 하게.”
주용의 명에 곧 명림신이 들어와 예를 올렸다.
“상장군을 비롯한 장수들 모두 전장에서 노고가 많으시옵니다.”
“종리대형이 여기는 어찌 오셨소?”
상장군 주용을 대신하여 요동성주 고승이 물으니, 명림신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국장 어르신을 포함하여, 전시 조정의 대소 신료들 모두는 수의 태자를 사로잡은 여러 장수들의 공을 칭송하고 있나이다. 하여 국장 어르신께옵서 소인을 보내 좋은 술을 올리며 치하하라 명하셨나이다.”
상장군 주용이 고개를 갸웃하며 명림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놈이 술병도 안 들고 와서, 괜한 소리로 우리를 재촉하는구나.’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명림신에게 주용이 퉁명스레 물었다.
“좋은 술이라… 헌데, 오시면서 보지 못하였소? 수의 태자는 아직 저 구릉 위에 잘 버티고 있는데, 사로잡았다고 누가 말하더이까?”
“대군이 이렇듯 둘러쌌으니, 사로잡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사옵니까? 언제든 군을 몰아 위로 오르면 주머니 속의 구슬을 취하듯 쉽게 잡힐 태자가 아니옵니까?”
“쉽다라… 전쟁해 보셨소? 목숨 걸고 싸우는 전장에서 쉬운 일은 없는 게요.”
이에 명림신이 고승과 흑비걸을 돌아보며 답하였다.
“영주를 공략에서, 도주로를 열어 주어 수의 태자를 놓아준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막리지를 불러들이라 말들이 많사옵니다.”
“뭐라?”
상장군 주용이 놀라 물었으나, 명림신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하오나, 소인이 이곳에 와 보니, 수의 태자가 영주성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할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퇴로를 열어 준 후, 뒤를 쫓아 사로잡을 계책이었음을 알 수 있었나이다.”
‘이놈이 우리를 어르고 달래서 구릉 위로 군을 몰아 수의 태자를 잡으라 말하는구나. 허허, 이놈 참 맹랑하구나. 허허, 쯧쯧.’
상장군 주용이 명림신의 속을 헤아리며 혀를 찼다.
이때, 명림신의 말을 조용히 듣던 젊은 성주 고승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전장에 나선 장수를 누가 쉽게 부른단 말이오? 더구나 군권을 쥐고 전장을 지휘하는 막리지를 문책하기 위해 불러들여? 막리지는 지금 임유관으로 진격 중인데, 어찌 신료들은 적을 이롭게 한단 말이오?”
이에 명림신이 손을 내저으며 답하였다.
“아니지요.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는, 수의 태자를 사로잡지 않고 놓아주는 행위가 이적 행위옵고, 이적 행위를 하는 장수를 직권 해임하고 불러들임은 당연한 일이옵지요.”
“뭐라? 이자가 진정!”
고승이 버럭 소리 지르니, 명림신이 두 손을 모아 읍하며 말을 이었다.
“역정 내시지 마옵소서. 막리지에 대한 오해는 소인이 이곳에 온 뒤로 모두 풀렸나이다. 수의 태자는 이미 사로잡힌 상태이니, 소인은 돌아가 여러 장수들의 공을 그대로 소상히 알릴 것이옵니다.”
이에 흑비걸이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아직 사로잡지 못한 태자를 사로잡았다고 아뢰겠단 말이오?”
이에, 명림신이 머리 숙여 답하였다.
“대모달께 소인 아뢰나이다. 소인이 이곳으로 오며 듣기로, 수의 행군원수부 행군대총관 한왕 양양이 대군을 이끌고 태자를 구하기 위해 오고 있다 하더이다. 장군들께선 시간이 없사옵니다.”
명림신이 은연중에 겁박하니, 상장군 주용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양양이 그놈 참… 직함 한번 길구나.”
여유롭게 웃음 짓는 상장군 주용을 명림신이 재촉하였다.
“상장군, 시간이 없사옵니다.”
“종리대형! 우리의 작전이 뭔지 아시오?”
주용이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물으니, 명림신이 의아해 되물었다.
“소인으로선 헤아릴 수 없사오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이옵니까?”
“저 구릉 위 태자를 미끼로 양양이를 끌어들여 때려잡는 것이오.”
이에 명림신이 깜짝 놀라 손을 마구 내저었다.
“아니 될 소리옵니다. 태자만 사로잡으면 강화를 맺고 전쟁을 끝낼 수 있사온데, 어찌…….”
그러나 주용은 검지손가락을 휙휙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보시오. 강화를 맺을 때, 양견의 아들 하나보다, 아들 둘이면 더 확실하고 좋지 않소? 다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그리 알고 종리위두대형에게 걱정마라 전하시구려.”
“아니 되옵니다. 속히, 구릉 위 태자를 잡으소서. 수의 행군원수부 행군대총관 한왕 양양이 대군을 이끌고 오니, 전쟁을 여기서 마무리해야 하옵니다.”
명림신이 거듭 사정하듯 재촉하였으나, 상장군 주용은 귀찮다는 듯 모달 화전을 돌아보며 명하였다.
“종리대형께서 돌아가시니 모시거라. 그리고 좋은 술은 잘 받아 두고.”
화전이 군사들을 불러 명림신을 막사 밖으로 데리고 나가니, 흑비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상장군 어찌 하시겠소?”
아마도, 막리지는 몰론이요.
자신들까지 문책을 요구할 신료들이 염려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곧 들이닥칠 한왕 양양의 삼십만 대군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흑비걸도 겁을 먹었나?’
주용이 흑비걸을 빤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장에선 지휘권자의 명을 따르는 법. 우리는 군권을 쥐고 전장을 지휘하는 막리지의 명을 따를 뿐이오. 막지리의 명을 뒤엎을 수 있는 령은 오직 태왕 폐하뿐이시지, 조정 신료들과 오부 귀족들이 아니오.”
상장군 주용의 단호한 태도에 흑비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상장군, 그럼 됐소이다. 상장군의 뜻이 그렇다면 죽을지언정 따를 수밖에…….”
이때, 검은색 복색의 사내가 살며시 막사 안으로 스며들 듯 소리도 없이 들어왔다.
“누구냐!”
고승이 놀라 소리치니, 사내가 허리 숙여 예를 올리며 답하였다.
“소인 요동성 서부총관부의 명을 받고 온 창주라 하옵니다.”
“을지문덕이 보냈구나. 말하라!”
주용이 빠르게 명하니, 창주가 다가와 서신을 올렸다.
을지문덕의 서신을 읽는 주용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막리지께서도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창주가 덧붙이자, 주용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뒤, 서신을 촛불에 태워 재를 날리며 주용이 물었다.
“잘 패하여, 뿔뿔이 흩어질 터이니 염려 말라 전하시게. 헌데, 이리하면 진정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하던가?”
“내년, 봄이 오면… 삼십만은 삼천으로 변할 것이라 하셨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