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겨울 전쟁 (4)
수의 한왕 양양이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만리장성을 넘던 그 순간.
공공연히 임유관 함락을 선언한 연태조가 이끈 고구려 군의 위치가 한왕 양양에게 보고되었다.
“고구려의 본진과 임유관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이 고구려 놈들은 임유관 구경도 못한 채 우리에게 요격될 것이다.”
한왕이 거침없이 내뱉으며 진군 속도를 올리라 명하자, 선봉장 소장황이 보내온 전령이 말을 몰아와 아뢰었다.
“태자 전하께서 포위된 구릉을 확인하였나이다. 고구려의 상장군 주용과 요동성주 고승, 대모달 흑비걸이 도합 사만의 기병으로 태자 전하를 포위하고 있나이다.”
전령은 한왕 양양에게 태자 양광이 고구려 군에 포위된 구릉 위치를 숨도 쉬지 않고 급히 전하였다.
구릉을 포위한 고구려 군이 기병 일색으로 그 수가 사만에 이르니, 소장황이 이끈 삼만 기병으로선 쉽게 물리치기 어려워 보였다.
“소 장군은 승리를 장담하던가?”
한왕의 물음에 전령이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장군께선 구릉에 당도하는 즉시, 고구려 군을 쓸어버리고 태자 전하를 구하실 것이라 장담하셨나이다.”
전령의 대답에 한왕이 흡족해할 때, 채휘가 이견을 내었다.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나섰다는 것을 저 고구려 군도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옵니다. 따라서 만일 소 장군이 실수라도 할 경우, 고구려 군은 구릉을 올라 태자 전하를 사로잡을 것이니, 우리가 당도하기 전까지 소 장군이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대치하라 명하셔야 하옵니다.”
채휘의 말에 한왕 양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형님도 구해야 하나,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끈 군대도 임유관으로 향하고 있는 지금으로선 군을 둘로 나누거나, 소 장군에게 서둘러 형님을 구하라 명하고, 나는 고구려의 막리지를 막는 것이 최선이다. 헌데, 이 채휘란 놈이 무척이나 거슬리는구나.’
한왕 양양이 채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니, 제갈여가 공손히 아뢰었다.
“소인 제갈공명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병법을 익혀 왔나이다.”
제갈여가 자신을 내세우며 운을 띄우니, 한왕이 바로 물었다.
“그대는 그냥 편히 말하시게.”
“그럼 말씀 올리겠나이다. 만리장성 너머엔 고구려 군과 말갈 및 북방 이민족들의 군사가 십이만이 넘게 산개해 있사옵니다. 하여, 현 시점에선 군을 나누지 않고, 산개한 적을 하나하나 요격하는 것이 순서라 사료되옵나이다.”
“산개한 적을 순서대로 요격한다라… 허면 그 첫 번째가 고구려의 상장군이요? 고구려의 막리지요?”
임유관 공략에 나선 연태조의 군대를 요격하는 것이 우선인지, 태자 양광을 먼저 구하는 것이 우선인지 한왕 양양이 물으니, 제갈여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하였다.
“소 장군에게 우리를 기다리라 명하신 후, 우리가 신속히 군을 이끌고 가서 일거에 고구려 군을 물리쳐 태자 전하를 구한 뒤, 고구려의 막리지를 요격하는 것이 순서이옵니다.”
한왕도 생각해 보니, 태자 양광이 사로잡힐 경우, 기껏 출병한 보람도 없이 강화가 맺어질 것이 뻔하였다.
“그래, 일거에 구릉을 포위한 놈들을 쓸어버리고 형님을 구한다. 고구려의 막리지는 우리가 형님을 구하고 대군을 몰아가면 겁에 질려 군을 돌릴 것이다.”
이에, 채휘가 또다시 이견을 내었다.
“고구려의 대장군과 위장군 온달을 간과하셔서는 곤란하옵니다.”
“허면, 그대는 어찌하면 좋소?”
이견을 제시하였지만, 뒤이을 대안을 지니지 못한 채휘가 머뭇거리자, 한왕 양양이 비웃었다.
“그대는 오직 반대만 할 뿐, 대안은 없는 게요?”
한왕의 조롱에 채취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또다시 제갈여가 빙그레 웃으며 의견을 내었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은 고작 삼천의 말갈 기병을 이끌고 도주 중이었으며, 온달은 개마무사와 궁기병 도합 육천 기뿐이옵니다.”
“…….”
“이들을 돕는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은 그 수가 많다 하나, 군대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오니, 이들에게 군을 돌리는 것은 후순위로 두셔도 되시옵나이다.”
“그대의 말이 옳소. 과연 제갈공명의 후손답구려. 역시 제갈세가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구려.”
한왕 양양이 만족해 제갈여를 칭찬하니, 채휘는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왕 양양이 제갈여의 의견을 받아 들여 생각을 정하니, 수의 삼십만 대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한왕 양양이 가볍게 여긴, 강이식과 온달의 군대는 어느새 임유관에 다다르고 있었다.
올루스가 함께 움직이니, 보급 걱정도 없는 이들의 진군 속도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든 거침없이 신속하였다.
위충을 돕기 위해 출병했다 우랑과 카사르, 호타크에게 패한 공지열도 임유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몽고, 커레이트 연합군이 이들 수나라 군사들보다 빠르게 입유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 임유관을 취하는 즉시, 만리장성에 걸쳐 쭉 이어진 북평, 대산, 어양, 조양까지 일거에 함락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네.”
어느새 임유관 앞에 다다른 강이식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온달에게 설명하였다.
“전령이 전하길, 임유관은 막리지가 공략하러 공성병기를 이끌고 진군 중이라 혀였는데… 아니었습니까?”
온달이 의아해 물으니, 강이식이 빙그레 웃었다.
“공성병기를 이끌고 언제 도착하겠는가? 그 사이 놈들이 대비를 하지 않겠나? 막리지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놈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일세. 우리 고구려 내에 간자가 많아, 자네까지 속인 듯해 미안하네.”
강이식의 말에 온달도 그제야 이해를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막리지께서 고초가 크시겠습니다.”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우리가 일단 임유관을 점령하여 뒤에 오는 막리지에게 넘기면, 막리지야 편하고 좋겠지. 자, 그럼 시작해 볼까나.”
공지열이 이끈 군대가 돌아오지 않은 임유관의 수비 병력으로선 고구려 군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격하라! 성문을 열어라!”
공별의 외침에 말갈 기병 삼천이 일제히 말을 몰아 내달리며 임유관의 성벽을 향해 밧줄을 날리니, 갈고리를 매단 밧줄이 여지없이 성벽 위에 걸렸다.
말을 타고 빠르게 내달리던 말갈 기병들은 밧줄이 걸리자 허공에 몸이 쑥 떠오르더니, 이내 곧 성벽에 바짝 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경우가 명을 내려 궁기병과 몽고, 커레이츠 전사들이 기사를 펼쳐 성벽 위로 화살을 날렸다.
성벽 위 수나라 군사들도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렸으나, 그 수가 적고 이미 기세가 꺾인 터라 결코 위협적이진 않았다.
손쉽게 성벽 위를 점거한 말갈 기병들이 질풍처럼 치달아 성문마저 여니, 온달과 막바우가 선두에 서서 임유관으로 진입하였다.
“이곳이 수가 자랑하는 천하제일 관문 임유관이다! 하하하!”
뒤따라 진입하는 강이식이 호쾌히 웃으며 소리쳤다.
이에 기세 오른 고구려 군이 함성을 지르며 밀물처럼 진입하였고, 뒤이어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 전사들이 올루스를 호위하며 진입하였다.
너무도 손쉽게 바다와 접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을 점령하니, 고구려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삼족오 기를 걸어라! 곧 공지열의 군대가 들이 닥칠 것이다. 우리 삼족오 기에 질려 꽁무니를 빼도록 내걸어라!”
강이식의 명령에 임유관 곳곳에 삼족오 기가 펄럭이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아주 잠시도 이곳에 머물지 않고 바로 북평, 대산, 어양, 조양까지 내달리며 삼족오 기를 내걸 것일세.”
강이식의 말에 온달이 의아해 물었다.
“막리지를 기다려야 하지 않사옵니까?”
“기다릴 시간이 없네.”
“허면, 공지열이 군을 몰아 이곳을 차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차지하면 뭐하는가? 곧 막리지가 군을 끌고 올 것이고, 우리가 뒤를 돌아 칠 터인데, 그자가 지킬 수나 있겠는가? 이 임유관은 말일세, 만리장성 밖의 적을 막는 데는 탁월하나, 만리장성 남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적에겐 거의 무방비일세.”
온달은 임유관을 쉽게 내어준다고 강이식이 말하니, 그로선 이 상황이 알 듯 말 듯하여 평강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공주에게 이런 전개도 괜찮은지 물어봐야겠으나, 형님이 이렇듯 서두르시니, 말을 돌려 올루스에 다녀올 수도 없고, 난감하구나.’
이런 온달의 의중을 파악한 경우가 바로 소리쳐 전령을 불렀다.
“듣거라! 너는 공주 마마께 우리는 임유관을 지키지 않고 바로 북평, 대산, 어양, 조양까지 내달리며 삼족오 기를 걸 것이라 아뢰거라. 공주 마마께서도 우리의 전황은 아셔야 하니, 빠르게 전하고 안심하셨는지 묻고 오거라!”
경우의 명에 전령이 급히 말을 몰아 올루스로 향하니, 온달이 안심해 얼굴이 환해졌다.
‘경우 저 친구가 전한 말을 들은 공주가 뭔가 따로 의견을 내게 보내올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형님의 뜻을 따라 진군에 서두르자.’
잠시 뒤, 전령이 돌아와 아뢰었다.
“공주께선 훌륭한 계책이라 안심하고 따르겠다고 하셨나이다.”
이에 온달의 얼굴이 더욱 밝아졌다.
‘공주가 안심하고 따른다 하였으니, 형님이 말한 계책에 허점은 없는 게야. 내가 괜히 걱정한 것이야.’
이렇듯 온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니, 강이식이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그새, 사람을 보내 공주께 물어보고 온 겐가? 믿을 만하다 말씀하시지?”
온달이 무안해 답하지 못하니, 강이식이 온달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네. 나도 좀 이상했거든. 헌데, 이 계책은 을지문덕 그 친구가 세운 것이라 그저 믿고 따른 것뿐이네. 우리 온달 아우가 평강 공주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따르듯이 나 역시 을지문덕 그 친구의 말이라면 일단 믿고 따른다네. 하하하.”
임유관을 점령한 고구려 군은 수비하던 수나라 군사들을 모두 결박하여 가두고 인근에 거주하던 백성들마저 모두 내몰았다.
“이곳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서둘러라!”
강이식의 명에 곧 임유관은 물론이요.
일대가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주변 정리를 깔끔히 마친 강이식이 그제야 만족해 빙그레 웃으며 온달에게 말하였다.
“이제부터 말 달리세나.”
수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육십만에 달하였으나, 고구려 정벌에 삼십칠만이 동원되어 있었다.
남은 이십삼만은 대륙 곳곳에 산개되어 있었을 뿐더러, 만리장성 인근 성들은 모두 한왕의 행군원수부에 병력을 지원하여, 강이식과 온달에 감히 맞서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 * *
임유관을 점령한 고구려 군이 수비 병력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뒤, 공지열이 군을 이끌고 임유관 앞에 당도하였다.
“아니, 저것은?”
관문은 물론이요.
끝없이 길게 늘어선 성벽 위에는 검은색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는데, 깃발 안에는 하얀색 원 속에 검은색 일색의 까마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까마귀의 다리는 묘하게도 세 개였으니, 펄럭이는 깃발을 올려다보던 수나라 군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사, 삼족오… 삼족오다!”
“고, 고구려 군이… 어느새.”
“임유관이… 임유관이 함락되었다.”
이미, 고구려 군과 몽고, 커레이트 부족 연합군에게 패해 퇴각해 왔기에, 이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거대하고 절망적이었다.
“우리는 고구려 놈들의 계책에 휘말린 거야.”
“어디로 가야 하지? 임유관에 있던 우리 가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군사들의 웅성거림을 공지열도 들을 수 있었으나, 임유관을 되찾기 위해 섣불리 공격 명령을 내릴 수도 없었다.
‘우린 공성 병기가 전무하다. 급히 공격을 강행하다간 피해만 속출할 뿐이다. 어찌하면 좋을고…….’
망설이던 공지열에게 한왕 양양이 보내온 전령이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한왕 전하께선 현재 태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진군 중이시옵니다. 하여,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끈 군대는 공 장군께서 임유관을 단단히 지켜 막으라 하셨나이다.”
전령이 전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공지열이 끝내 장탄식을 하였다.
“이 일을 어찌 할고… 허허, 이를 어찌 할고.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전령도 관문에 펄럭이는 삼족오 기에 시선을 옮기더니, 공지열을 따라 장탄식하였다.
“이를… 이를 어찌 할고…….”
끝없이 길게 늘어선 성벽 위엔 삼족오 기가 바람을 맞아 힘차게 펄럭였으나, 고구려 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한 공지열은 반드시 적의 매복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여 쉽사리 공격 명령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어찌 하면 좋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