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겨울 전쟁 (3)
영주성이 함락되고 태자 양광이 도주 중이란 전황을 접한 탁현 행군원수부에선 대책 회의가 마련되었다.
행군원수부 소속 장수들 뿐만 아니라, 한왕이 초청한 무예 고수들까지 참여한 회의였다.
한왕 휘하 행군원수부에는 세 명의 장수가 가장 출중하였으니, 사람들은 이들을 삼호장이라 불렀다.
이들 삼호장은 장창을 잘 다루며 기병 속공에 능한 선봉장 무석을 필두로, 병법에 능하고 활을 잘 다루어 명궁이라 칭송받는 채휘 그리고 거대한 월도를 휘둘러 적장은 물론 말까지 베는 소장황 등이었다.
한왕이 자리에 앉자, 전황을 채휘가 아뢰었다.
“영주를 불 태운 연태조가 오만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고 있으며, 태자 전하를 삼면에서 에워싼 고구려 군의 수는 요동성 성주 고승이 이끈 삼천 기병을 비롯하여, 대모달 흑비걸의 개마무사 일만과 상장군 주용이 이끈 말갈 기병 이만칠천여 기이옵니다.”
“그래서, 도합 몇이오?”
한왕 양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물었다.
“도합 구만이옵니다.”
“대단치는 않구려.”
한왕의 말에 채휘가 정색을 하고 지도를 가리키며 다시 아뢰었다.
“한왕 전하, 이곳 천추산에서 위충 총관이 절명하였습니다. 위충 총관은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의 뒤를 쫓던 중이었사온데, 북방에서 내려온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이 삼만 기병으로 온달을 도와 위충 총관은 물론이요. 임유관의 공지열 장군마저 공격하였나이다.”
“그럼 이들 떨거지들을 모두 합치면 고구려 군은 도합 몇이오?”
여전히 한왕은 숫자에만 집착하며 산수를 계속 요구하였다.
“강이식의 말갈 기병 삼천과 온달의 개마무사 일천, 궁기병 오천 그리고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 기병 삼만이오니, 모두 삼만 구천으로 고구려 군은 총 십이만 구천 병력이옵니다.”
탁현 행군원수부에 집결한 수의 군사가 삼십만이었기에, 한왕 양양은 여전히 고구려의 군세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말갈이 삼만에다가 북방 떨거지들이 삼만이니, 고구려 군은 실상 육만 구천이로군. 대단치 않아.”
한왕의 중얼거림에 채휘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옵니다. 말갈은 고구려와 한몸 같은 것들로 이들이 신성시하는 장백산을 고구려와 더불어 사용하기에 고구려와 말갈을 별개로 볼 수 없사옵니다.”
“…….”
“또한 북방 몽고와 커레이트 부족은 지난번 북주 잔당과 돌궐 연합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고구려를 도와 싸운 것들로 이번 전쟁에서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선 아니 되옵니다.”
“그래, 알았소. 그래 봐야 우리의 반절도 안 되는 수 아니오?”
한왕의 말을 소장황이 웃으며 거들었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주나후 총관의 수군까지 포함하면 우리의 군세는 도합 삼십칠만이오니, 고구려와 떨거지들의 군세보다 세 배는 많사옵니다.”
“그렇군. 주 총관을 잊고 있었어. 우리가 세 배는 넘는군. 하하하.”
한왕이 만족해 웃었다.
이에 채휘가 바로 이견을 내었다.
“전하, 전쟁은 숫자로만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로 하는 것이지. 우린 그 병사가 세 배나 많고 말이요.”
한왕이 농담처럼 답하니, 채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기에 더해, 소장황이 한왕의 말을 거들며 비위를 맞추었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무릇 전쟁이란 병사의 수가 두 배 많으면 두 배만큼 이롭고, 세 배가 많으면 세 배만큼 이로운 법이옵니다.”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소장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한왕이 흡족해 웃으며 말하였다.
“소 장군은 참으로 그 무용만큼이나 지략 또한 출중하시구려. 내 그대가 있어 이 전쟁을 수월히 치룰 것 같구려. 하하하.”
채휘가 답답함을 억누르며 지도를 가리켰다.
“지금 이곳에, 태자 전하가 사지를 헤매고 계시옵니다.”
“그렇다면, 출정을 서둘러 형님을 구하면 되지 않겠소?”
한왕 양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니, 채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렵사옵니다.”
“어렵다? 어찌 그렇소?”
“곧 겨울이라 대군을 움직일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병력을 보냈다간 오히려 고구려 군에게 수에 밀려 패할 뿐더러 태자 전하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게 되옵니다.”
“형님을 구하긴 해야 할 건데… 쉽지 않다라…….”
한왕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형님 신변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내가 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성공한다면? 공백이 된 태자 자리는 어찌 될 것인가?’
홀로 좋은 상상을 하던 한왕에게 제갈여가 공손히 아뢰었다.
“고구려가 태자 전하를 사로잡을 경우, 반드시 강화를 맺게 될 것이옵니다. 황제 폐하께선 태자 전하를 구하지 않은 한왕 전하께 질책을 하실 것이옵고, 태자 전하 역시 좋은 마음을 품지는 않으시겠지요.”
한왕도 듣고 보니, 제갈여의 말이 옳았다.
“그렇다면 결국 대군을 움직여야겠군.”
한왕의 중얼거림에 채휘가 바로 이견을 내었다.
“곧 겨울이옵고, 만리장성 넘어 북방의 추위는 무척이나 가혹하옵니다. 더구나 아직 운용할 보급 물자가 완비되지 않았기에, 대군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그럼 도대체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구하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한왕이 버럭 소리 지르며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답을 지니지 못한 채휘는 그저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갈여가 허허 웃으며 한왕을 진정시켰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소인 비록 보잘 것 없사오나, 선조이신 제갈공명 이후 가문 대대로 내려온 병법을 익혀 구궁팔궤진을 펼칠 수 있고, 틈틈이 익힌 무예도 크게 낮지 않아 온달을 대적하기 위해 한왕 전하를 모시게 되었나이다.”
장황히 자신을 내세우는 제갈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왕이 불쑥 물었다.
“그렇게 뛰어난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반쯤 빈정대는 투로 물었으나, 제갈여는 불쾌한 기색조차 없이 공손히 답하였다.
“소인의 판단으론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신 뒤, 부족한 물자는 주나후 총관의 수군이 임유관으로 실어 나르면 되옵니다. 그 이후는 임유관의 공 장군이 수송하여 나르면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럴 듯하군. 그래, 원래 봄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나서면 임유관을 거쳐 수송하기로 했었으니, 조금 앞당기면 되는 일이야.”
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더니, 바로 명을 내렸다.
“주 총관에게 명을 전하고, 전군 출병 준비를 하라.”
한왕 양양이 단호히 명하니, 소장황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전하, 소장이 선봉을 맡아 태자 전하를 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소서.”
입 안의 혀처럼 굴던 소장황의 요청이었기에, 한왕 양양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 하라.”
이로써 태자 양광을 구하기 위해 탁현 행군원수부의 대군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다음날, 소장황이 선봉장으로 삼만 기병을 이끌고 출병하였다.
그리고 한왕을 비롯한 행군원수부의 장수들과 무예 고수들도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니 그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 * *
고구려 군이 삼면에서 뒤를 쫓으니, 태자 양광을 지키는 양현감으로선 오직 한 방향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천추산이 나온다. 위충 총관이 아직까지 오지 않는 것은 패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 길은 살 길이 아니다.’
생각을 마친 양현감이 주위를 둘러보며 태자 양광에게 말하였다.
“태자 전하, 들판에 진을 칠 수 없사오니, 저 낮은 구릉 위로 오르겠나이다.”
황야 위에 홀로 선 낮은 구릉을 양광이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도 없고, 물도 없겠지만 고구려 놈들의 야습은 방비할 수 있겠군. 그리 합시다. 저 구릉에서 오늘 밤만 쉬고 갑시다.”
당장 살 길을 찾아야 했으니, 양광으로서도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양광의 말에 양현감이 정색하며 차분히 아뢰었다.
“태자 전하, 우리는 저 구릉에서 오늘 밤만 머무는 것이 아니옵니다.”
“오늘 밤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허면, 내일 날이 밝아도 저 구릉에 머문단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아니, 어찌 그렇소? 저 구릉에 계속 머물면 고구려 놈들이 에워싸고 우리를 압박할 것인데.”
이에 양현감이 답하기도 전에, 양소가 대신 나서 답하였다.
“전하, 위충 총관이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은 필경 패했다는 의미이옵니다. 그렇다면 이 길로 계속 내려가다간, 우리는 사방이 고구려 군에게 에워싸이게 될 것이옵니다.”
그제야 양광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한왕이 원군을 보내길 기다리겠다는 게요?”
“그렇사옵니다.”
양소의 대답에 양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차피 패해 갈 곳 없는 몸. 저곳에 정착하도록 합시다. 마침 양현감이 물자를 잔뜩 꾸리고 다니던 터라 부족할 것이 뭐가 있겠소? 하하하.”
양광이 호탕하게 결정을 내리자, 양현감이 서둘러 명하여 구릉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구릉에 오른 양현감은 이내 곧 군사들에게 명하여 수레를 뜯어 어설프게라도 목책을 세우고 태자 양광이 쉴 막사도 세웠다.
다행스럽게도 보급 물자는 넉넉하여 버티기에 부족함은 없었으나, 문제는 추위였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뗄감으로 사용할 나무가 구릉 위엔 전무했던 것이다.
결국, 추위가 닥치면 목책으로 세운 나무를 다시 뜯어 장작으로 사용해야 할 형편이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열흘 내로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우린 저 목책을 뜯어야 할 것이다.’
목책을 세우는 군사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양현감의 얼굴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
광야에 우뚝 선 구릉 위는 무척이나 바람이 강했다.
그러나, 아래를 굽어살필 수 있어 기병 공격을 방비하기 수월해 나름 장단점도 있었다.
이때, 양광이 다가와 양현감의 어개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양현감, 걱정 마시게. 양이는 곧 올 게야.”
“한왕 전하께서 태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시리라 소신도 믿사옵니다.”
‘내가 사로잡히면 양이도 좋을 게 하나 없으니, 곧 올 것이야. 문제는 이후 내가 황제 폐하의 진노를 사고, 나를 구한 양이가 고구려를 정벌해 공이라도 세운다면 태자 자리는 양이 몫이 되겠지. 정말, 좋을 것 하나 없구나.’
태자 양광이 이렇듯 씁쓸히 생각을 정리하며 구릉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광야에 고구려 군이 밝힌 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저렇게도 많은데, 밀고 들어오지 않으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군.”
양광의 중얼거림에 양소가 답하였다.
“태자 전하는 한왕 전하를 잡기 위한 미끼이옵니다. 저들은 한왕 전하가 대군을 이끌고 나올 때까지 결코 이 구릉을 올라오지 않을 것이옵니다.”
“음… 그렇다면 고구려 놈들은 양이를 대적할 방비가 마련되었다는 것인데… 전령을 보내 출병하지 말라 해야 하는가?”
태자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고개를 저었다.
“태자 전하, 이 전쟁… 이기든 지든. 전하는 폐위되실 것이옵니다. 하여, 이제부터 황위에 오를 길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황제 양견이 아직 건재한데도 불구하고 양소가 벌써 황위를 언급하였다.
그러나, 양광은 전혀 놀라지도 당혹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그렇군. 내 살 길이 황위에 오르는 길이로군. 살 길이 안 보여 마음이 무척이나 답답하였는데, 군사가 내 답답함을 뚫어 주셨소. 하하하.”
양광이 호탕하게 웃으니, 목책을 세우던 군사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양광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들판에 빛나는 고구려 진영을 내려다보며 당당히 소리쳤다.
“곧 대군이 올 것이니, 방비들 잘 하여 실수가 없도록 하거라!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