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겨울 전쟁 (2)
영주성을 불 태운 연태조가 오만의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남으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영주성 공략을 위해 마련한 공성 병기들까지 모두 끌고 가니 진군 속도는 느렸다.
그러나, 이들의 앞을 막을 수나라 군사들은 요서에 전무한 상항이었기에, 목적한 임유관까지 거침은 없을 것이다.
막리지 연태조는 진군을 시작하며 요동성에 전령을 보내 출사표를 올렸다.
이에 고구려의 요동성 전시 조정은 또 한 번 전쟁의 당위성을 놓고 들끓었다.
“폐하, 수의 태자 양광만 사로 잡아 강화를 맺으면 될 일을 막리지가 일을 크게 벌리고 있나이다. 당장 막리지 연태조를 불러들여 전쟁을 막으셔야 하옵니다.”
태대사자 사선종유가 지나치게 큰 소리로 아뢰니, 태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이에, 을지문덕이 앞으로 나서며 침착히 아뢰었다.
“전장에 나선 장수는 함부로 불러들이지 않는 법. 폐하, 승전을 치하하여야 마땅한 막리지를 문책하기 위해 이곳으로 불러들임은 군의 사기에도 바람직하지 않사옵니다.”
태왕은 흡족해 고개를 끄덕이었으나, 종리위두대형 북장원이 오만하게 을지문덕에게 호통을 쳤다.
“닥치시오!”
을지문덕은 요동성 서부총관부의 수장으로 종리위두대형이 함부로 호통치며 꾸짖기 어려운 직책에 있었다.
더구나 전시 조정이 요동성에 세워진 이상, 서부총관부의 위세가 낮지 않았으니, 북장원의 이 호통은 무척 지나친 행동이었다.
을지문덕이 물끄러미 북장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종리위두대형께선 제 말 어디가 불편하셨나이까?”
“닥치라한 말 못 들었소? 귀가 먹은 게요? 무례한 게요?”
태왕의 앞에서 여전히 호통을 치는 북장원의 행동이 오히려 무엄하게 느껴진 여러 신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북장원은 그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은 채 태왕의 앞으로 걸어 나와 짧게 고개만 숙여 예를 올리고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폐하, 막리지는 영주성의 동문만 포위하였고, 남문과 북문, 서문은 막지 않았다 하옵니다. 하여!”
“하여?”
태왕이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북장원이 말을 이었다.
“막리지 연태조의 아들은 개소문이라 하옵고, 아호를 개금이라 하온데. 개소문이는 스스로를 갓쉰동이라고도 부르옵니다.”
“국장.”
태왕이 북장원을 짧게 부르며 말을 끊었다.
“예, 폐하.”
“국장, 이 상황에 내가 막리지 아들의 아호까지 알아야겠소?”
태왕이 미소를 띠며 좋은 말로 물으나 북장원은 표정을 굳힌 채 바로 답하였다.
“아셔야 하옵니다.”
“알아야 한다?”
“그렇사옵니다.”
북장원이 단호히 답하니, 태왕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좋소. 들어봅시다.”
“전시 조정이 이 요동성에 세워지기 전, 수의 태자 양광이 요서 일대를 시찰한 일이 있었사옵니다.”
“계속하시오.”
“태자의 시찰 행렬을 급습한 이들이 있었사온데, 그 우두머리가 하북의 검술명가 팽가장의 장자라 하옵니다.”
태왕과 을지문덕은 북장원이 아뢰고자 하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어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북장원도 두 사람의 짧은 시선 교환을 느끼며 입꼬리를 실룩였다.
“팽가장의 장주가 어찌 수의 태자를 급습한 게요?”
태왕이 모른척 물으니, 북장원이 눈을 치켜 뜨고 답하였다.
“탁현 행군원수부 한왕의 수하들이 팽가장을 불 태우며 장주 팽무성의 목을 베었나이다. 팽무성의 형 팽무일은 태자를 암습하여 팽가장과 동생의 원한을 풀려던 것이겠지요.”
“한왕의 수하들이 하북의 검술명가인 팽가장을 왜 도륙낸 게요?”
“폐하, 그것은 온달의 수하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큰 전쟁을 앞둔 한왕이 적과 내통한 혐의로 팽가장을 멸한 것이지요.”
“온달의 수하?”
“그렇사옵니다 폐하. 팽무성은 낙랑 사냥 대회 때도 온달을 도왔던 인물이었기에, 우리 입장에선 온달의 수하가 그곳에 있던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나, 한왕의 입장에선 적국의 장수와 친분을 쌓은 팽무성을 간자로 볼 수 있는 일이었지요.”
“헌데 국장은 이 일을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지금 우리가 논하는 일과 하등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태왕이 북장원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말하였으나, 무엄하게도 북장원이 태왕의 말을 끊었다.
“관련이 있사옵니다.”
“있다?”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 보시오.”
태왕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허락하니, 북장원이 을지문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팽무일의 급습은 성공하여 태자 양광이 그의 손에 잡히려던 그 순간! 그를 구한 이가 있사옵니다.”
북장원의 말에 신료들과 장수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태왕은 연태조를 탄핵하려는 북장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신료들과 장수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북장원에게 물었다.
“태자를 구한 이가 있다라… 그게 누구요?”
“막리지 연태조의 아들 개소문이옵니다.”
태자 양광을 구한 이가 언급되자, 모두가 놀랐으나 태왕은 여전히 불쾌한 기색만 내비칠 뿐 동요하지 않았다.
“국장, 연태조의 아들이라 하였소?”
“그렇사옵니다. 태자 양광을 구한 이가 스스로를 갓쉰동이라 하였사옵니다.”
자신있게 답하는 북장원의 기세에 태왕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국장. 장인께서 뭔가를 착각하신 모양이구려.”
“폐하?”
“연태조의 아들 개소문이는 올해 열 살이오. 그 어리디 어린, 조그만 아이가 어찌 검술명가의 장자 팽무일에게서 태자를 구한단 말이오? 허허허.”
태왕이 열 살에 힘주어 말하니, 여러 신료들과 장수들이 태왕을 따라 허허 웃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개소문이는 비록 열 살 아이지만, 그 기골이 장정 못지 않아 열 대여섯 이상으로 보이며, 무예 또한 출중하다 알려졌사옵니다.”
북장원이 단호히 답하자, 태왕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허면, 국장은 개소문이가 태자를 구한 일로 전장에 나선 막리지를 벌하자 말하고 싶은 게요?”
노기를 띤 태왕의 음성에도 북장원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소리 높여 말하였다.
“아들의 죄를 아비에게 물음은 어려운 일이지요. 하오나, 아비가 시켜 아들이 죄를 지었다면 이는 당연히 부자를 벌함이 마땅하다 사료되옵니다.”
“아비가 시켜 아들이 죄를 지었다라?”
태왕이 의아해 물으니, 북장원이 바로 답하였다.
“막리지 연태조는 이미 수와 내통하였고, 그의 아들이 태자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그렇기에, 이번 영주 공략에도 태자 양광을 살리기 위해 막리지가 동문만 공격한 것이옵니다. 하여 태자 양광은 도주할 수 있었사옵니다.”
북장원이 수의 태자 양광의 도주를 막리지 연태조에게 씌우니, 태왕과 을지문덕이 당황하였다.
이렇게까지 엮을 줄은 태왕과 을지문덕도 에상하지 못했다.
을지문덕이 술렁이기 시작한 신료들과 장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당치 않사옵니다!”
을지문덕의 단호한 태도에 북장원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뭐가 당치 않다는 게요? 총관은 뭐 좀 더 아는 것이 있소?”
비웃듯 묻는 북장원에게 을지문덕이 한 발 다가서며 답하였다.
“종리위두대형께선 증자가 있어 막리지가 수의 태자와 내통했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막리지는 군을 이끌고 영주성을 공략한 일등공신이온데, 어찌 내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주성을 점령한 연태조의 공을 언급하니, 북장원이 피식 웃었다.
“그가! 군을 이끌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군을 이끌어 영주를 점령했을 게요! 그리되었다면! 수의 태자는 사로잡혔을 것이오! 막리지는 수의 태자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군을 이끌고 나가 퇴로를 만들어 준 것이오! 총명한 을지문덕 그대가 이것을 어찌 모르오?”
북장원의 논리에 동요된 신료들과 장수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을지문덕! 을파소의 후예 을지문덕! 그대는 우리 고구려를 배신한 연태조의 편이오?”
북장원이 을지문덕에게 바짝 다가서며 큰 소리로 물었다.
“수의 태자만 사로 잡으면 강화로 끝날 일을 연태조 그자는 겨울 전쟁을 강행하며 남으로 대군을 이끌고 진군을 시작하였소. 만일! 곧 다가올 추위에 우리 군사들이 피해를 입고!”
바짝 얼굴을 들이민 북장원의 숨결이 을지문덕의 얼굴에 닿았다.
북장원은 더욱 목소리 높여 을지문덕을 압박하였다.
“봄이 되어 수가 대군을 몰아 우리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그때는 수의 대군을 막을 군사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오! 향후 벌어질 모든 참극은 연 씨 부자가 수의 태자를 놓아 준 것이 단초요.”
을지문덕에게 바짝 붙었던 북장원이 고개 돌려 태왕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태왕 폐하, 강화를 맺지 못하도록 태자 양광을 풀어준 막리지 연태조를 당장 불러들여 문책하셔야 하옵니다. 전쟁은 군사들 뿐만 아니라 만백성들 모두 피해를 입는 최후이 수단이옵니다. 즉시 군을 물리게 하고, 수의 행군원수부로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맺으소서.”
“국장!”
다그치듯 요청하는 북장원을 꾸짖기 위해 태왕이 입을 열었으나, 을지문덕이 가만히 고개를 저어 태왕의 말을 끊었다.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문 태왕에게 북장원이 물었다.
“하명하소서.”
“아니 되었소. 오전 회의는 이만 중단하고, 오후에 다시 하도록 합시다. 이만 물러들 가시오.”
태왕이 짧게 명하니, 모두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후 물러났다.
을지문덕과 단공만이 남으니, 태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연태조가 오해를 많이 받더니, 이젠 수와 내통한다는 의심까지 받는구려. 수의 태자를 놓아준 일은 그와 우리가 함께 꾸민 일이라 말함이 옳지 않겠소?”
태왕의 물음에 을지문덕이 단호히 답하였다.
“아니 되옵니다. 강화를 맺지 않기 위해, 폐하께서 수의 태자를 놓아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허나, 종리위두대형의 말에 동요하는 신료들과 장수들이 상당하였소. 이대로 가면 막리지를 탄핵하자는 의견이 빗발치게 될 것이오.”
“폐하, 막리지 연태조를 탄핵할지언정, 강화를 맺지 않기 위해 수의 태자를 놓아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북장원도 이미 알고 있으나, 태왕 페하까지 죄를 물을 수 없기에 막리지에게 죄를 씌우는 것이옵니다.”
“허면, 아무 잘못 없는 막리지가 죄를 덮어써야 한단 말이오?”
태왕의 물음에 을지문덕은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만 있다면, 막리지가 누명을 써야겠지요.”
이에, 태왕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태왕이 입을 열었다.
“총관…….”
“하명하소서.”
“막리지에게 내 마음이 아프다 전하시구려.”
“명을 받사옵니다.”
* * *
한 식경 뒤, 다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장원이 걸음을 옮겼다.
이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명림신이 급히 달려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주 총관에게 사람을 보내 곧 막리지를 탄핵하고 수에 사신을 보낼 것이니, 군을 움직이지 말라 전하면 되겠나이까?”
북장원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되네.”
이에 명림신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리위두대형께선 주나후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반대 세력을 정리해 주는 것을 원치 않사옵니까?”
“나를 반대하는 것들과, 내 앞길을 막는 것들을 주나후가 쓸어 주고 우리 북 씨 일족이 대대손손 번영하길 바라네.”
“…….”
“허나 권세와 부귀도 나라가 있어야 유지하는 법. 주나후의 손을 빌리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네.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다면 그의 힘은 필요 없다네. 자넨 나와 생각이 다른가?”
“소인도 전쟁을 막고 우리 고구려를 천 년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종리위두대형을 따르는 것이옵니다.”
흡족한 북장원이 명림신의 등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허면, 애쓰시게. 우린 고구려의 충신이란 것. 잊지 마시게.”
필요하더면 수의 군사를 평양성 내에 들일 모의까지 하던 북장원이 스스로를 충신이라 말하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명림신은 고개 숙여 답하면서도 내심 북장원을 비웃었다.
‘사욕으로 가득한 늙은이. 허나, 큰 전쟁을 막아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선 이용 가치가 있다.’
이때, 앞장서던 북장원이 발을 멈추고는 명림신에게 바짝 붙어 나지막이 명하였다.
“강화를 맺어도 봄이 오면, 주나후 총관은 바다를 건너와 평양성을 압박하는 게 좋겠어. 눈엣가시 같은 건무는 없는 게 좋거든.”
“고건무만 취하라 전하면 되겠나이까?”
“그래. 수의 태자가 쫓겨 갔으니, 우리 고구려의 태자인 고건무의 목을 주 총관이 취해 수의 황제 양견에게 바치면, 강화는 유지되어 더는 전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