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61화 (161/328)

161화 겨울 전쟁 (1)

태자 양광은 밤을 새워 도주를 하고 있었다.

일찍 내리기 시작한 찬 서리는 성큼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일찍 찾아온 추위에 말을 달려 도주하는 태자 양광의 마음은 얼굴만큼이나 얼어붙고 있었다.

“군사, 이제 그만 쉽시다.”

고승의 삼천 기병이 횃불을 밝힌 채 바짝 좇고 있음에도 양광은 처연히 말하였다.

“태자 전하, 지금 말을 멈추면 적들에게 사로잡히옵니다.”

“이대로 도망친들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 영주를 빼앗긴 나를 용서하실 리 없을 터이니, 세상 어디인들 내가 있을 곳은 없구려.”

“저, 전하.”

“군사의 말을 들어 양이에게 원군을 청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려. 그대는 훌륭히 나를 보좌하였으니, 결코 자책하지 마시오.”

불길한 말에 양소가 놀라 말을 더듬었다.

“태, 태자… 전하, 어, 어찌? 그런 말씀을?”

“걱정 마시구려. 적에게 사로잡히는 흉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터이니, 나는 이만 말을 쉬게 하겠소. 그대는 부디, 내 아우 양이를 도와 고구려를 정벌하시구려.”

죽음으로 패전 책임을 지려는 태자 양광에게 양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양광의 말고삐를 꽉 쥔 채 자신의 말잔등을 박찼다.

“군사, 놓으시오.”

백발이 성성한 노인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악력이 강하여 양광으로선 도저히 양소가 쥔 말고삐를 빼낼 수가 없었다.

“태자 전하, 적들의 추격으로 바쁘오니 결례를 용서하소서.”

마치 어린아이 달래듯 말한 양소가 태자 양광의 말잔등마저 발로 걷어차 속도를 가하였다.

고작 십여 기의 호위만 받은 채 도주 중인 양광의 뒤로 고구려 군의 말발굽 소리가 더욱 크게 울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태자!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오? 저녁은 자셨소? 아직 드시지 않았으면, 내가 밥 한 그릇 올리겠소이다!”

고승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태자, 날이 춥소! 우리 잠시 불이나 쬐고 다시 달립시다!”

고승의 조롱이 점점 더 크게 울리는 것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바로 등 뒤까지 추격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젠 태자 양광이 말을 멈춰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해도 고구려 군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먼저일 듯했다.

양소가 여전히 양광의 말고삐를 쥔 채 엄히 말하였다.

“태자 전하, 고개를 돌리지 마시옵소서. 우리는 반드시 돌아갈 수 있나이다.”

양광이 혹여 약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말하고는 따르는 군사들에게도 소리쳐 명하였다.

“속도를 더 하여라! 영주를 빼앗겼다 하여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속도를 더 하여라!”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고, 쉬지 않고 달린 말들의 입에 거픔이 고여 갔다.

‘말이 버티지 못하기 전에 한 발이라도 더 내려가야 한다.’

양소는 이제 곧 말들이 쓰러질 것이라 판단하여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져 갔다.

그때, 아침 해를 맞으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 군사지? 설마 고구려 군이 이곳까지 내려왔단 말인가?’

양소가 덜컥 겁에 질려 급히 말 머리를 돌리려 할 때, 태자 양광이 기뻐 소리쳤다.

“군사! 양현감이오! 양현감이 왔소!”

양소가 급히 시선을 옮기니,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아들 양현감이 한 무리의 군사 선두에 서서 달려오고 있었다.

“태자 전하! 소신 양현감이옵니다!”

양현감도 태자 양광을 알아보고 소리치더니, 고승의 고구려 기병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엄히 명하였다.

“속히 태자 전하를 모시고, 진을 펼쳐라! 적의 수가 많다. 방진을 펼쳐라!”

기병의 돌진을 방비하기 위한 방진이 펼쳐지며, 그 속으로 태자 양광 일행이 말을 재촉해 급히 들어갔다.

태자의 안전을 확보한 양현감이 이어 명을 내렸다.

“살을 날려 접근을 막아라!”

수의 방진 속에서 화살이 날아드니, 뒤쫓던 고구려 군이 급히 말 머리를 돌려 피하였다.

고승은 태자 양광을 품은 방진이 제법 단단하다 여겨 서둘러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벌리라 명하였다.

“거리를 벌려라. 적의 진이 단단하다. 사거리 밖으로 거리를 벌려 뒤를 쫓는다.”

기병 한 기는 보명 여덟을 대적하는 법.

그러나, 고승은 어찌된 영문인지 삼천 기병을 지니고도 양현감의 일만 보병을 성급히 공격하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고구려 기병이 거리를 두고 물러나자, 양현감이 겨우 한숨을 내쉬며 명하였다.

“놈들이 다시 추격해 올 것이니, 방진을 유지한 채 행군한다. 이동하라!”

양현감은 고구려 군이 결코 태자를 쉽사리 놓아줄 리 없다 생각하며 엄히 명을 내리고는 바로 양광을 향해 달려갔다.

방진 속 수레 위에 올라 숨을 고르는 양광의 앞에 양현감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태자 전하, 위충 총관께서 곧 군을 이끌고 오실 터이오니 안심하시옵소서.”

위충은 이미 세상을 하직하였으나, 아직 이를 모르는 양현감이 태자 양광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양소는 위충이 회군하지 않은 것에 크게 노하여 물었다.

“어찌 총관은 함께 오지 않은 것이냐?”

“고구려의 대장군을 사로잡기 직전인지라, 소장이 먼저 왔습니다. 위충 총관께선 강이식을 사로잡아 오실 것이옵니다.”

양현감이 위충을 두둔하였으나, 양소의 노기는 풀리지 않았다.

“태자 전하, 명을 어긴 위충의 죄는 군법으로 다스려야 하옵니다.”

태자 양광이 아무 말도 답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서쪽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것들은 무엇이냐?”

양소가 놀라 물으니, 양현감이 급히 군사를 불러 알아보라 명하였다.

그러나 알아볼 것도 없이 질풍처럼 내달려온 기병들의 검은색 깃발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이 셋… 달린 까마귀? 어찌 저것들이 이곳에?”

삼족오 깃발을 알아본 양소가 장탄식을 하였다.

양현감도 삼족오 깃발을 알아보고는 급히 명하였다.

“저자는 흑비걸? 고구려의 선봉 개마무사다! 놈들의 돌파를 방비하라! 결코 돌파 당해선 안 된다!”

침착한 양현감은 개마무사 선두의 장수가 영주성 공략에 선봉을 섰던 흑비걸임을 한눈에 알아채고 방어에 집중하였다.

개마무사의 질풍 같은 돌파는 적진이 흐트러질 때까지 반복되며, 마침내 진영이 흐트러진 적은 철갑을 두른 개마무사들의 사냥감으로 변하였다.

양현감은 개마무사와 전투를 벌인 경험은 전무했지만, 고구려 철기병의 전술은 이미 전해 듣고 있었기에 극히 경계하였다.

“방패와 극을 단단히 세우고 이동한다. 결코 방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북쪽에선 고승의 삼천 기병이 쫓아오고, 서쪽에선 흑비걸의 개마무사 일만 기가 추격해 오니, 오직 살 길은 남과 동쪽 길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개마무사를 이끄는 흑비걸도 방진을 꺼리는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거리를 벌린 채 쫓아오기만 하였다.

“저들은 패하여 흩어지지 않았더냐? 어찌 군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태자 양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양소가 냉정히 답하였다.

“태자 전하, 저들이 우리를 속인 것이옵니다. 패한 척 꾸며 위충 총관을 영주에서 멀리 떼어 놓은 것이옵니다. 아마도… 위충 총관은 태자 전하를 모시기 위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위충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양소의 말에 태자 양광이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남쪽 방면에서 한 무리의 기병이 몰려오기 시작하는데, 아침 햇살에 검은색 삼족오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상장군 주용이 이끄는 말갈 기병 이만칠천여 기였다.

“저들은 처음부터 영주를 공략하지 않고 이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옵니다.”

양소가 이를 갈며 말하니, 태자 양광도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놈들은 내가 도주할 것을 알고 있었구나. 고작 영주가 목적이 아니었어. 수의 태자, 나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야.”

* * *

영주성에 진입한 막리지 연태조는 바로 장수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이 영주성이 수의 전초기지가 되지 못하도록 불태우고, 임유관으로 향할 것이오.”

예상치 못한 말에 장수들이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회의장이 술렁이고 상장군 대건상이 대표로 나서 물었다.

“합하, 이곳을 불태우고 임유관으로 향하신다니요. 임유관으로 향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군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향해 무엇을 하겠소? 당연히 임유관을 공략하지 다른 뭐가 있겠소?”

연태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니, 대건상이 크게 소리쳐 반발하였다.

“터무니없는 소리! 어찌 소국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단 말이오? 고승 성주가 삼천 기병을 이끌고 양광의 뒤를 쫓고 있으니, 수의 태자만 사로잡는다면 강화가 이루어질 것인데, 막리지는 어찌 전쟁을 이어 가려 하시는 게요!”

군권을 지닌 막리지 연태조에게 흰 눈을 번뜩이며 대건상이 언성을 높였으나, 회의장 내 장수들 중 누구도 그를 제지하는 이 하나 없었다.

아마도 필경, 요동성 전시 조정으로 돌아간 을지문덕 역시 지금 연태조가 겪는 일을 그대로 겪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회의장 내 모든 장수들이 반발하고 있음에도 연태조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차분하였다.

“수의 태자를 사로잡으면 전쟁이 끝날 것 같소? 장군들은 모두 그리 생각들 하시오?”

연태조의 물음에 대건상이 바로 답하였다.

“당연하지 않소! 수의 황제 양견은 태자를 구하기 위해 강화를 맺을 것이오. 우리는 강화 조건으로 이 영주성을 취하고 평화를 얻으면 되오! 이것은 세 살 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 합하만 전쟁을 고집하는 게요!”

대건상은 연태조를 마치 겁박하듯 주먹마저 불끈 쥐고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태자를 사로잡지 않을 것이오.”

연태조가 짧게 말하니, 회의장 내 모든 장수들이 더욱 놀라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막리지는 무엇을 꾸미는 것이오? 태자를 사로잡지 않는다니 이 무슨 이적 행위란 말이요!”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연태조는 여전히 표정에 동요가 없었다.

“상장군의 주장처럼, 우리가 양광을 사로잡으면 양견은 강화를 맺을 게요.”

연태조의 말에 대건상이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왜!”

“그 강화가 언제까지 유효할 거라 생각하시오?”

연태조의 물음에 대건상이 당황하였다.

“당연히 강화니… 그게…….”

“상장군, 태자를 사로잡고 우리가 이 영주를 차지한들, 양견에겐 탁현의 삼십만 대군과 주나후의 수군 칠만이 그대로 남아 있소. 양견은 결코 기껏 모아 놓은 군을 물리지 않을 것이오. 강화는 봄이 오면 깨지고, 전쟁은 그들에게 유리한 시기에 다시 시작될 것이오.”

연태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세워진 지도를 가리켰다.

“이곳은 거란의 세력권이라 수의 군세는 미약하지만, 이 탁현은 다르오. 탁현의 삼십만 대군이 봄에 움직인다면, 상장군은 이 영주성을 지킬 수 있겠소?”

연태조의 물음에 대건상이 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연태조가 탁현과 영주 사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들의 시간에 전쟁이 일어나선 아니 되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전쟁을 치룰 것이오.”

“그것이 수의 태자를 사로잡지 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건상이 묻자, 연태조가 짧게 답하였다.

“태자를 쫓으면, 구하기 위해 탁현의 군이 움직일 것이오.”

“허면, 막리지는 태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인 군을 우리가 요격하기 위해 임유관으로 진격한다는 게요?”

대건상의 물음에 연태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임유관과 탁현 행군원수부와는 상당한 거리인데, 임유관에서 어찌 행군원수부의 군을 대적하겠소.”

“허면, 우리는 왜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게요?”

대건상이 따지듯 물으니 연태조가 지도를 가리켰다.

“행군원수부의 진격로는 임유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영주로 향하게 되어 있소. 수의 태자 양견을 구하기 위해 출병하더라도 임유관은 거치지 않고 말이요. 허나.”

“허나 무엇이오?”

연태조가 바다와 인접한 임유관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임유관은 수의 대군에게 보낼 군량미가 지나는 길목이라오. 우리는 이곳을 공략하여 행군원수부의 대군이 이 요서 땅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도록 할 것이오.”

“허면, 누가 수의 행군원수부와 맞선단 말이오? 혹, 혹여?”

연태조에게 묻던 대건상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렇소. 대장군 강이식이 수의 삼십만 대군과 맞서, 이 요서 땅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게 할 것이오.”

연태조가 단호히 답하니, 대건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대장군은 패하여 도주하지 않았소. 한데 어찌?”

“대장군은 패하지 않았소이다.”

연태조의 말에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합하께선 우리 장수들을 속이셨군요.”

모달 여범이 눈살을 찌푸리며 연태조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연태조는 이 역시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였다.

“속인 것이 아니오. 말하지 않은 것이오.”

“말하지 않은 것이 속인 것과 무엇이 다르오!”

대건상이 격분해 소리치니, 연태조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고구려를 소국이라 낮추고 수를 대국이라 높여 부르는 그대들에게 어찌 모든 것을 미리 말할 수 있었겠소?”

연태조의 말에 대건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막리지는 믿지도 못할 장수와 어찌 전장에 함께 나가려 하나이까?”

대건상의 물음에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연태조가 부드럽게 대건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비록 수를 대국이라 부른들, 그대들 역시 우리 대고구려의 승리를 간절히 갈망하는 장수라 여기기에 이제라도 임유관 공략을 함께 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는 게요. 부디, 힘을 보태 주시오. 고구려는 승리할 수 있소이다. 강화는 잊어주시오.”

막리지 연태조가 고개마저 숙이며 말하니, 회의장 내 모든 장수들이 따라 머리를 숙여 명을 받았다.

“합하, 소장 상장군 대건상 우리 대고구려를 소국이라 낮추고 수를 대국이라 칭한 죄, 임유관 공략으로 덜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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