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6)
공지열의 명에 중장보병이 급히 진열을 정비하고 극을 땅에 박다시피 댄 장창병들이 단단히 준비하였다.
두두두두.
그러나 어둠 속에서 굉음을 일으키며 내달려오는 고구려의 철기병들은 긴 삭을 일자로 뻗어 극을 쥔 장창병을 찌르고, 그 앞에서 지키던 중장보병을 말발굽으로 짓밟았다.
또다시 개마무사들의 돌파가 시작되었고, 궁수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놈들의 뒤를 쳐라!”
공지열이 급히 기병에게 명을 내렸으나, 이들은 이미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흩어져 있었다.
“속히 재정비하고 고구려 개마무사의 뒤를 쳐라!”
공지열이 재차 명을 내리니 장수들이 기병을 몰아 어둠 속으로 사라진 개마무사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동서남북 사방에서 뿔 나팔이 울리며 이들 기병을 향해 화살이 어둠 속에서 날아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땅울림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개마무사들이 말을 돌려 재차 돌파를 시작한 것이다.
“진열을 가다듬고, 군을 물린다. 불을 밝혀라!”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판단한 공지열이 명하니, 곳곳에서 불이 밝혀지며 전황을 살필 수 있었다.
돌파를 강행하던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은 수의 진영에 불이 밝혀지자,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불을 목표로 화살들이 쏟아져 들었다.
“방패로 막아라! 불을 밝힌 채 퇴각한다. 진열을 지키고 이탈하지 마라!”
날아드는 화살에 피해가 속출했지만, 공지열은 개마무사들의 공격이 두려워 불을 밝힌 채 퇴각을 명하였다.
어둠을 뚫고 날아든 화살에 의한 사상자는 늘었으나, 개마무사들의 공격이 멈춘 덕에 퇴각은 진행할 수 있었다.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들의 진열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방에서 뿔 나팔이 울리며 화살이 날아들었지만, 공지열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단속한 덕에 동녘이 터올 때까지 진을 유지한 채 물러날 수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긴 뿔 나팔이 울리고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 갔다.
공지열은 적이 물러갔다 판단하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진열을 유지해라! 이대로 멈추지 않고 물러난다. 놈들과 거리를 벌려 군을 정비한 후 총관을 구하러 간다.”
공지열의 외침이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개마무사 일천 기를 이끈 우랑이 카사르와 호타크가 이끄는 전사들과 합류하고 있었다.
“카사르 대족장, 우린 일단 올루스로 돌아갑시다.”
우랑의 말에 카사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카사르와 호타크는 온달과 함께 수와 거란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올루스의 일부만 이끌고 북에서 내려왔다.
이들은 요서에 이르러서는 올루스를 더욱 잘게 나누어 사방으로 흩어져 눈을 피하고는 이 천추산 앞에서 올루스를 재집결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올루스 속엔 평강이 남아 있었으니, 우랑은 그녀를 염려해 일단 군을 물린 것이다.
“쇼락이 그대들의 공주를 목숨을 바쳐 지키고 있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카사르가 우랑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안심시켰다.
우랑도 쇼락의 충직함은 믿으나, 수의 영토인 요서에 들어온 이상 경계를 늦출 수는 없었다.
“쇼락을 믿으나, 전황은 늘 변하는 법이기에…….”
우랑의 말에 카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행군 속도를 높이라 명하였다.
“서두르라! 올루스로 돌아간다!”
* * *
천추산에도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불길은 여전하였고, 수나라 군사들은 화염을 피해 연기 속을 헤매며 산길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아래로 향하는 산길은 고구려의 위장군 온달이 거대한 검을 땅에 박아 세우고는 우뚝 서 있는데, 수나라 진영에선 이를 뚫을 장수도 군사도 전무했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검과 대군을 앞에 두고도 당당한 온달의 앞엔 이미 요서총관부의 맹장들이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는 막바우와 경우가 군을 이끌고 단숨에 몰아쳐 돌격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장군, 이제 돌진 들어갈까요?”
막바우가 좀이 쑤시는 듯 묻자, 온달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닐세. 형님이 공을 세우시도록 우린 이곳에서 놈들을 천천히 압박하세.”
온달이 공을 강이식에게 넘기겠다고 하니, 경우가 발끈해 이견을 내었다.
“안 올라왔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올라왔는데 왜 늦추십니까? 아니, 그리고 어찌 전장에서 마음 편히 공을 양보할 수 있답니까? 그렇게 여유를 부리다간, 오히려 적에게 역습당하는 법이오니, 당장 공격해야 합니다.”
온달은 경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 생각하였지만, 여전히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이렇게 대치하세.”
온달의 뒤에선 궁수들이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살을 날려 접근을 막았기에, 위충의 군사들은 꼼짝 없이 산길에 갇힌 신세였다.
산 중턱에서 돌격을 강행한 강이식의 말갈 기병들은 벌써 수나라 군의 진열 끝을 전멸시켰고, 곧 위충의 목을 노려 달려들 기세였다.
“총관! 앞은 온달이요. 뒤는 강이식이옵니다. 산길을 벗어나 도망쳐야 하옵니다.”
공손향이 겁에 질려 말하였다.
이미 포위를 뚫기 위해 온달에게 달려들었던 장수들이 모두 죽음으로 더는 명을 받을 장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위충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이 산을 헤매면 살 수는 있는 게요?”
위충의 물음에 공손향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겪어 본 일이옵니다. 서두르소서.”
이에 위충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공녀, 그대는 살아 어디로 가시겠소?”
“영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태자가 회군을 명하였었고, 영주도 위험하다니, 구해야하지 않습니까?”
공손향이 위충의 체면을 살려 말하였다.
“하하하. 이렇게 패주해서야 어찌 태자 전하를 도울 수나 있겠소?”
“총관…….”
위충이 손을 저어 공손향의 말을 끊고는 부장을 불렀다.
“나는 다시 위를 칠 것이니, 너는 그 사이 아래의 온달을 쳐라.”
위충이 군을 반으로 나누어 결전을 강행하기로 명하였다.
그리고는 시선을 야수에게로 옮겼다.
“그대는 공녀님을 모시고, 영주성으로 돌아가 태자 전하를 돕게. 그대의 무용은 반듯이 우리 수나라를 위해 쓰일 것이니, 부디 영주성으로 가 주시게.”
명이 아닌 부탁에 야수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흡족한 듯 위충이 환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고구려 대장군의 목을 취하러 간다! 나를 따르라!”
위충의 명에 반으로 나뉜 수나라 군사들이 위와 아래로 돌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야수는 힘겹게 지니고 다녔던 강이식의 낭아봉을 땅에 박아 세우고는 공손향을 바라보았다.
“가. 가시죠.”
* * *
수나라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오니, 온달은 땅에 박아 세웠던 운철대검을 뽑아 들고는 소리쳤다.
“산을 오른다!”
온달의 명에 막바우가 창을 쥐고 힘차게 내달렸다.
경우도 공을 세우게 되어 크게 기뻐하며 궁수들에게 일제 사격을 명하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온달의 뒤를 따랐다.
선두에 선 온달과 막바우의 머리 위로 화살이 빗발치듯 날며 달려드는 수나라 군사들에게 쏟아졌다.
온달은 화살비 속에 살아남은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운철대검으로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치며 휘둘렀다.
땅이 파이고 광풍이 일며 검기에 수나라 군사들이 비명과 함께 널브러졌다.
막바우 역시 온달을 지키며 쉴 새 없이 창을 휘두르니, 이 두 사내가 나아가는 길엔 오직 시신만이 쌓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바짝 쫓으며 경우도 연신 화살을 날리니, 감히 온달과 막바우 근처에 서 있는 이 하나 남지 않았다.
* * *
“대장군, 놈들이 돌아옵니다.”
도망치기 바빴던 수나라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다시 산을 오르자, 공별이 의아해 소리쳤다.
“산을 내려갈 수 없으니, 올라오는 게지. 아마도 온달 아우보다 내가 더 만만한가 보네.”
잠시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던 강이식이 허허 웃으며 장군기를 쥐고 일어섰다.
“모두 다시 말에 오르라! 한 번에 몰아쳐 온달 아우에게 가자. 오랜만에 상봉이니 바쁘다.”
강이식의 명에 말갈 기병들이 다시 말에 오르며 돌격 태세를 취하였다.
그 사이 방향을 돌려 다시 산에 오르기 시작한 수나라 군사들의 선두가 강이식의 시야에 들어왔다.
화염에 옷과 얼굴이 그을린 위충이 선두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총관이 고생이 많구려.”
강이식이 허허 웃으며 말하고는 손을 들어 군을 멈추었다.
화살을 겨누던 말갈 기병들이 활을 내리자, 위충이 이끌고 온 수나라 군사들도 걸음을 멈추었다.
아래에서 뛰어오르느라 숨이 턱까지 찬 위충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대장군! 나와 백합만 겨뤄 봅시다!”
단기접전으로 승부를 겨루자는 제안에 공별이 반발하였다.
“이미 다 이긴 싸움에 뭔 단기접전이냐? 올라온 김에 화살이나 실컷 먹어 보거라.”
위충을 비웃고는 손을 들어 일제사격 명령을 내리려는 공별에게 강이식이 엄히 꾸짖었다.
“적의 수장이다. 그리 비웃어서야 되겠느냐?”
강이식의 호통에 공별은 일제사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올렸던 손을 맥없이 내렸다.
“총관, 어서 나오시구려. 내가 마땅한 칼이 없어 깃발을 사용하니 이해하시오.”
강이식이 장군기를 들고 앞으로 나가니, 위충도 검을 뽑아들고 나오며 외쳤다.
“전장에서 어떤 무기를 사용한들 적의 목만 취하면 그만인 법. 그대가 깃발을 사용한들 흉은 되지 않소.”
위충이 뽑아 든 검이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빛났다.
강이식은 묘한 광채를 뿜는 위충의 검을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검광이 신묘하오.”
“황제 폐하께서 요서를 지키라 명하시며 내리신 용천검이오.”
용천검은 진시황 이후 대대로 숱한 황제들이 사용하던 검으로 유명하였다.
화려하게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을 뿐더러 검날마저 쇠가 아닌 금으로 만들었고, 그 모양새가 마치 용이 하늘을 나는 듯하여 용천검이라 불리는 명검이었다.
“이 용천검으로 고구려의 대장군 목을 베어 요서를 지킬 것이니, 그대는 서운하다 원망하지 마시오!”
위충이 기세 좋게 외치며 달려들었다.
용천검의 검광이 눈부시게 금빛 찬란히 빛나며 강이식의 목을 노려 찔러 들었다.
강이식은 화려한 검광에 취한 듯 바라보다가 대뜸 손을 뻗어 검 끝을 쥐더니 힘주어 꺾었다.
뚝.
강이식의 악력에 허무히 검 끝이 부러지며, 제 힘을 이기지 못한 위충이 강이식의 앞으로 끌려와 쓰러졌다.
강이식이 비틀거리는 위충을 바로 세워 주기 위해 손을 내밀자, 위충이 급히 자세를 바로 잡으며 부러진 검을 휘둘러 강이식의 목을 노렸다.
이에, 강이식이 장군기로 되받아 치자, 용천검이 튕겨나며 그대로 위충의 이마에 검날을 박았다.
이마에 검날이 박힌 위충이 허무히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땅에 머리를 처박고 생을 마감하였다.
기세 좋게 용천검을 뽑아들고 단기접전을 펼치던 총관이 생을 마감하자 수나라 군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다.
“뒤를 쫓아라! 투항하는 놈은 포박하고 저항하는 놈은 머리에 살을 박아라!”
공별이 말을 몰아 나가며 명하니, 말갈 기병들이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들의 뒤를 쫓았다.
이레 홀로 남은 강이식은 위충의 이마에 박힌 용천검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물러터진 금으로 검을 만들다니, 이게 뭔 헛지랄인가?”
이렇듯 위충이 허망히 생을 마감하던 그 순간.
온달은 반격해 오던 수나라 군사들 속을 휘저으며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그가 지나는 곳은 수나라 군사들의 시신이 쌓이고 파산귀검 초식에 패인 땅들이 흙과 돌을 쏘아 올렸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수나라 군사들은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온달의 기세에 질려 급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바빴다.
경우가 군사들에게 투항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포박하라 명하였으나, 이내 곧 밧줄이 부족하여 포박하기도 어려웠다.
“대승이옵니다.”
경우가 크게 기뻐 온달에게 말하였다.
온달도 주위를 둘러보니, 사로잡은 군사들의 수가 어림잡아 만 명은 넘어 보였다.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경우의 물음에 온달이 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자, 강이식의 걸걸한 목소리가 대신하였다.
“여기서 한 열흘 굶긴 후 돌려보내면 되지. 아우님은 뭘 고민하나?”
“형님, 무사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온달이 급히 달려가 강이식의 몸을 살폈다.
상한 곳 하나 없을 뿐더러, 어느새 야수가 버리고 간 낭아봉까지 찾아 들고 있었다.
“아우님이 때 맞춰 와준 덕에 무탈하시다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