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5)
장군기를 휘둘러 덤벼드는 수나라 군사들을 일거에 날려 버린 강이식이 공별을 돌아보며 엄히 말하였다.
“지금부터 우리도 공격에 들어간다.”
공별은 검붉은 피로 얼룩진 장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곧 몸을 돌려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말에 오르라! 산을 내려간다. 수나라 놈들을 쓸어버리자!”
공별의 외침에 방벽 아래로 화살을 날리던 말갈 기병들이 일제히 몸을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뒤에 물러나 있던 말들이 긴 울음과 함께 제 주인을 찾아 달려왔다.
가볍게 몸을 날려 말 위에 오른 말갈 기병들은 방벽을 넘는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며 일제히 강이식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강이식도 황우가 끌고 온 말에 오르고는 장군기를 치켜들었다.
그를 지키는 화살들이 쉴 새 없이 곁을 스치며 수나라 군사들의 명을 끊고 있었다.
“그동안의 수모를 되 갚아주자. 돌격하라!”
피로 얼룩진 장군기가 밤바람에 펄럭이자, 삼천의 말갈 기병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방벽을 뛰어넘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런 말갈 기병의 공세에 방벽을 오르던 수나라 군사들이 기겁해 몸을 돌려 도주하였으나, 이내 곧 말발굽에 밟히고, 곡도에 베여 쓰러졌다.
그리고 아직도 어리둥절해 산길에 멈춰선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천여 개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끝없는 비명이 천추산에 메아리치다가 산을 들판 달리듯 하는 말갈 기병의 함성에 묻혀 갔다.
* * *
천추산 아래에는 온달이 이끄는 궁기병 오천 기가 산을 오르던 위충의 요서총관부 본진을 공격하고 있었다.
산 아래에 세운 위충의 진영은 이미 이들의 공격으로 활활 불에 타고 있었으며, 매어 둔 말들은 놀라 도망친 뒤였다.
총공세를 펼치기 위해 산을 오르던 위충이 별안간 산 아래에 나타나 불붙인 화살을 날리는 고구려 군의 공세에 아연실색하여 소리쳤다.
“저것들은 무엇이냐? 도대체 고구려 군이 어찌 우리의 뒤를 칠 수 있단 말이냐?”
위충의 말에 공손향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우리가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을 잡기 위해 정신이 팔린 사이, 고구려 놈들이 이곳까지 내려온 모양이옵니다.”
“고구려 군이 대장군 강이식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냈단 말이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위충이 재차 묻자 공손향이 고개를 저었다.
“원군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놈들은 이미 작정하고 이곳으로 우리를 끌어들인 것 같사옵니다.”
공손향의 말을 듣고 보니, 위충도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을 목표로 강이식이 우리를 끌고 왔구나.”
사통팔달로 길이 연결된 천추산은 사방에서 수나라 군이 몰려와 포위하기도 수월했지만, 역으로 고구려 군 역시 사방 어느 곳에서든 쉽게 접근해 올 수 있었다.
위충의 요서총관부를 비롯한 임유관과 탁현의 행군원수부가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그의 도주로만 쫓고 있던 사이, 온달이 군을 이끌고 북에서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위충이 입술을 깨물며 산 아래와 산 중턱을 번갈아 살피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위와 아래가 막혔다. 서둘러 공지열 장군에게 원군을 청하라. 우리는 천추산을 내려갈 것이니, 길을 뚫어라!”
위충의 명에 전령이 급히 말에 올라 길도 없는 나무 사이를 내달렸다.
그리고 요서총관부의 장수들이 길을 뚫기 위해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산 아래 고구려 군이 계속해 기름 먹인 화살에 불을 붙여 날리니, 가을을 맞아 바짝 마른 나무들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산 전체를 태우려는 듯 쏟아지는 불화살에 수나라 군사들은 겁을 집어 먹고 제대로 산길을 내려가지도 못하였다.
이에 위충이 노하여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머뭇거리는 자는 목이 베일 것이다! 길을 뚫어라! 이곳에서 지체하다간 불에 타 죽는다. 길을 열어라!”
위충의 명에 장수들이 칼을 뽑아 들고 군사들의 목을 치며 길을 뚫으라고 외쳤다.
* * *
말갈 기병의 선두에선 강이식이 장군기를 창처럼 휘두르며 수나라 군사들을 마구 쓰러뜨리니, 호진보도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와 맞섰다.
산 아래에 말을 매어 둔 채 올라온 터라, 말 위에서 장군기를 휘두르는 강이식을 올려다보며 싸울 수밖에 없었다.
“강이식! 내 검을 받거라!”
말도 타지 않은 채 용감히 달려드는 호진보를 흘깃 바라본 강이식이 장군기를 일자로 찔러 갔다.
이에 길이에서 밀린 호진보가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날 거면서 왜 뛰어 온 게냐?”
강이식이 조롱하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호진보가 이를 갈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맹렬히 찔러 오는 장군기에 거리를 벌려야 했다.
“안 싸울 것이냐? 나 그럼 내려갈까?”
강이식이 또다시 조롱하니, 호진보가 씩씩거리며 다시 덤벼들었다.
그러나, 강이식은 너무도 쉽게 호진보의 검을 장군기의 창날로 툭 쳐내더니 가볍게 장군기를 휘둘러 호진보의 어깨를 후려쳤다.
“악!”
검을 놓친 호진보가 비명을 지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너 자꾸 왔다 갔다 할 것이더냐?”
강이식이 귀찮다는 듯 말하자, 공별이 불쑥 다가와 화살을 날렸다.
“대장군! 저런 놈을 뭐하러 상대하시오!”
공별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곧게 뻗어 호진보의 목에 박혔다.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호진보가 무너져 내리듯 쓰려지자, 사기가 저하될 대로 저하되었던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기가 꺾여 무기를 버리고 무작정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뒤로 말갈 기병들이 말을 몰아 쫓으며 화살을 날리니,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이대로 위충의 목을 가지러 간다! 따르라!”
강이식도 장군기를 치켜들고 말을 달리니, 이내 곧 말갈 기병의 앞을 서며 질주하였다.
산길을 내달린 가속으로 위충의 본진을 짓밟을 작정이었다.
“시원하게 밟아주자! 말 달려라!”
* * *
산추산을 향해 뻗은 산길은 기씨 사 형제가 부월수들을 이끌고 파천진을 펼치며 방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뒤로 늘어선 궁수들이 쉴 새 없이 불화살을 날렸다.
밤의 장막에 가리고 거리가 멀어 결코 사람을 겨눌 수 없기에, 이들 궁수들의 목적은 그저 산을 태우는 것이었다.
천추산 아래에 세워진 수나라 진영은 이미 활활 타고 있었고, 이 열기에 막바우가 후끈 달아올라 중얼거렸다.
“어, 따습다. 화끈하게 잘 타는구나. 후끈후끈하네.”
“이제 곧 내려올 게야. 우리도 준비하자고.”
곁에 선 경우가 화염이 치솟는 천추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막바우가 좁은 산길에서 대적하는 것이 어떠냐 묻자, 경우가 고개를 저었다.
“기껏 아래에 준비를 했는데, 무엇하러 올라간단 말인가? 저렇게 기씨 사 형제가 진까지 펼치고 있지 않은가?”
경우가 자신들의 앞에 부월수를 이끌고 파천진을 단단히 펼친 기씨 사 형제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면 한바탕 싸움 좀 해야 하지 않나?”
막바우가 못내 아쉬운 듯 말하였으나, 경우가 냉정히 잘랐다.
“뭔 정신 나간 소리를 집요히 하나? 쉽게 이길 싸움이니 나서지 말게.”
경우의 지청구에도 막바우가 온달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군! 기다릴까요? 올라갈까요?”
이미 온달은 결정을 내린 듯 대답대신 누렁이를 몰아 앞으로 나왔다.
“왔으니, 올라 형님을 도우세.”
“시원하신 명이옵니다. 하하하.”
막바우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온달의 뒤를 따랐다.
경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기악을 찾아 소리쳤다.
“우리가 올라갈 터이니, 혹여 빠져나가는 수나라 놈들이 없도록 단단히 지키게!”
기악이 허리 숙여 명을 받으니, 경우가 궁기병을 이끌고 바로 온달의 뒤를 따랐다.
“섬멸전이다. 따르라!”
온달을 비롯한 이들 모두는, 공지열이 이끄는 임유관의 오만 군사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 * *
위충의 전령이 어두운 산길을 헤매는 사이.
신중한 공지열은 이미 고구려 군이 천추산 아래 진영을 불태우고 위충의 뒤를 화공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전황을 접하였다.
“총관을 구하러 간다.”
공지열의 명에 임유관의 장수들이 일제히 군을 정비해 진군을 시작하였다.
기병과 보군이 어우러진 병종이었기에, 진군 속도를 내기 어려워 공지열의 마음은 무척이나 급하였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패주하고 위충 총관이 그 뒤를 쫓고 있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구나. 도대체 고구려 군이 여기까지 어떻게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이지? 영주성이 함락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을 터인데…….”
설령, 요동의 고구려 군이 영주성을 함락하였다고 해도, 군을 이끌고 내려오기엔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이해할 수 없었다.
“패전해 흩어졌던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말갈 기병들이 재집결해 이곳으로 온 것인가?”
공지열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 순간, 척후병이 달려와 아뢰었다.
“장군! 전방에 수상한 군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뭐라? 수상한? 무엇이 수상하고, 그 수가 얼마나 되더냐?”
“고구려의 개마무사 일천 기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넝마를 걸친 것들이 말을 몰아오는데… 그 수가 삼만 기에 달하옵니다.”
“넝마를 걸쳐?”
공지열이 놀라 되 묻자, 척후병이 바로 답하였다.
“갑주가 아닌, 넝마를 걸쳤사옵니다. 가죽을 기워 옷을 만든 것이 아닌, 짐승 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죽을 걸칠 것들이옵고, 깃발조차 없사옵니다.”
북해가 고향으로 임유관을 지키던 공지열로선 듣도 보도 못한 군대였다.
돌궐과 거란 군사들은 물론, 말갈의 군사들도 갑주를 입고 전장에 나왔기에, 가죽만 걸친 군대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행군을 멈춰라!”
맞서야 할 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냥 행군할 수 없다 판단하여 공지열이 급히 명을 내렸다.
“단단히 진을 치고, 진열을 유지하라! 적을 파악하기 전까지 공격하지 않고 방비만 한다.”
공지열의 명에 바로 검과 방패를 든 중장보병들이 앞을 지켰고, 그 뒤로 기병을 대적하기 위한 장창부대가 극을 들고 늘어섰다.
그리고 이들의 뒤로 궁병들이 빠르게 움직여 넓게 진을 펼치니, 곧바로 진영의 양 끝을 기병들이 빠르게 움직여 지켰다.
“불을 꺼라!”
공지열은 어둠 속에서 접근하는 적과 맞서기 위해 횃불조차 끄게 하였다.
“놈들도 불을 밝히지 않았으니, 우리도 불을 밝히지 않는다.”
횃불을 목표로 퍼부을 공세를 사전에 방비한 것이다.
뜨거운 차 한 잔이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미세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땅이 울릴 정도로 가까워졌건만, 어찌 말 울음소리조차 안 들린단 말인가?”
공지열이 의아해 중얼거렸다.
그의 진영 내에선 긴장한 말들이 내뿜는 콧김은 물론이요.
말울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기에,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공지열이 손을 땅에 대며 울림을 더욱 자세히 느끼려 하던 그 순간.
히이이잉!
긴 말울음이 울고, 천지를 뒤엎을 땅울림이 바로 코앞에서 일었다.
두두두두.
고구려의 개마무사들과 정체 모를 군대가 어둠에 의지해 이미 앞까지 소리 없이 접근해 왔던 것이다.
뿌우우!
긴 뿔 나팔이 울리고, 어둡기만 했던 밤하늘이 불화살로 불게 타올랐다.
그리고, 폭풍처럼 질주해 온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중장보병들을 방패와 함께 짓밟아 뭉개며 타넘고는 기병 제압용 극을 세워든 장창부대마저 짓밟아 뭉갰다.
이어서, 사방에서 뿔 나팔이 불며 말울음과 말발굽 소리가 좌우에서 울리더니, 어둠을 뚫고 수만 대의 화살이 일거에 날아들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끊이질 않고, 어느새 진영을 돌파한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뒤를 돌아 다시 배후에서 돌격해 왔다.
“진열을 유지하라! 살을 날리고 극을 땅에 박고 기병 돌격을 막아라! 돌파 당하지 말고 방패로 버텨라!”
또다시 돌파당할 경우 진영이 흐트러지며, 이어서 재정비한 개마무사들의 돌격이 연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