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58화 (158/328)

158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4)

“그래, 위충 총관에게 우리가 곧 당도할 것이라 아뢰었느냐?”

위충에게 보낸 전령이 돌아오자 공지열이 물었다.

이에, 전령이 머뭇거리며 답하였다.

“장군, 총관께서 심히 언짢아하시더이다.”

한왕 양양의 명을 받아 오만 군사를 이끌고 천추산 남쪽에 당도한 공지열은 실상, 행군원수부 소속 장수는 아니었다.

그는 북해가 고향으로 임유관을 지키는 장수였다.

패전해 도주 중인 고구려 군을 섬멸하기 위해 한왕 양양은 행군원수부의 군을 보내고 싶었으나, 자신의 형님인 태자 양광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임유관의 공지열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임유관의 공지열 역시 고구려 군이 패주해 도주 중이란 소식을 접하고 있던 차에 한왕 양양의 명이 내려오니, 서둘러 임유관의 군사 오만을 이끌고 출정한 것이다.

공지열은 공자의 후손으로 그 성품이 온후하고 남과 시비를 붙고 경쟁하기를 꺼려하여 무장으로서 낮게 평가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중한 성품을 황제 양견은 중히 여겨 임유관을 지키는 중책을 내렸다.

한왕 양양도 공지열이라면 위충과 공을 다투지 않아 분란이 없을 것이라 믿고 맡긴 것이었다.

그러나 위충은 이런 사정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 위충 총관께서는 오늘 밤 야습을 강행할 것이니, 장군께선 산 아래에 진을 치고 대가하리 하셨습니다.”

전령이 전하는 말을 듣던 공지열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요서총관부의 군사가 삼만이고 산 위의 고구려 놈들은 삼천이라 들었으니, 야습은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진을 치고 총관의 승전보를 기다린다.”

공지열의 말에 자리한 장수들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어렸다.

“이렇게 기다릴 거면 무엇 하러 출병을 하셨나이까?”

호랑이 수염의 장수가 무례하게 물었으나, 공지열은 나무라지 않고 부드럽게 답하였다.

“한왕 전하의 명이니 출병하였지 몰라서 물으시는 게요? 우린 공을 다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니, 고구려의 대장군 목은 위충 총관에게 내어 줍시다.”

이미 위충의 대승을 예상한 듯한 말이었다.

이렇듯 공지열을 비롯한 모두가 간단한 산수로도 이번 야습에 고구려 군이 궤멸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 * *

“천추산 남쪽에 수나라 군사들이 왔다 합니다.”

공별이 다가와 강이식에게 아뢰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강이식이 미간을 좁히며 말하였다.

“조금 빠르게 왔군. 우리가 너무 요란히 내려왔나 봐.”

“대장군, 수의 증원이 왔으니 곧 공세가 있지 않겠습니까?”

공별이 불안한 듯 묻자 강이식이 당연하다는 듯 답하였다.

“오늘 밤 야습이 있겠지. 당연한 계산 아니겠나?”

“이곳에서 총공세를 막을 수 있겠사옵니까? 포위를 뚫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강이식은 여전히 단호했다.

“아니야.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우리는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려야 해.”

“대장군, 수나라 놈들의 공격이 예상보다 빨라졌으니, 마냥 이곳에서 기다리기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하잖아.”

강이식은 여전히 단호했고, 공별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대장군. 도대체 누굴 기다리기에 이런 포위 속에서도 기다리자고 하시는 겁니까? 설령 기다리던 사람이 온들 이런 상황에 뭔 도움이 되겠나이까?”

그러나 강이식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공별의 말을 끊었다.

“그만, 이제 그만하고 야습이나 대비하자고. 우린 죽어도 이곳에서 죽으며 기다려야 해. 그게 을지문덕의 계획이야.”

을지문덕에 대한 강이식의 절대적 신뢰를 한탄하며 공별이 물러나 군사들에게 야습 대비를 명하였다.

“곧 수나라 놈들이 밀고 올라올 것이다. 우린 죽어도 이곳에서 죽을 것이니, 그리 알고 죽도록 싸울 준비들 하거라!”

전혀 비장미가 느껴지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말갈 기병 삼천은 일제히 남은 말린 고기를 입에 욱여넣으며 결전 준비를 하였다.

공별도 한 조각 남은 말린 고기를 입에 넣으며 구시렁거렸다.

“이것도 마지막이군. 어차피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해도 굶어 죽을 신세였으니, 이곳에서 싸우다 죽자.”

* * *

밤이 깊어지자, 산 아래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대장군, 놈들이…….”

공별이 다가와 아뢰니,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이군.”

짧게 답한 강이식이 장군기를 들고 서 있는 군사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낭아봉을 잃어버려서 말이야. 그걸 좀 써야겠네.”

장정 키 두 배가 넘는 장군기를 건네받은 강이식이 한손으로 들어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무게가 조금 모자라지만, 창으로 사용하기에 적당하겠어.”

“대장군, 칼이나 도끼 같은 걸 사용하시지… 거추장스럽게 깃발을…….”

공별이 따라와 잔소리를 하자 강이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무게가 맞지 않아서 말이야. 거추장스러워도 이거면 됐어.”

대장기를 들고 방벽 위에 오른 강이식이 산 아래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수나라 군사들이 제법 소리 없이 산을 오르는 듯했지만, 삼만 대군이 일시에 오르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불도 안 밝히고 어렵게 오르는구나.”

강이식이 안쓰럽다는 듯 말하자, 공별이 바로 핀잔을 주었다.

“우리가 저놈들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병서에서 이르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느니라. 이 말은 즉, 우린 적이 야습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이긴다는 뜻인 게야.”

“아니 대장군. 그게 어찌 그런 뜻이란 말입니까?”

공별이 따지듯 묻던 그 순간, 강이식이 대장기를 번쩍 들어 올리며 크게 소리쳤다.

“황우! 고생하는 저놈들에게 불을 밝혀 주거라!”

“명을 받습니다!”

황우가 군사들을 이끌고 기름 먹인 통나무에 불을 붙여 산 아래로 굴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불붙은 통나무가 구르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이에 맞춰 공별도 크게 소리쳐 명하였다.

“살을 날려라! 저기 수나라 것들이 있다!”

불붙은 통나무로 밝아진 곳을 향해 화살이 쏟아져 내리고, 이내 곧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밤공기를 찢었다.

그러나 이번엔 수나라 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방패로 밀어붙여라! 물러나지 마라!”

부총관 호진보의 명에 불붙은 통나무를 선두의 수나라 군사들이 방패로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맹렬히 굴러온 통나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패와 함께 깔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막아! 막으며 진격한다!”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도 호진보는 계속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를 피하지 말고 막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통나무를 방패로 막으며 달려들었으나 여지없이 통나무에 깔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군사들의 손실에도 호진보의 명령은 멈추지 않았다.

“막아! 막으며 진격하라! 막아!”

그리고, 마침내 방벽 위에서 굴러 내려오던 통나무들이 이미 먼저 굴러 내려와 수나라 군사들을 깔아뭉갠 통나무들에 걸리며 멈추었다.

군사들을 통나무에 깔리게 하여 고구려 군의 화공을 막은 것이다.

이에 기세 오른 호진보가 쩌렁쩌렁 목소리를 울리며 명하였다.

“치고 올라간다! 단숨에 방벽을 넘어라!”

거리를 좁히지 못하면, 고구려 군의 화살에 피해만 생길 뿐이란 판단에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돌격을 명한 것이다.

“우리가 돌격해야 뒤따라오는 궁수들이 거리를 좁혀 고구려 놈들에게 화살을 날릴 수 있다. 돌격하라! 진격하라!”

호진보의 외침에 수의 돌격대가 함성을 지르며 빗발치는 화살 속으로 돌격을 강행했다.

좁은 산길을 뛰어 오르는 수의 돌격대는 고구려 군에게 좋은 표적이었으나,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동료의 시신을 밟고 뛰어오르는 수의 돌격대 역시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물러설 수 없다. 돌격하라! 멈추지 마라! 머뭇거리면 화살에 목이 꿰뚫리고 만다! 돌격하라!”

목이 터져라 독려하며 호진보도 고구려 군의 방벽을 향해 돌격하였다.

그리고 뒤따라 오른 궁수들이 고구려 군의 방벽과 거리를 좁혀 화살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쏴아아악!

마침내, 고구려 군의 진영 위에도 화살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대장군! 피하소서!”

강이식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을 막기 위해 공별이 방패를 들고 뛰어오며 소리쳤다.

그러나 강이식은 결코 두려운 기색 없이 장군기를 힘껏 들어 올리며 깃발을 머리 위로 펄럭였다.

팡! 팡! 팡!

커다란 기가 밤공기를 때리며 강한 파열음을 냈고, 강이식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화살비도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오너라! 모두 상대해 주겠다!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될지 모르겠으나, 너희들의 무덤도 이곳이 될 것이다. 오너라! 어서 오너라!”

강이식이 포효하듯 외치며 깃발을 휘두르자, 공별도 이를 악물고 방벽 위로 올라 화살을 날리며 소리쳤다.

“쏴라! 이곳은 우리의 무덤이 아닌, 수나라 놈들의 무덤이 되어야 한다. 쉬지 말고 살을 날려라!”

고구려와 수나라 군사들이 서로를 향해 화살을 쏟아붓는 사이, 호진보가 이끈 돌격대가 마침내 방벽을 부수며 넘기 시작했다.

“어디 잡것들이!”

강이식이 달려드는 수나라의 돌격대들에게 장군기를 휘둘러 쓰러뜨리며 외쳤다.

“황우!”

이에 황우가 곡도와 도끼를 든 군사들을 이끌고 방벽 위로 올라 수의 돌격대들에 맞섰다.

방벽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공별은 수의 총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궁수들을 독려하며 화살을 날렸다.

“막을 수 있다! 살을 날려라! 멈추지 마라!”

그러나 피해를 감수하고라도 이번 공격으로 고구려 군을 궤멸시키기로 마음먹은 위충이 마침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전군, 공격하라! 부총관의 돌격대가 방벽을 무너뜨렸다. 전군 공격하라!”

위충의 명이 떨어지자, 장수들이 군사들을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진격을 시작했다.

“대장군… 이곳은… 이제…….”

공별이 화살을 날리면서 강이식을 불렀다.

차마 포위를 뚫고 도주하자는 의견을 낼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도대체 이곳이 우리 강산도 아니고 이 빌어먹을 산에서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만은 가득했지만, 장군기를 휘두르며 수의 돌격대를 대적하는 강이식의 모습에 공별은 연신 화살만 날려야 했다.

그때, 밤하늘을 가르며 매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쐐애애액!

‘아니, 이 야심한 밤에 웬 매의?’

공별이 의아해 여기면서도 활시위를 당기던 순간, 강이식이 장군기를 휘두르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가 왔다! 하하하!”

‘도대체 누가 왔다는 건지?’

공별이 의아해 하며 수나라 진영 깊숙이 화살을 날리자, 저 멀리 수나라 진영 끝에서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악!”

고구려 군의 사거리가 닿지 않을 거리에서 비명이 크게 일자, 돌격대를 지휘하던 호진보도 놀라 고개를 돌렸고, 수나라 진영을 향해 화살을 날리던 공별도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응시했다.

“으아악!”

분명 총관 위충이 있는 수나라 본진에서 울리는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또다시 밤공기를 찢으며 매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쐐애애액!

그리고 장군기를 펄럭이며 강이식이 소리쳐 명하였다.

“위장군 온달이 왔다! 공격하라! 이곳을 수나라 놈들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