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57화 (157/328)

157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3)

고구려 군이 천추산 중턱에 흙과 돌을 쌓아 급히 방벽을 세울 무렵.

위충이 이끈 요서총관부의 군사들도 힘겹게 산을 올라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수나라 군사의 선두와 고구려 군의 방벽과의 거리는 천보 남짓으로, 길게 늘어선 수나라 군의 행렬 끝은 보이지 않았다.

수나라 군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공별은 흙으로 쌓은 방벽 위에 불쑥 올라 대뜸 화살을 날렸다.

휙!

사위를 떠난 화살이 가볍게 바람을 가르자, 이내 곧 수나라 군에서 비명이 일고는, 선두에서 군사들을 이끌던 장수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맥없이 쓰러졌다.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움직임도 없었다.

이에 격분한 다른 장수가 앞으로 나오며 시신을 수습하라 명하며 방벽 위 공별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어딜 급히 올라오는 게냐? 밥은 먹고 올라오는 것이더냐?”

공별이 당당히 외치자, 선두의 장수가 급히 전령을 위충에게 보내고는 앞으로 성큼 나와 외쳤다.

“나는 요서총관부 부총관 호진보다! 도망치기 힘들지 않느냐? 이곳은 너희 고구려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돌아가기도 어려울 터인데, 그만 투항함은 어떠하냐? 이렇게 도망가다간 만리장성에 부딪쳐 오갈 곳도 없어질 게다.”

공별이 활시위를 팽팽이 당기며 자신을 겨누고 있음에도 수나라 장수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저 수나라 놈이 명령을 기다리기 위해 시간을 버는구나.’

생각을 마친 공별이 머뭇거림 없이 화살을 날리려 할 때, 대장군 강이식이 방벽 위에 올라 곁에 서더니 크게 외쳤다.

“뭔 담소를 이리도 길게 나누는 것이냐? 왔으면 들어와야지. 기껏 올라와 공격 안 할 것이더냐? 안 들어올 거면 시끄러우니 내려들 가거라.”

강이식의 조롱에 고구려 군에선 웃음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수나라 장수가 강이식에 맞서 외치려 할 때, 길게 늘어선 수나라 군사들이 갈라지며 요서총관 위충이 앞으로 나왔다.

위충의 곁엔 공손향이 나란히 서서 방벽을 올려다 보았고, 이들의 뒤로 요서총관부 장수들이 늘어섰다.

“도대체 저것은 언제 쌓았단 말인가?”

위충이 방벽을 가리키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고구려군이 산 중턱에 쌓은 방벽이 제법 높고 단단해 보인 모양이다.

이에 공손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하였다.

“총관, 천보 거리입니다. 우리의 화살은 닿지 않고, 저 위 고구려 군의 화살은 우리를 노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일단 군을 물리소서.”

이에 부총관 호진보가 이견을 내었다.

“아니 될 소리요. 아래에서 보니 대단해 보이지만 급히 쌓은 흙무더기일 뿐이오. 총관, 놈들이 시간을 끌려는 수작입니다. 단숨에 몰아쳐야 하옵니다. 소장에게 맡기소서.”

요서부총관 호진보는 위충과 숱한 전장을 함께하며 돌격대 역할을 자처해 적의 진영을 돌파하던 맹장이었다.

이번에도 호진보가 돌격대를 자처하니, 위충이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부총관의 전공을 기대하겠소.”

위충의 명이 떨어지자, 부총관 호진보가 손을 들어 부장들을 부르고는 즉시 자신의 군사를 정비해 일제히 방벽을 향해 뛰어 올랐다.

방패로 앞을 막고, 칼과 도끼를 든 돌격대가 두려움 없이 좁은 산길을 뛰어오르니 그 땅울림에 방벽으로 쌓아 올린 흙들이 흘러내렸다.

고구려 군은 흘러내리는 흙무더기를 정비할 겨를도 없이 일제히 활을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호진보가 이끈 수나라 군사 삼천이 가파른 산길을 뛰어 오르는 기세에, 강이식도 더는 기다리지 않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좋은 사냥감이다. 살을 날려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천 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허공에 뜨더니, 이내 곧 아래로 내리 꽂혔다.

쏴아아악!

장대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하늘을 가린 화살들이 수나라 군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곳곳에서 수나라 군사들의 비명이 울리고, 쓰러지는 수나라 군사들로 산길이 뒤엉켰다.

“방패! 방패를 들어 올려라! 돌격을 멈추지 마라!”

부총관 호진보의 외침에 수나라의 삼천 돌격대가 일제히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부상자와 시신들을 마구 밟으며 돌격을 계속하였다.

이때, 강이식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외치니 그의 명령이 천추산에 메아리쳤다.

“황우! 시작하거라!”

명을 받은 황우가 대기하던 군사들과 함께 커다란 통나무들을 방벽 위로 올리더니 불을 붙여 아래로 굴렸다.

미리 기름을 듬뿍 부어 놓고 대기하던 통나무들이 화염에 휩싸여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니, 시커먼 연기와 화염으로 수나라 돌격대의 시야가 흐려졌다.

“으아아악!”

미쳐 불붙은 통나무들을 피하지 못한 호진보의 돌격대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호진보의 명령도 매캐한 연기와 화염 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거리를 좁혀야 한다. 멈추지 마라! 뛰어 올라라!”

이에 맞서, 강이식도 명을 내렸다.

“저 연기 속에 놈들이 있다! 저 검은 연기 속으로 살을 계속 날려라!”

고구려 군의 화살이 검은 연기 속을 노려 날아드니, 여지없이 비명들이 메아리쳤다.

이어서 황우가 이끈 군사들이 재차 기름 먹인 통나무에 불을 붙여 아래로 굴리니, 마침내 호진보도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퇴각하라! 일단 물러난다.”

검은 연기 속에서 호진보의 외침이 들리자, 강이식이 공별을 바라보았다.

이에 공별이 히죽 웃으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화살을 날렸다.

휙!

짧게 바람을 가른 화살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악!”

호진보의 비명이 울리자, 강이식이 만족해 공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공별 네가 아주 운이 좋구나.”

“대장군, 소장의 실력이옵니다.”

한편, 기세 좋게 돌격했던 부총관 호진보가 등에 화살이 박힌 채 퇴각해 오니, 위충이 못마땅해 혀를 찼다.

“쯧쯧, 부총관은 내려가 그 화살이나 뽑으시오.”

“총관, 진열을 정비해 다시 돌격하겠나이다.”

“저 연기나 걷힌 뒤에 생각해 봅시다. 일단 화살이나 뽑도록 하시오.”

위충이 냉정히 명하니, 호진보가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나 화살을 뽑고는 다시 위충의 뒤에 섰다.

“연기로 시야가 가려져 고구려 군의 방벽이 보이지 않는구려.”

위충이 연기로 휩싸인 산길을 바라보며 한탄하니, 공손향이 바로 답하였다.

“놈들은 방벽을 쌓고 버틸 요령인 듯하오니, 일단 군을 물려 산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산길이 좁아 대군이 일시에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저 고구려 것들 역시 오래 버틸 수는 없사옵니다.”

“오래 버틸 수 없다?”

위충이 의아해 물었다.

그러자, 공손향이 방긋 웃으며 바로 답하였다.

“우리는 양현감이 물자를 수송해 주었지만, 저들은 수일 째, 도망만 다닌 신세이옵니다. 산 위에서 삼천이나 되는 군사들이 무엇을 먹겠사옵니까?”

위충도 듣고 보니, 공손향의 의견이 옳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놈들은 줄곧 도망만 다녔었지.”

이에 공손향이 한마디 더 올렸다.

“굶주리면 싸우지 못하는 법. 경험에서 나와 아뢰는 것이옵니다.”

배찰산에서 굶주리다 온달에게 패한 공손향이었기에, 보급이 끊긴 상태에선 산 위에 진을 친들 오래 버티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총관, 놈들은 스스로 무너질 터이니, 그때 올라가 때려잡으소서.”

공손향이 다시 공손히 의견을 내었다.

“공녀님의 말대로 일단 군을 물리겠소. 부총관은 군을 정비해 이곳을 지키며 놈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시구려.”

위충이 군을 물리며 부총관 호진보에게 남으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사옵니다. 심려 마시옵소서. 단단히 지키고 있겠나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호진보가 장담을 하니, 위충이 재차 당부하였다.

“절대 공격은 하지 말고,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알리시오.”

호승심 강한 호진보였기에, 위충이 염려되어 당부를 남긴 것이다.

* * *

해질 무렵이 되자, 양현감이 야수와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당도하였다.

“총관, 오는 길에 태자 전하의 전갈을 받았나이다.”

양현감이 대뜸 아뢰니, 위충이 의아해 물었다.

“무엇이오?”

“요동의 고구려 군이 요하를 건넜다고 하옵니다. 서둘러 회군하여야 하옵니다.”

양현감의 말에 위충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을 다 잡아놓고, 이제와 군을 물리다니…….”

이에 때마침 산에서 내려온 부총관 호진보가 의견을 내었다.

“회군하기 전, 야습을 가해 일거에 쓸어버리소서.”

그러나 양현감이 나서며 이견을 내었다.

“아니 되옵니다.”

“그대는 어찌 안 된다 말하는가?”

호진보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하였으나, 양현감은 개의치 않고 답하였다.

“야습이 성공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오나, 만일 실패할 시, 우리 군의 손실이 염려되옵니다. 영주성이 위급한 상황에서 한 명의 군사라도 아껴 회군해야 하오니, 당장 군을 돌리셔야 하옵니다.”

양현감의 말에 위충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부총관 호진보가 재차 위충을 재촉하였다.

“다 잡은 놈들이옵니다. 여기서 군을 물리시오면, 기껏 잡은 놈들을 풀어주는 꼴이오니 야습을 강행하여 숨통을 끊은 후 회군하셔야 하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태자 전하의 회군 명을 거역하실 생각이이옵니까?”

양현감이 재차 이견을 내자 호진보가 버럭 화를 내었다.

“닥쳐라! 어디 감히 무명소졸 따위가 애비의 명성을 업고 나서는 게냐?”

호진보의 호통에도 양현감이 당당히 맞서 답하였다.

“제가 비록 무명소졸이오나, 태자 전하의 명을 전하고 있으니, 부총관께서는 소장의 얼굴을 보지 말고, 전하는 명만 보소서.”

“뭐라? 이놈이 그래도!”

이에 호진보가 벌떡 일어나 크게 호통을 치려 하니, 위충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태자 전하의 명이니 부총관도 진정하시오.”

호진보가 다시 자리에 앉자, 위충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쉽지만, 어쩌겠소. 태자 전하의 명이 저 따위 고구려 패잔병들보다 중한 것을… 우리는…….”

위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군사가 급히 뛰어 들어와 아뢰었다.

“탁현 행군원수부 한왕 전하의 명을 받은 군사들이 이곳 천추산으로 오고 있사옵니다.”

“뭐라? 어디까지 왔느냐?”

위충이 놀라 물었다.

“한 식경 내로 당도할 것이오며, 그 수가 오만에 이르고 있사옵니다.”

탁현 행군원수부의 대군은 아니었지만, 오만이란 군사 역시 작은 수는 아니었다.

“고작, 산 위에 올라 숨은 고구려 패잔병 삼천을 잡겠다고 오만이나 보내다니…….”

위충은 한왕이 공을 가로채려 한다 생각하여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위충과 달리 양현감은 이를 반겨 말하였다.

“잘 되었습니다. 이곳은 행군원수부 군사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속히 영주로 회군하시옵소서.”

“잘 되긴 뭐가 잘 되었다는 게요?”

위충이 노기 띤 음색으로 묻더니, 이내 바로 명을 내렸다.

“양현감은 속히 군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회군하여 태자 전하를 돕도록 하시오. 나는 이곳에 남아 저 고구려 잔당들을 쓸어버린 후 뒤를 따르겠소.”

“총관 한시가 급하옵니다. 저 고구려 패잔병들은 행군원수부에 맡기소서.”

양현감이 이견을 내자, 위충이 노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닥치시오! 우리는 기병 일색이라 저 고구려 놈들을 때려잡고도 그대보다 빠르게 영주로 회군할 수 있으니, 행군 속도가 느린 그대 먼저 떠나시오. 나는 이곳을 마무리 짓고, 행군원수부 군사들까지 이끌어 회군하겠소.”

행군원수부의 오만 군사까지 이끌고 영주로 회군하겠다는 말에 양현감도 더는 이견을 낼 수 없었다.

“따르겠나이다. 그럼 속히 회군하도록 하겠습니다.”

양현감이 고개 숙여 명을 받으니, 위충이 부총관 호진보에게 바로 명을 내렸다.

“부총관은 전군 야습 준비를 하시오.”

전군을 몰아 일거에 방벽을 무너뜨리겠다는 명에 호진보가 크게 기뻐하였다.

“속히 정비를 하겠나이다.”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온 양현감은 막사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야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계속 거기 그렇게 앉아 계셨던 것이시오?”

“나는. 장수가… 아, 니라. 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대는 어느 장수 못지않는 무용을 지녔으니, 곧 위로 승찬하여 장수가 될 것이오.”

“나는. 수의… 장수가… 될, 생각이 없소.”

야수의 답변에 양현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위험한 말이니, 나 이외에 사람에겐 그런 말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구려.”

양현감은 대답 없는 야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기며 말하였다.

“나는 영주성으로 먼저 돌아가니, 그대는 이곳 일을 마치고 무사히 영주로 오시구려. 우리의 인연이 계속되길 바라오.”

야수는 대답 없이 그저 일만 군사를 이끌고 떠나는 양현감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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