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56화 (156/328)

156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2)

전장의 거인 정란이 영주성을 향해 진격을 하며 불화살을 쉴 새 없이 쏟아부으니, 영주성 성벽 위는 화살비가 내렸다.

“정란은 무시하고, 저놈들의 접근을 막아라!”

양소는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든 고구려의 돌격대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러나 고구려의 돌격대는 거침없이 성벽 아래까지 접근해 갈고리를 매단 밧줄을 던졌다.

“돌을 던지고 통나무를 떨어뜨려라!”

돌격대가 성벽 위로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양소의 명령이 거듭 되었다.

그 사이, 길게 늘어서 사다리를 맨 고구려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질주해 오니, 양소는 이내 곧 명을 내려야 했다.

“사다리를 걷어 내라! 사다리를 밀어 버리고, 밧줄을 끊어라!”

성벽 위 백성들이 힘을 모아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를 밀어내기 위해 달라붙었고, 밧줄을 끊기 위해 군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정란 위에서 쏟아붓는 화살들은 정확히 사다리를 미는 백성들과 밧줄을 자르는 군사들을 노렸다.

게다가 고구려의 궁수들이 정란의 앞으로 나오며 화살을 쏘아대니, 성벽 위에선 머리를 드는 족족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기 일쑤였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피해 머리를 숙이는 백성들이 늘기 시작했다.

“막아 낼 수 있다! 사다리를 밀어내고 밧줄을 끊어라! 머리를 숙이는 놈들은 당장 목을 베어라!”

양소의 명을 접한 장수들이 백성들의 목을 베기 바빴다.

영주성은 거란의 세력권 내에 자리한 수의 전초기지였기에, 영주성 내의 백성 대부분은 거란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이 전쟁은 무의미한 남의 나라 전쟁이었다.

수나라 군사들에게 강제로 끌려 나와 성벽 위에 올려졌으니, 조금씩 조금씩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우리는! 수나라 백성도 아니고, 고구려가 우리 적도 아니오! 도대체 왜 우리를 성벽 위에 올리고, 목을 베는 것이오!”

비명으로 가득 찬 성벽 위 어느 한곳에서 누군가의 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냐! 이놈을 찾아 당장 입을 찢어 놓거라!”

영리한 양소는 분노가 전파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급히 명을 내렸다.

이때, 또다시 다른 음성이 양소의 외침에 맞섰다.

“우리는 이 성벽 위에 올라 죽을 이유가 없소! 우리는 수나라 백성이 아니오! 우리는 거란인이오!”

늙은 노파의 목소리였다.

노파의 목을 베기 위해 군사들이 칼을 빼어 들고 달려가니, 백성들이 앞을 막았다.

“할머니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성벽 위로 올려 화살받이를 시키더니, 사실을 이야기한다하여 어찌 할머니의 목을 베려 하시오!”

이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에도 화살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고, 미쳐 피하지 못한 군사들과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리를 죽이지 마시오! 우리를 죽이지 마시오!”

“우리는 거란인이오!”

성벽 위 곳곳에서 백성들의 분노에 찬 외침이 일기 시작했다.

성벽 위가 혼란스러워지자, 성벽에 걸쳐지는 사다리의 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고, 밧줄을 타고 오르던 고구려의 돌격대는 이미 성벽 위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양소가 당황해 신음을 내뱉고는 냉정히 명하였다.

“명을 따르지 않는 것들은 모두 목을 베고, 고구려 놈들이 성벽 위로 오르지 못하게 막아라! 막아 낼 수 있다!”

이때, 양소의 명에 맞서는 여인의 외침이 성벽 위에 울려 퍼졌다.

“고구려 군이 이미 성벽 위로 오르고 있다! 수나라 놈들은 우리 목을 베고 우리의 몸으로 화살을 막으라 하니, 살고자 한다면 고구려군에게 성벽을 내어주고 수나라 놈들과 맞서야 한다!”

고우면서도 한기가 흐르는 목소리였다.

양소가 급히 격정적으로 외치는 목소리의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니, 차가운 미소를 띈 여인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문으로 피신해 왔던 거란인 여인 금옥이었다.

“네, 네년이…….”

양소가 당황해 중얼거리자, 태자 양광도 놀라 금옥을 향해 엄히 꾸짖었다.

“네 양부를 죽인 원수가 저 고구려 놈들 아니더냐? 어찌 목숨을 구걸하고자 원수의 편에 서려 하는 것이냐!”

태자 양광의 호통에도 금옥은 거침없이 소리쳤다.

“고구려군에게 성벽을 내어주고 우리 살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외침이 곳곳에서 일었다.

“당장 저놈들의 목을 베어라!”

양소가 급히 정신을 가다듬어 명을 내렸으나, 금옥을 향해 달려드는 군사들을 단황이 두 자루 곡도를 휘둘러 쓰러뜨렸다.

“네놈이! 당당 저 년놈들과 저항하는 놈들의 목을 베어라!”

양소의 명에도 성벽 위로 오르기 시작한 고구려군을 막기 힘겨워 저항하는 거란 백성들의 목을 벨 여력은 없었다.

오히려 거란 여인 금옥과 백발 노인 단황이 수나라 군사들의 목을 베니, 이에 호응하는 거란인들이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에 맞춰 전장의 거인 정란이 점점 더 영주성을 향해 진격하더니 마침내 성벽 위로 고구려 군이 뛰어 내렸다.

성벽 위는 수나라군의 비명과 고구려군의 함성 그리고 거란 백성들의 환호로 들끓었다.

“태자 전하,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

양소가 태자 양광의 앞을 지키며 말하였다.

그의 흰수염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손에 든 검엔 핏물이 흘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양소는 책사로서도 출중하였지만, 무예도 뛰어나 전장에선 항상 태자 양광을 지켜 왔었다.

“남문으로 가시옵소서.”

양소가 달려드는 고구려군의 목을 베어 쓰러뜨리며 짧게 말하였다.

겁에 질렸던 태자 양광도 정신을 가다듬어 급히 성벽을 내려갔고, 그를 지키며 따르는 군사들은 고작 십여 명에 불과했다.

태자 양광이 무사히 성벽을 내려가자 양소도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흰수염을 휘날리며 뛰어내리는 양소의 등 뒤로 화살이 빗발쳤으나, 사뿐히 착지한 양소가 몸을 돌려 검으로 모두 쳐내고는 태자의 뒤를 따랐다.

* * *

“남의 나라 백성들로 수성전을 펼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단에 올라 영주성을 바라보던 을지문덕이 웃으며 말하였다.

이에 연태조는 답 대신 손을 들어 단 아래 고승을 불렀다.

“성주! 그대의 전공을 기대하겠소.”

이미 주어진 명이 있었는지, 고승이 고개 숙여 대답을 대신하고는 곧장 말을 몰아 나갔다.

“따르라! 태자 양광 사냥을 시작하겠다!”

이에, 요동성 기병 삼천이 함성을 지르며 요동성주 고승의 뒤를 따르니 그 기세가 드높았다.

고승이 이끈 삼천 기병이 영주성을 빙 돌아 남문 방향으로 나아가자, 연태조가 다시 명을 내렸다.

“상장군! 곧 성문이 열릴 것이오. 영주성 내에 들어가면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삼가하라 군사들에게 명하시오.”

상장군 대건상이 머리 숙여 연태조의 명을 받고는 대모달과 모달들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영주성 내로 진군한다! 저항하는 수나라 군사들의 목을 베고, 투항하는 놈들은 포박하거라! 백성들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해가 없도록 하라! 명을 어길 시 군율로 다스리겠다!”

상장군 대건상이 군을 이끌고 성문을 향해 진격하니, 이에 맞춰 성문이 스르르 열렸다.

단에서 내려온 을지문덕은 충차 옆에 서서 성 안으로 진군하는 고구려 군을 바라보며 만족해 웃었다.

“두드리지 않아도 열리니 이보다 좋은 일이 없구나.”

* * *

위충이 군을 돌려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허무히 영주성을 내어준 태자 양광과 양소는 고작 기병 십여 기의 호위를 받으며 도주를 하였다.

등 뒤 영주성 성벽 위는 이미 고구려 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남문까지 함락된 모양이구려.”

태자 양광이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니, 양소가 바삐 그의 말을 끊었다.

“태자 전하, 지금은 고개를 돌릴 시간이 없사옵니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

이때, 동북 방면에서 흙먼지가 이는 것이 양소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구려 군의 추격이옵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양소의 재촉에 태자 양광이 말잔등을 박차고 앞서 나갔다.

“군사, 위충 총관은 도대체… 왜 이리 늦는 게요.”

양소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곁에서 달리자, 태자 양광이 노기 띤 얼굴로 물었다.

“필경, 고구려 놈들이 총관을 유인해 붙잡아 두고 있는 듯하옵니다. 이놈들의 추격이 거셀 터이니, 쉬지 않고 달려 장성을 넘어야 할 것이옵니다.”

양소의 말에 태자 양광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에도 동북 방면에서 일어난 흙먼지는 빠르게 다가오며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 * *

강이식의 삼천 기병이 천추산 앞에 당도하자, 위충의 추격군도 일 다경 거리로 좁혀와 있었다.

“놈들이 우리를 따라 천추산에 오르면 영주성은 물론이요. 요서 일대가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강이식은 점점 다가오는 위충 군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우리가 산에 오르면 요서가 우리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온다고요? 왜요?”

공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으나, 강이식은 대답 대신 말 머리를 돌려 천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공별도 더는 묻지 않고, 군을 독려하였다.

“모두 대장군을 따라 산에 오른다! 이제 요서는 우리 고구려의 땅이다!”

공별의 외침에 영문도 모른 채 말갈 기병 삼천 기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산에 올랐다.

말을 달려 산 타기를 평지를 달리듯 하는 말갈 기병이었기에, 흐트러짐 없이 진영을 유지한 채 천추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산에 오르는 광경을 말을 달리며 지켜 본 위충 역시 명을 내렸다.

“놈들이 산으로 도망친다. 뒤를 쳐라! 놓쳐선 안 된다!”

매번 산 아래에서 포위를 하다 놓쳤기에, 이젠 산 위에까지 따라 올라 일전을 벌일 작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위충의 요서총관부 정병들은 황야를 내달리며 접전을 벌이는 것에는 뛰어났으나, 말을 몰아 산을 타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전열이 흐트러지고, 뒤쳐지는 군사들이 보이자 위충이 노해 크게 소리쳤다.

“산에 오르면 바로 고구려 놈들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진열을 엄히 지키고 뒤쳐지지 마라! 놈들이 산 위에서 정비할 여유를 줘선 안 된다!”

위충의 독려에 겨우 진열을 갖춘 채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으나, 고구려군과는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총관 이대로 오르다간, 놈들이 진영을 갖춰 공격할 것이옵니다.”

공손향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해 위충의 곁에 붙어 말하였다.

산 위에서 자리를 잡은 군대를 상대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활 재주가 뛰어난 말갈 기병들이 산 위에서 아래로 화살을 퍼부을 경우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위충도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기에,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서둘러 올라야 하는 게요. 놈들에게 시간을 주면 또다시 놓치게 될 게요.”

이에 공손향이 바로 위충이 말을 끊었다.

“총관, 탁현 행군원수부에서도 이미 고구려군의 행적을 파악했을 것이옵니다. 곧 군이 올 터이니, 함께 포위 섬멸하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러나 공을 나누기 싫은 위충으로선 공손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쫓아 왔건만, 이제 와서 그 공을 행군원수부에 넘기겠다는 게요? 아니 될 소리요.”

공손향에게 답한 위충이 다시 큰 소리로 진군을 독력하였다.

“진열을 갖추어 오르라! 고구려 대장군의 목을 취하여 황제 폐하께 바치자!”

* * *

천추산 중턱에 오른 강이식은 말에서 내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나라 깃발이 펄럭이며, 위충이 군을 독려해 오르고 있었다.

“대장군, 우리는 정상까지 오르는 겁니까?”

공별이 다가와 물으니, 강이식이 고개를 저었다.

“정상에는 물이 없다. 이쯤에서 놈들과 한바탕하여 산 아래로 물러나게 한 후, 시원한 계곡 물이나 좀 마시자꾸나.”

강이식은 쉽사리 산을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우리는 이 산에서 오래 있어야 하는 겁니까?”

공별이 궁금해 다시 물으니,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수나라 놈들이 산을 제대로 포위할 때까지는 있어야 할 것이다.”

탁현 행군원수부의 군이 올 때까지 머물겠다는 의미였다.

“뭐, 어찌 되겠지.”

공별이 구시렁거리며 뒤돌아 명하였다.

“여기서 잠시 일전을 벌여 놈들을 산 아래로 내려 보낼 것이다. 진영을 정비하라!”

공별의 명에 말갈 기병들이 일사불란히 움직이며 돌을 옮기고 흙을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다.

“두 식경 정도 남았다. 서둘러라!”

공별이 깃발을 펄럭이며 올라오는 수나라군과의 거리를 재어보며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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