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55화 (155/328)

155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1)

천추산을 앞두고 강이식은 행군 속도를 늦춰 추격해 오는 위충 군을 기다렸다.

“대장군 너무 한가하신 거 아니십니까?”

한가로이 위충 군을 기다리는 강이식에게 공별이 잔소리를 했다.

가노 신분이었으며 지금은 수하 장수인 공별의 이 소리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강이식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곧 입에 거품 물 정도로 산에 올라야 할 터인데 좀 쉬면 안 돼냐?”

강이식이 여유를 부리며 하늘과 땅이 맞닿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흙먼지를 자욱이 일으키며 위충 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요서를 지키는 총관부 정병답게 지칠 대로 지쳤지만 추격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흙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니, 두 식경 거리 쯤 되겠군요.”

공별도 강이식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하였다.

“대장군, 우리가 이정도로 내려왔으면 아마도 이젠 탁현 수의 행군원수부에도 우리의 동향이 전해졌겠지요?”

공별의 물음에 강이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곧 군을 움직일 게야.”

“천추산으로 대군이 몰려들까요?”

공별이 되묻자, 강이식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다. 우리의 수가 적고 위충 군의 수가 많으니, 수의 행군원수부에서 대군을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공을 가로채는 그런 모양새잖아.”

강이식의 대답이 일리가 있다 생각한 공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군은 아니고, 우리가 포위망을 뚫지 못할 정도의 군만 움직여 위충을 돕겠군요.”

“그렇지. 그게 모양새가 좋지. 중원 것들은 모양새를 중시하니 그럴 게야.”

대답을 마친 강이식이 말 머리를 천추산으로 돌리고는 크게 외쳤다.

“서두르지 말고 가자. 놈들이 바짝 붙도록 속도를 유지해서 산으로 끌고 간다.”

강이식의 명을 따라 삼천 기의 기병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천추산으로 향하고 천천히 행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뒤로 거대한 흙먼지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 * *

영주성 동문 성벽 위.

태자 양광에게 서문 수문장이 거란 여인 금옥을 데려왔다.

“네가 아뢸 것이 있다 하였느냐?”

양소가 눈을 부라리며 대뜸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말하거라.”

양소가 태자 양광을 대신하여 명하니, 여인이 조곤조곤 아뢰었다.

“우리 부족 마을을 고구려군이 습격한 연유가 그들의 움직임을 우리가 보았기 때문인 듯하옵니다.”

“움직임을 보았다라… 저들이 보낸 척후대 말고 더 있더냐?”

양광이 관심을 보여 물으니, 여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척후대인지는 알 길이 없사오나, 그 수가 족히 일만은 넘어 보였고, 우리 부족 마을보다 더 서쪽에서 왔사옵니다. 그리고 모두 기병이었습니다.”

“일만?”

태자 양광이 놀라 양소를 돌아보았다.

이에, 양소가 의심의 눈초리로 여인에게 엄히 물었다.

“네가 어찌 수를 셀 수 있었던 것이냐?”

“광야에선 흙먼지의 크기로도 말의 수를 대략 헤아릴 수 있사옵니다.”

여인이 차분히 답하자 양소가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었다.

“네 이름이 금옥이라 하였지? 너는 거란인이 아닌 듯한데… 출신을 밝히거라.”

양소의 물음에 금옥이 당황해 잠시 머뭇거렸다.

이에, 양소가 재차 추궁하려던 순간.

북문을 지키던 장수가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태자 전하, 북문으로 거란인 일천여 명이 몰려오고 있사온데 그 뒤를 고구려 기병 일백여 기가 쫓고 있사옵니다.”

금옥이 도망쳐 오던 서문과 비슷한 상왕이었다.

“군사, 가봅시다.”

태자 양광이 급히 걸음을 옮기자, 양소가 그 뒤를 따르다가 고개 돌려 금옥에게 엄히 명하였다.

“물을 것이 더 있으니, 너도 따라오거라.”

잠시 뒤, 북문 성벽 위에 오른 태자 양광과 양소의 눈에 거란인 일천여 명이 도망쳐 오는 광경이 들어왔다.

이들을 쫓는 고구려 기병 일백여 기를 단기필마로 백발의 노인이 막고 있었다.

백발 노인의 두 자루 곡도가 햇살에 검광을 뿌릴 때마다 고구려 기병들이 말 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대단한데… 허나 오래는 못 버티겠어.”

태자 양광이 백발 노인의 무예를 칭찬하며 혀를 찼다.

그의 말처럼 고구려 기병들이 활을 빼어 겨누기 시작했다.

이때, 고구려 기병 속에서 젊은 장수가 말을 몰아 나오며 손을 들어 올려 사격을 저지했다.

그리고는 한 자루 검을 빼어들고 백발 노인에게 달려드니, 세 자루의 검과 도가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일단 구해 오시오.”

양광이 백발 노인을 살리기 위해 명을 내리니, 이내 곧 북문이 열리고 수나라군이 쏟아져 나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거란인 일천여 명이 뛰어 들어왔다.

“모두 한 곳에 모아 두거라!”

양소가 엄히 명을 내리고는 시선을 성 밖으로 옮겼다.

백발 노인과 접전을 벌이던 고구려 장수가 말 머리를 돌려 도주를 하였고, 그 뒤를 수의 군사들이 쫓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목숨을 건진 백발 노인이 말을 몰아 북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 노인을 데리고 오너라!”

양소의 명에 곧 백발 노인이 성벽 위로 올라와 무릎을 꿇었다.

“너는 누구며, 고구려 기병들은 어찌 너희를 쫓던 게냐?”

양소의 물음에 백발 노인이 머뭇거림 없이 답하였다.

“소인은 북쪽 거란인 마을에서 무예를 가르치는 사범으로 성은 단이요, 이름은 황이옵나이다. 어젯밤 고구려 기병 삼만여 기가 저희 마을 북쪽에서 내려오다가 갑작스레 습격하여 도망쳐 오던 길이었사옵니다.”

“뭐라? 무예를 가르치던 사범? 너는 거란인이 아니로구나.”

양소이 물음에 단황이 바로 답하였다.

“그렇사옵니다. 소인 운남이 고향이옵고 가진 재주라고는 검술뿐이라 재주를 팔아 거란인 마을에서 살고 있었사옵니다.”

“운남? 세상의 끝에서 끝으로 온 것이더냐?”

양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단황이 답하였다.

“젊은 시절 무예만 믿고 주유천하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사옵니다.”

양소는 거란인 여인 금옥도 의심스럽고 이 운남인 단황도 의심스러웠으나, 태자 양광은 이들에게 무척 호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태자 전하, 이들은 믿을 수 없사옵니다. 한곳에 모아 두고 감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양소의 제안에 양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군사, 고구려 군이 이 영주성으로 모여들고 있는 이 와중에 이렇듯 무예가 출중한 이들을 가두어서 쓰겠소?”

이에 양소가 이견을 내려할 때, 거란인 여인 금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제 양부를 죽인 고구려 놈들에게 피의 값을 받을 수 있도록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도 성벽 위에 올라 놈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칼을 휘두르며, 철편을 날리겠나이다.”

비장한 말에 양광이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양소는 여전히 여인을 의심해 고개를 저었다.

“감히 나서지 마라. 태자 전하의 앞이다. 너는 속히 출신이나 밝히거라!”

양소의 꾸중에 금옥이 머리를 조아리며 답하였다.

“어려서 비적 떼에게 부모를 잃고 떠돌아 출신은 소녀도 모르옵니다. 그저 양부의 복수를 하고픈 마음뿐이오니, 믿어주시옵소서.”

차분한 어조에 너무도 정확한 한족 말이었다.

성조로 볼 때, 산동 지역이 금옥의 출신으로 느껴졌다.

‘산동은 고구려 것들이 꽤 많이 들어와 있다. 이년은 믿을 수 없다. 눈매가 차가우면서도 매서워 살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양소는 금옥과 단황을 고구려가 심은 간자로 여기고 있었으나, 태자 양광은 차분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음을 지닌 금옥이 마음에 들었고, 백발 노인 단황의 무예도 듬직하게 여기고 있었다.

“군사, 우리가 지금 고구려 군의 파상공세를 견뎌야 하는데, 이들이 돕겠다고 하니, 이 어찌 갸륵하지 않을 수 있소. 너무 의심만 하지 마시고 잘 다독여 함께 고구려 놈들을 막아 봅시다.”

태자 양광의 말에 양소가 급히 이견을 내었다.

“태자 전하,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이들은 필경 고구려의 술책으로 이 성에 들어온 간자들이옵니다.”

“아니,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 게요?”

“저 들판을 보시옵소서. 고구려군의 시신도 없고, 거란인의 시신도 보이지 않사옵니다. 죽기로 도망쳐 왔다고 하나 정작 우리 눈앞엔 부상자는 있으나, 죽은 이가 없사옵니다.”

양소가 들판을 가리키자, 단황이 벌떡 일어나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가면 원하는 시신 수 없이 있을 터이니, 가서 마음껏 보시오!”

“뭐라? 이놈이!”

양소가 크게 노해 검을 뽑아 들 때, 급히 검은 복색의 사내가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잠시, 검은 복색 사내의 말을 듣던 양소가 손을 들자 사내가 급히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곧 군사들 속으로 사라져 모습을 감추었다.

“태자 전하, 소인이 괜한 의심을 한 듯하옵니다.”

양소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말하니, 태자 양광이 의아해 물었다.

“군사, 뭔가 알아낸 것이오?”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말이 사실인 듯하옵니다. 고구려군 내의 잠입한 이가 정보를 보내왔사온데, 서와 북의 거란인 마을을 습격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양소는 고구려 진영 내에 심어둔 간자를 통해 막리지 연태조가 장수들과 나눈 회의 내용을 전달 받은 모양이었다.

“그것 보시오, 군사. 내가 너무 의심하지 말라 하지 않았소.”

양광이 만족해 양소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금옥과 단황에게 명하였다.

“너희도 우리를 도와 이 성을 지키자꾸나. 너희가 이끌고 온 부족민들도 모두 성벽 위로 오르도록 하라.”

태자 양광이 명하자, 금옥과 단황이 엎드려 명을 받았다.

이에, 양소가 다시 엄히 명을 내렸다.

“너희는 부족민들을 이끌고 동문으로 오른다.”

양소는 간자의 정보를 받아 금옥과 단황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으면서도 아직 의심을 풀지 않아 눈앞에 두고 지켜보려 이렇듯 명한 것이다.

태자 양광과 양소과 동문 성벽으로 다시 이동하니, 금옥과 단황도 자신들의 부족민들을 이끌고 동문 성벽 위에 올랐다.

‘혹시 모르니, 잘 지켜봐야겠구나.’

양소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금옥과 단황을 주시했다.

이때, 고구려의 진영에서 크게 함성이 일더니, 포차와 발석거에서 불붙은 화살과 돌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장의 거인 정란 십여 대가 황야를 짓누르며 움직였다.

그 뒤를 방패를 든 군사들이 따랐으며, 길게 늘어서 사다리를 맨 군사들도 진격을 시작했다.

“다시 시작이구려.”

태자 양광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니, 양소가 손을 치켜 들고 크게 외쳤다.

“놈들의 진격을 막아라! 활을 당겨라!”

* * *

고구려군은 진영 앞에 단을 높이 쌓았는데, 연태조와 을지문덕이 그 위에 올라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단 사부가 태왕 폐하를 모시는 단공의 아우라지요?”

을지문덕이 전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하지요.”

연태조가 담담히 답하였다.

그의 시선은 진격하는 정란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남쪽 운남에서 두 형제가 우리 고구려까지 와서 형은 태왕을 섬기고, 아우는 막리지를 섬기다니, 참으로 대단한 기연이옵니다.”

을지문덕의 말에 연태조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특유의 중저음으로 답하였다.

“젊은 시절 무예를 뽐내기 위해 주유천하하다가 우리 고구려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지요. 아직도 단공의 무예를 능가할 이는 우리 고구려에 없을 겁니다.”

“주유천하라… 풍류가 있어 좋군요.”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총공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전장의 북소리가 크게 울리자 정란에서 불화살이 맹렬히 영주성을 향해 날았고, 머리 위로 방패를 치켜든 군사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혼전을 벌여라! 북을 더욱 크게 쳐라!”

막리지 연태조도 크게 명하니, 전장의 북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합하, 선예와 단황 두 사람이 이끈 말갈 정예들로 이제 영주성 성벽 위는 대혼란에 휩싸일 것이옵니다.”

화살이 빗발치는 영주성을 가리키며 을지문덕이 말하자, 연태조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을지문덕이 말한 선예는 금옥이었고, 단황은 단 사부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이끌고 영주성 안으로 들어간 거란인들은 실상 말갈 정예들이었다.

양소가 성벽 위로 백성들을 올려 수성전을 펼쳤으나, 을지문덕은 이를 이미 예상하여 계책을 내었으니…….

이제 곧 영주성 성벽 위는 무척 혼란스러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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