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0)
새벽이 되자 영주성 안에는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시기 상, 겨울은 멀었건만, 벌써부터 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밤새 동문 위 성벽 위에서 고구려 진영을 살피던 태자 양광의 어깨에 양소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걸쳐 주었다.
“군사는 어쩌시고?”
양광이 묻자, 양소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하였다.
“소인, 이제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입니다. 추워 죽나, 늙어 죽나 매한가지이오니, 태자 전하께선 심려치 마시옵소서.”
양광은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이 늙은 신하를 자신의 부친보다 더 아끼고 존중했기에,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이것은 걸치겠소만, 군사는 오래 오래 무병장수하셔야하오. 그래야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것 아니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 법.
양광은 본능적으로 황제 양견이 후계자로 세워진 자신을 싫어하여 언제든 제거당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살기 위해선, 이 늙은 신하의 지혜와 경험이 필요했다.
양소는 양광의 말을 이해했는지, 희미한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헌데 군사, 고구려 진영이 무척이나 조용하구려. 전장에 나와 늘어지게 잠이라도 자는 것인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위충 총관에게 패해 사라진 고구려 기병 삼만 칠천 기가 분명 어딘가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양소는 패주 중인 강이식의 삼천 기병을 제한 나머지 고구려 기병들이 어딘가에서 영주성을 노리고 있다 확신하였다.
“전하, 검귀라 불리는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고작 삼천 기병만 거느리고 패주 중이라는 것은 분명 그 뒤에 흑막이 있사옵니다. 절대로 승리에 현혹되어 대국을 좁게 보시오면 아니 되옵니다.”
양광이 양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영주총관부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와 아뢰었다.
“전하, 서문 쪽으로 거란인 일천여 명이 도망쳐 오고 있사오며, 그 뒤를 고구려의 기병들이 쫓고 있사옵니다.”
그간, 고구려의 영양 태왕이 거란을 달랜 덕에 이번 전쟁에 수를 돕기 위한 거란의 참여는 없었다.
오직 이 영주성만이, 양소의 의해 성안 거란 백성들이 성벽 위로 동원되어 화살받이가 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고구려군이 거란인들을 쫓고 있다는 말에 양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째서 고구려군이 거란인을 쫓는단 말이냐? 내가 직접 가보겠다.”
양소가 앞장서 걸음을 옮기자, 태자 양광과 장수들이 급히 뒤를 따랐다.
서문 성벽 위에 도착하니,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황야를 거란인으로 추정되는 인마들이 영주성을 향해 내달려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고구려 기병 백여 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쫓아오는데, 그 기세가 무척이나 험악했다.
“구해야 하는 거요?”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고개를 저었다.
“고구려군이 거라인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이것은 성문을 열게 하려는 술책이옵니다.”
“술책?”
양광은 거란인들이 도망쳐 오는 황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거란인들이 뒤를 쫓아오는 고구려 기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며 저항하고 있었다.
“저렇게 서로 싸우지 않소?”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한숨을 내쉬며 답하려던 때, 양광이 탄성을 질렀다.
“아니, 저런!”
양광이 바라보는 곳에 누런 말을 탄 거란 여인이 홀로 긴 철편을 휘두르며 뒤 쫓는 고구려 기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여인의 철편이 허공에 원을 그리고 갈지자를 그릴 때마다 속절없이 고구려 기병들이 말 위에서 떨어져 굴렀다.
이처럼 그녀가 뒤를 지키는 틈에 거란인들은 더욱 속도를 내어 영주성으로 달릴 수 있었다.
“전하 술책이옵니다.”
그러나 양소는 여전히 단호했다.
이와 달리, 태자 양광은 거란 여인을 향해 긴 쇠망치를 쥔 고구려 장수가 말을 달려 나오는 광경에 정신 팔려 말이 없었다.
장정 키도 훌쩍 넘길 긴 쇠망치를 창처럼 휘두르며 말을 몰아 나오는 고구려 장수의 기세도 매우 사나웠지만, 두려움 없이 철편을 휘두르며 맞서는 여인도 무척이나 용맹하였다.
“잘한다!”
성벽 위 수나라군사들도 고구려 장수와 접전을 벌이는 여인을 향해 응원을 보내었다.
아마도 홀로 고구려 기병들에 에워싸여 독전을 벌이는 여인의 모습에 자신들의 처지가 이입된 모양이다.
고구려 기병들은 쇠망치를 휘두르는 장수를 도와 여인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창을 찔러왔으나, 여인은 이 모든 공격들을 모조리 피하며 철편을 절묘히 휘둘러 근처 고구려 기병들을 계속 떨구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철편으로 쇠망치를 휘어감아 고구려 장수의 손에서 빼앗고는 잽싸게 말을 돌려 영주성을 향해 도망쳐 왔다.
이 모습에 태자 양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쳐 명을 내렸다.
“문을 열어라! 거란인들을 맞이하고 고구려 기병들을 향해 화살을 날려라!”
태자 양광의 명이 떨어지자, 양소도 더는 반대하지 못하고 엄히 명하였다.
“당장 기병 오백을 내보내 저 고구려 놈들을 쫓고, 총관부 군사들은 성안으로 들어오는 거라인들을 한곳에 모아라!”
양소의 명에 성문이 열리고 수의 기명 오백이 질주해 나오니, 도망쳐 오던 거란인들이 기뻐 환호를 지르며 성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이때까지도 여인은 뒤쳐져 철편을 휘두르며 고구려 기병 속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고구려 기병들은 수의 기병들이 성안에서 쏟아져 나오자,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말 머리를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수의 기병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온 거란 여인에게 태자 양광과 양소가 다가갔다.
“어찌 도망쳐 온 게냐?”
양소가 매서운 눈초리로 여인을 훑으며 엄히 물었다.
“저희는 이곳에서 서쪽 반나절 거리에 사는 거란 부족민들로 새벽에 약탈 나온 고구려군을 피해 도망쳐 왔습니다.”
여인의 얼굴과 손을 비롯한 전신은 피로 칠갑을 하였으나, 정작 그녀는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였다.
“네 몸의 그 피는 네 것이 아닌 듯한데, 너는 어찌 상한 곳이 없느냐?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양소가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저는 금옥이라 하옵고, 부족장의 양딸이옵니다. 비적 떼에게 부모님을 잃고 외롭게 황야를 떠돌던 저를 부족장이 수양딸로 삼아 키우셨습니다. 오늘 새벽 쳐들어온 고구려군에게 저항하시던 양부께선 그만 목숨을 잃으셨고, 저는 부족민들을 지키며 이곳까지 도망쳐 온 것이옵니다. 어려서부터 양부에게 배운 철편 덕에 몸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차분하면서도 담담히 답하였는데, 그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이었으나, 상당한 미모였다.
여인의 나이는 스물 초중반으로 보이기도 했고, 서른 초중반으로 보이기도 하여 가늠하기 매우 어려웠다.
애써 울음을 참고 엄히 묻는 양소에게 공손히 답하는 여인에게 양광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고단할 터이니, 일단 쉬거라.”
양광의 배려에 여인이 감읍해 엎드려 절을 올리고는 거란인들 속으로 들어갔다.
“먹을 것을 내어 주거라.”
양소가 명을 내리고는 양광에게 나지막이 말하였다.
“답하는 투가 거란인은 아니옵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이오? 내가 보기에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 군사는 어찌 그리 의심하시는 게요? 이 일로 거란을 전쟁에 끌어들일 수 있게 되어 좋지 않소?”
양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양소는 고구려의 술책이라 말하고 싶었으나, 태자 양광의 눈빛에 불편한 기색이 어려 있어 이내 고개 돌려 군사들에게 명하였다.
“먹을 것을 내어주고, 잘 지키고 있거라!”
잠시 뒤, 동문 성벽 위에 다시 자리한 태자 양광과 양소에게 총관부 장수가 다가와 아뢰었다.
“조금 전 성안으로 들어온 거란 여인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어디 감히 태자 전하를 뵙겠다고.”
양소가 콧방귀를 뀌며 눈을 부라리자, 총관부 장수가 괜히 고개 숙여 용서를 구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여인이 고구려군에 대해 아뢸 것이 있다하여 그만…….”
여인에게 호감을 느끼던 양광이 바로 명을 내렸다.
“아뢸 것이라? 그럼 데려 오거라.”
* * *
아침이 되자, 고구려 진영에서도 작전 회의가 열렸다.
마침 요동성에서 을지문덕도 총관부 군사 삼천을 이끌고 와 회의에 참여 했다.
“태왕 폐하를 대신하여 명을 전하겠습니다.”
회의 시작 전, 을지문덕이 연태조에게 먼저 말을 건네었다.
“하시오.”
“막리지는 장수들에게 서두르지 말라 전하라. 전장은 모두 때가 있다 하였으니, 그리 알고 서두르지 말라 전하라.”
을지문덕의 이 말은 막사 안에 모인 장수들 모두가 들을 수 있었기에, 연태조가 애써 대신 전할 필요가 없었다.
연태조가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모두 폐하의 지엄한 명을 들었으니, 명심 하시오.”
이에 상장군 대건상이 장수들을 대신하여 답하였다.
“태왕 폐하의 명을 받사옵니다. 하온데, 합하.”
“상장군은 말하시오.”
“오늘 새벽 영주성 서문이 열리고 수나라 기병들이 나왔사옵니다.”
“그리고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사오나, 우리 고구려 기병 일백여 기를 쫓았다고 하옵니다.”
거란 부족민들을 쫓던 군사들은 상장군 대건상조차 모르는 고구려 기병이었다.
이에 요동성주 고승이 막리지 연태조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내가 보낸 정찰대였소.”
“성주께서요?”
상장군 대건상이 의아해 되물었다.
“그렇소. 영주성의 서와 북으로 정찰대를 보내 거란의 동태를 살피던 중이었소.”
이에, 대모달 태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듣기로는 거란인들을 공격해 쫓았다고 하더이다. 성주께선 어찌 거란을 자극하시옵니까? 그들마저 이 전쟁에 끌어들일 생각이옵니까?”
“들은 것이지 본 것은 아니잖소?”
고승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모달 여법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따지듯 물었다.
“새벽에 소란스러워 제가 나가 직접 보았습니다. 성주, 어쩌시려고 거란을 자극하십니까?”
그러나 요동성주 고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답하였다.
“모달이 그리 높은 직책이오? 어디 감히. 아무튼 조금 소요가 있었나 본데, 그건 그저 전장에서 종종 있는 작은 충돌일 뿐이오. 척후대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해 조기에 싹을 도려낸 것이라 하오. 별 것 아니오.”
“성주!”
대모달 태홍이 큰 소리를 내자, 상장군 대건상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하시게.”
을지문덕은 고승과 장수들의 설전을 지켜보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에 막리지 연태조가 을지문덕에게 나지막이 속삭여 물었다.
“총관, 재미나시오?”
“재미나긴요. 합하, 더 크게 언성이 높아져야 하는데, 점잖은 상장군이 자꾸 말려 큰일이옵니다.”
막리지 연태조가 을지문덕의 속을 들여다보고는 나지막이 답하였다.
“우리 상이가 곧 북에서 내려올 터이니, 곧 시끌벅적해질 것이오. 걱정마시오.”
이때, 장수 한 명이 급히 뛰어 들어와 아뢰었다.
“영주성 북문으로 거란인들이 도망치고 있으며, 그 뒤를 우리 고구려 기병 일백여 기가 쫓고 있다 하옵니다.”
“뭐라?”
상장군 대건상이 놀라 부르짖고는 고승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성주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태왕 폐하께서 서두르지 말라 하시지 않았소?”
이에 요동성주 고승이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답하였다.
“아니, 이건 내가 아니오. 아이고 정말.”
고승의 말에 대건상을 비롯한 장수들이 막리지 연태조와 서부총관 을지문덕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하였소.”
연태조가 차분히 말하자, 대건상을 비롯한 장수들이 화가 치밀어 대들었다.
“합하께선 도대체 저희도 모르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전쟁 이렇게 깜깜이로 진행 되어도 무관한 것입니까?”
“합하, 폐하께서 서두르지 말라 하신 명을 거역하시는 것이옵니까?”
연태조는 장수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을지문덕을 힐끔 보고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북쪽에 척후대를 보낸 것뿐이오. 그게 전부고, 사소한 충돌이 있었나 보구려. 내 엄히 처벌할 것이니, 영주성을 공략할 논의나 시작합시다.”
장수들의 언성이 막사 밖으로까지 울려 퍼진 것을 확인한 을지문덕이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
“태왕 폐하께선 서두르지 말라 명하셨지만, 오늘 우리는 총공세를 펼쳐 영주성을 함락할 것입니다. 오직 이 동문만 공략해서 말이지요.”
을지문덕이 영주성을 그린 지도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에 대건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총관마저 서두르지 말라는 태왕 페하의 명을 거역하실 셈이오?”
이에 을지문덕이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태왕 폐하께서는 서두르지 말라 명하시며, 때가 있는 법이라고도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