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53화 (153/328)

153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9)

영주성 앞에는 막리지 연태조가 이끌고 온 오만여 고구려군이 진을 펼쳤고, 포차와 발석거뿐만 아니라, 나무로 만든 거대한 망루에 수레바퀴를 단 정란까지 도열해 있었다.

정란은 성벽보다 높거나 성벽과 비슷한 높이의 망루로, 수성하는 성벽의 군사들이 날리는 화살을 망루 안에서 피하며 성벽을 넘을 수 있을 뿐더러, 망루 위에서 성벽에 의지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공성 병기다.

수성하는 영주성 수나라군의 입장에선 사다리나 밧줄을 걸어 성벽을 넘는 전략보다 위협적이었다.

또한, 충차와 길게 늘어선 사다리를 맨 고구려군도 보여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이 펼칠 다각적 공성전에 벌써부터 기가 꺾이고 있었다.

“화공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제대로 성벽을 넘을 모양입니다.”

태자 양광이 넓게 진을 펼친 고구려군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공성 오만 군이면, 수성 이만으로도 막을 수 있사옵니다. 더구나 저들은 서쪽과 북쪽, 남쪽 성문은 포위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직 동쪽 성문 앞에만 진을 펼쳤으니, 우리도 동쪽 성문에 집중하면 쉽게 성문을 내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소가 말꼬리를 흐리자, 태자 양광이 이미 예상한 듯 말하였다.

“군사는 사라진 고구려군이 염려 되시는 것이구려. 위충 총관이 돌아오면 오히려 저 고구려 놈들을 앞뒤에서 협공할 수 있으니, 한번 버텨 봅시다.”

“태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목숨을 걸고 수성하며 위충 총관을 기다려야겠지요.”

“…….”

“헌데, 위충 총관이 고구려군을 쫓아 남으로 계속 내려갔으니, 한왕 전하께도 소식이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원군을 요청하지 않고 성을 고구려에게 내어주게 될 경우, 황제 폐하의 진노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소는 태자 양광이 동생 양양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은연중에 지적하였다.

순간, 양광이 눈에 불쾌한 기색을 띄었으나, 금세 표정을 풀고 전군에게 엄히 명하였다.

“결코 고구려군에게 영주성을 내어 줄 수는 없다. 모두 목숨을 다해 성을 지켜라!”

양광은 이 수성전에 따라 자신이 황제가 될 수도 혹은 황제 양견의 화를 사 처벌 받을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죽음으로 영주성을 지켜내고자 했다.

* * *

막리지 연태조가 오직 동쪽 성문 앞에만 진을 펼치자, 상장군 대건상이 대모달 태홍, 모달 여범을 이끌고 다가와 물었다.

“합하, 어찌 동문만 포위하시나이까?”

이에, 연태조가 담담히 답하였다.

“상장군 보시오. 수성하는 수나라군은 이만으로 성벽 위에 있고, 우리는 기어올라야 하는 형편인데, 본래 수성하는 군이 공성하는 군보다 열 배는 유리하다 하지 않소? 허니, 힘을 분산하기보다 한곳을 집중적으로 타격하기 위하여 남, 북, 서문은 버린 것이오.”

“허나, 수의 태자 양광이 전황이 불리해질 시, 서와 남 혹은 북으로 도주할 수도 있지 않사옵니까?”

“우리의 목적은 첫째가 영주성 함락이며, 태자 생포요. 헌데, 우리가 모든 도주로를 막는다면, 태자 양광은 죽음으로 성을 지킬 것이고, 도주할 곳이 있다면 줄행랑을 놓겠지요. 도주하는 태자를 잡는 것이, 목숨 걸고 수성하는 태자를 잡는 것보단 쉬울 것이오.”

연태조가 단호히 답하였으나, 상장군 대건상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허나, 전장에서 최고 지휘권자의 전략을 함부로 비판하여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싶지 않아 말을 아끼었다.

이때, 요동성주 고승이 삼천 기병을 이끌고 도착하니, 연태조가 빙그레 웃었다.

고승이 이끈 기병은 개마무사나 말갈 기병이 아닌 궁기병 일색이었다.

“성주가 오셨으니, 이제 영주성을 공략해 보자!”

막리지 연태조의 명이 떨어지자, 상장군 대건상이 대모달들과 모달들에게 손짓으로 공격 신호를 보냈다.

정란이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고, 발석거와 포차에서 불붙은 돌과 화살을 영주성으로 날렸다.

하얀 연기를 뿜으며 날아가는 돌과 화살 아래에선 길게 일렬로 늘어선 사다리를 맨 고구려군이 성벽을 향해 내달렸고, 충차마저 천천히 성문을 향해 움직였다.

영주성 앞 들판이 고구려군의 함성으로 쩌렁쩌렁 울리자, 기가 질린 수나라군은 성벽에 몸을 숨기기 바빴다.

이때, 양소가 벼락같이 소리쳐 엄히 꾸짖었다.

“우리가 패하면 고구려군의 포로가 되거나, 황제 폐하의 분노를 사 처형당할 것이다. 우리에겐 영주성을 지켜 공을 세우거나, 영주성을 내어주고 죽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무엇을 택할 것이냐! 사나이 대장부, 살아서 공을 세워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

양소의 외침에 성벽에 의지해 몸을 웅크리던 군사들이 하나 둘 일어나, 성벽을 향해 내달려오는 고구려군에게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메고 맹렬히 달려오던 고구려군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지자, 정란에서도 불붙은 화살로 응사했다.

영주성 성벽보다 높은 위치에서 날리는 불화살들은 매우 정확히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정란들을 향해 불화살을 날려라! 정란을 불태워라!”

양소의 외침에 궁수들이 화살에 불을 붙여 날렸으나, 사정거리 밖에 자리한 정란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군사, 고구려 놈들의 활이 우리보다 월등하여, 사정거리가 기니 어찌하면 좋소?”

양광이 하얗게 질려 물으니, 이내 양소가 다시 소리쳐 명을 내렸다.

“정란을 공격하지 말고 가까이 다가오게 하라! 궁수들은 사다리를 맨 고구려군을 노려라! 곧 충차가 성문 아래에 도착할 것이니, 끓는 기름을 준비하라!”

양소의 명에 태자 양광이 의아해 바로 물었다.

“군사, 정란을 공격하지 않으면, 저 정란은 우리를 공격하는데 우린 그저 무대책으로 버텨야 하는 게요?”

십여 대의 정란에서 쉴 새 없이 불화살이 날아드는데도 딱히 공략법이 없음을 양광이 불안해 물은 것이다.

“지금은 공략 방법이 없사옵니다. 허나, 우리가 저 정란을 공격하지 않고 사다리를 맨 고구려군을 잘 막아낸다면, 저 정란도 결국 다가와 성벽에 바짝 붙어 군사를 내려보낼 것입니다. 우린 정란이 가까이 다가올 때 불화살을 날려 불태우면 되옵니다.”

양소의 답변을 들으니, 양광도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수나라군이 사다리를 메고 달려오는 고구려군을 향해 집중적으로 화살을 날리니, 고구려군의 시신이 들판에 널브러졌다.

성벽 위 수나라군도 정란의 공격으로 머리를 들기 어려웠지만, 그 피해는 들판을 내달려오는 고구려군보다 적었다.

“적이 열 죽을 때, 우린 하나가 죽고 있소. 이대로면 수성전은 우리의 승리요!”

양광이 기뻐 가벼운 산수를 하며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아직 기뻐하시기에 이르옵니다.”

양소가 고개를 저으며 말할 때, 마침내 정란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쿠구구구.

거대한 네 바퀴가 황야를 짓누르며 굉음을 내었고, 이를 엄호하기 위하여 포차와 발석거가 연신 불붙은 돌과 거대한 화살을 성벽 위로 쏘아 보내었다.

“태자 전하, 드디어 저 거인들이 옵니다.”

양소가 거대한 정란을 가리키며 말하자, 태자 양광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구려군이 밀고 오는 정란 십여 대를 바라보았다.

이와 함께, 고구려군의 진영에서 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 올린 군사 천여 명이 넓게 퍼져 진군했다.

성벽에 밧줄을 걸고 넘을 정병들로 사다리로 성벽을 넘는 군사들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방패와 갑주로 전신을 단단히 보호하고 환두대도를 찬 이들 군사들은 고구려의 돌격보병이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진영에선 박도로 진을 부수는 돌격대와 도끼병인 부월수들이 전장을 지켜보며 내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성벽 위에 올라 난전을 펼치면 사다리를 멘 고구려군이 일거에 성벽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성벽 위 수나라군은 넓게 퍼져 내달려오는 고구려군을 향해 황급히 화살을 연신 날렸다.

그러나, 방패에 막혀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쿠구구구.

굉음을 내며 정란이 점점 더 성벽과 가까워지며 성벽 위로 계속해 화살을 쏟아 부으니, 이젠 수나라군의 피해가 더 커져만 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와라.”

양소가 눈을 부릅뜨고 정란을 지켜보며 거리를 재었다.

그러나 성벽과 일정 거리를 좁히던 고구려군의 정란이 일시에 진격을 멈추고는 화살만 성벽 위로 쏟아부을 뿐이었다.

“이런 죽일!”

수나라군의 화살로는 닿지 않을 거리에 정확히 멈춰서 아래로 화살을 퍼붓는 정란을 노려보며 양소가 분노해 소리쳤다.

성벽 위에선 수나라군사들의 비명이 빗발쳤다.

그리고 정란의 공세에 겁을 먹은 수나라군사들이 성벽에 의지해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맹렬한 기세로 고구려군이 내달려와 성벽 위로 갈고리를 매단 밧줄을 던져 걸으니, 사다리를 맨 고구려군도 함성을 지르며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누가 나가 저 정란을 불태우겠는가?”

양광이 소리쳐 물으니, 양소가 급히 이견을 내었다.

“아니 되옵니다.”

“아니, 군사. 어찌 그렇소? 저 정란 때문에 머리를 들 수가 없지 않소?”

“지금 성문을 열면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고구려군이 밀고 들어올 수도 있사옵니다. 적이 노리는 바이옵니다.”

“그럼 어쩌면 좋소?”

양광이 난감해 묻자, 양소가 냉정히 명을 내렸다.

“영주성 내의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모두 끌고 와 성벽 위에 올려라!”

양소의 명에 군사들이 바로 움직여 성안 백성들을 끌고 오기 시작하자, 양광이 놀라 물었다.

“저들은 무기가 없지 않소? 돌을 나르고, 끓는 기름을 준비시키는데나 써야 하지 않소?”

양광의 물음에 양소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태자 전하께선 공성전은 능하시오나, 수성전은 경험이 없으실 터이옵니다. 수성전은 성벽 위에 사람이 사라지면 끝이옵니다. 즉, 사람 수를 백성들로 채우면 수성전은 버틸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정란에서 퍼붓는 화살을 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함께 맞게 하여, 군사들의 피해를 줄이자는 계책이었다.

“남자들은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고, 사다리를 밀어내며 밧줄을 끊게 하라! 여자들은 돌멩이를 나르고 노인들은 끓는 기름을 날라라. 성벽 위가 백성들로 가득하게 하라!”

양소가 재차 명을 내리자, 성벽 위는 수나라군사들과 백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정란과 포차, 발석거의 공격에서 쓰러지는 군사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수나라군사들은 자신들이 화살에 쓰러질 위험이 줄어들자, 그제야 머리를 치켜들고 성벽 아래로 화살을 퍼부었다.

성벽 위 곳곳에서 불타는 돌멩이와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백성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오히려 수나라군사들의 기세는 오르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진영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퇴각을 알리는 북소리에 성벽을 넘으려던 고구려군이 진영을 갖추어 퇴각하니, 정란 십여 대도 후퇴를 했다.

“아니, 저놈들이 어찌 돌아가는 게요?”

태자 양광이 의아해 물었다.

“피해를 줄여 오만 군사를 최대한 보전하려는 의도겠지요. 우리 영주성 공략 다음엔, 저들도 한왕 전하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니, 당연한 일이옵니다.”

양소가 담담히 답하며, 물러나는 고구려군의 정란을 응시하였다.

성문 근처까지 왔던 충차도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하니, 고구려군의 피해도 생각보다 커 보이진 않았다.

“내일은 영주성의 모든 백성들을 성벽 위로 올려 막아야겠사옵니다.”

양소의 제안에 양광이 놀라 바로 물었다.

“이 좁은 성벽에 어찌 모든 백성들이 다 올라온단 말이오?”

“아래에 대기시킨 후, 쓰러진 백성을 대신하여 올려 보내면 되옵니다.”

양소가 너무도 차분히 답하자, 양광이 오히려 놀라 다시 물었다.

“순서대로 죽게 하겠단 말이시오?”

“그렇사옵니다. 수성전이 유리한 것은 성벽이 보호하는 이점도 있지만, 백성들을 방패로 세울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옵니다. 결국, 공성과 수성은 모두 수적 싸움이지요. 고구려군도 이를 알고 일단 군을 물린 것입니다. 우리보다 자신들의 군사가 덜 죽도록 말이지요.”

“허면, 오늘은 더는 고구려군이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란 말이오?”

“그거야 확신할 수는 없사오나, 우리가 영주성 백성들을 성벽 위로 올린 것을 봤으니, 다시 전략을 세워 내일 오지 않겠습니까?”

양소가 어느덧 붉은 빛을 띄기 시작한 태양을 가리켰다.

“야습으로 성벽을 오르는 것은 매우 좋은 전략이오나, 이렇게 성벽 위에 사람이 가득하니,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광도 방패로 세운 영주성 백성들이 수나라군사들 대신 불침번까지 설 터이니, 양소의 장담처럼 야습이 쉽지는 않을 듯해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