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8)
구릉 위에서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방향을 정한 강이식의 삼천 말갈 기병은 말 위에서 말린 고기를 뜯으며 질주를 계속 이어나갔다.
“대장군, 저놈들이 늦게 쫓아오는군요.”
공별이 강이식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말하였다.
“속도 좀 늦춰라. 놈들이 뒤쳐지면 쓰나.”
강이식의 명을 받아 공별이 당주들을 불러 속도를 늦추게 하였다.
“아무래도 보급을 실은 수레까지 끌고 오며, 보병까지 섞인 터라 놈들의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시겠습니까?”
공별의 물음에 강이식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멀리 떨어진 산을 가리켰다.
크게 높지는 않았지만, 제법 나무가 우거진 듯 검푸르게 보였다.
“산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자.”
반나절을 더 달려 산 아래에 도착하니, 삼천 기병이 산에 올라 진영을 갖출 만큼 제법 산세가 좋아 보였다.
더구나, 사방이 탁 트인 광야에 우뚝 선 산이었기에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의 지세였다.
“을지문덕이 말한 곳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이 산도 제법 산세가 좋으니, 하룻밤 쉬며 수나라 놈들을 기다리도록 하자.”
강이식이 선두에서 말을 몰아 산에 오르니, 말갈 기병 삼천 기들도 일사불란히 따라 올랐다.
고구려군이 산에 올라 이미 진영을 갖춘 뒤에도 반나절이나 더 지난 깊은 밤이 되어서야, 위충이 이끈 수나라군이 산 아래에 도착하였다.
양현감이 이끄는 보병은 아직 도착하려면 멀어 식사도 제때 못한 수나라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영을 갖추라.”
위충이 못마땅히 여겨 명을 내리니, 부장들이 바삐 움직이며 지친 군사들을 독려해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양현감이 도착해야 허기를 면하겠군요.”
공손향이 위충에게 지친 군사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목숨이 오고가는 전장에서 고작 한 끼 못 챙겼다하여 대수겠소?”
분명 패주하는 고구려군의 뒤를 쫓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오히려 자신들의 군사들이 더 지치는 것 같아 위충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양현감이 수레를 끌고 도착하니, 그제서야 수나라 군의 진영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었다.
산 위에서 연기를 내려다보던 강이식이 껄껄껄 웃었다.
“밤새 굶고 이제 밥 먹으니, 체하겠다. 천천히들 먹거라. 하하하.”
이때 공별이 다가와 말린 고기를 찢어 강이식에게 건네며 말하였다.
“장군, 아침 드십시오. 고기입니다. 고기. 어제도 고기. 오늘도 고기. 내일도 고기. 우리 군사들이 매일 고기라고 아주 좋아들 합니다.”
“그렇게들 좋아하냐? 나도 전장에서 씹는 이 말린 고기 맛에 여지껏 말 달리며 싸우는 거네.”
강이식도 말린 고기를 우걱우걱 씹으며 씨익 웃었다.
“하온데, 우리가 지닌 말린 고기는 열흘 치 정도인데… 그 뒤는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약탈이라도 하며 남으로 계속 내려가야 하는 겁니까?”
고구려의 기병들과 말갈 기병들은 전장에 나설 때, 따로 보급을 두지 않고, 말안장에 열흘 치 정도 분량의 말린 고기를 깔고 출정하였다.
이번 출정에도 마찬가지로 열흘 치 정도 분량의 말린 고기를 말안장에 깔고 출정하였으니, 겨울이 올 때까지 한없이 남으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공별이 걱정할 만도 했다.
“걱정 말거라. 보급이 필요 없는 군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뿐만 아니라, 상장군 주용과 대모달 흑비걸도 지원해 줄 것이야.”
“보급이 필요 없는 군대라니요? 우리 고구려에 그런 군대가 있사옵니까?”
공별이 의아해 물었다.
“저 북쪽에서 이미 내려오고 있을 걸세.”
“그러니, 그 보급도 필요 없는 군대가 대체 어디 군대이옵니까?”
“검신 온달 아우가 이끄는 북방 초원의 기마 전사들이라네. 양과 소까지 끌고 부족 전체가 통째로 내려오니, 보급이 필요가 없지. 암.”
강이식이 온달을 언급하자, 공별이 놀라 되물었다.
“아니, 위장군은 신성에서 요양 중이시지 않습니까?”
“요양은 개뿔.”
강이식이 짧게 답하고는 산 아래를 가리키며 명하였다.
“저것들이 밥 처먹으면 곧 산에 오를 것이니, 우리는 산을 내려갈 채비나 해라.”
* * *
영주성의 태자 양광과 양소는 위충이 보낸 전령으로 승전보를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위충 총관이 계속 고구려군을 몰아가나 봅니다. 고구려 대장군의 무용이 대단하다 소문이 자자하더만, 실상은 별거 아닌 듯하오.”
양광이 흐뭇해 말하자, 양소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벌써 이틀거리나 이 영주성과 멀어지고 있사옵니다. 전령을 보내 군을 물리시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어찌 연승을 거두는 군을 물리란 말이오? 양현감이 보급도 충분히 가져갔으니, 걱정할 것도 없지 않소?”
“아니옵니다, 전하. 아직 적의 본진이 요동성에 있사온데, 위충 총관이 이곳을 비우는 것은 심히 위험한 일이옵니다. 서둘러 군을 돌리라 명하시옵고, 한왕 전하에게도 전령을 보내, 속히 출정을 요청하셔야 하옵니다.”
양소가 한왕을 언급하자, 양광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양이가 행군원수가 되어 대군을 이끌고, 나는 고작 이 영주성이나 지키는 터에 도움마저 청한다면, 내 체면이 어찌되고 폐하께서는 나를 얼마나 한심히 여기겠소? 아니 될 소리요.”
“하오면, 위충 총관의 회군이라도 명하십시오.”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고작 삼천 기만 이끌고 도주 중이라는데, 이를 총관이 사로잡는다면 얼마나 공이 크겠소? 곧 뭔 수가 날 것이고, 설령 고구려의 본진이 이 영주성으로 쳐들어온다한들, 버티며 총관의 회군을 기다려 앞뒤에서 적을 포위해 공략하면 되지 않소? 군사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평소 자신의 의견을 잘 따르던 양광이 오늘따라 이견을 내며 주장을 펼치니, 양소는 그저 한숨만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태자가 폐하의 눈치를 살피어, 공을 탐하는구나. 충분히 이해는 가나, 전장에선 실로 위험한 일이다.’
양소가 이런 생각을 하던 때, 전령이 급히 들어와 급보를 아뢰었다.
“고구려 군이 요하를 건너고 있다하옵니다.”
드디어 요동성의 본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이라? 그래. 병력은 어찌 되느냐?”
양소가 급히 물으니, 전령이 숨을 고르며 답하였다.
“기병, 보병 도합 오만이라 하오며, 공성병기마저 끌고 도하를 하였사옵니다.”
“오만이라…….”
양소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니, 태자 양광이 양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많은 수요?”
“많은 수이오나, 수성하는 우리로선 못 막을 수도 아니옵니다.”
영주성 내에선 아직 이만의 군사가 있으니, 막을 수 있다는 말이었으나, 양소의 표정은 무척 굳어 있었다.
“허면, 군사의 안색이 왜 그리 어둡소?”
“사라진 고구려군 때문이옵니다.”
“사라진 고구려군?”
“그렇사옵니다. 위충 총관이 격파해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한 개마무사 일만 기와, 말갈 기병 사만칠천 기가 어디 있는지 염려스러워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양소의 말에 양광도 그제야 위충이 쫓는 강이식의 고구려군은 고작 삼천 기란 것을 떠올렸다.
“아뿔싸! 놈들이 총관을 유인하고 우리 영주를 노리는 것이로다! 서둘러 위충 총관을 회군시켜야겠소!”
양광의 외침에 양소가 바로 말을 받았다.
“한왕 전하에게도 전령을 보내어 출정을 요청하셔야하옵니다.”
“그건 아니 될 소리요! 군사는 위충 총관을 서둘러 회군시키고, 수성할 준비를 마련하시구려.”
양광이 양소에게 명을 내리고는 영주 총관의 장수들을 소집해 수성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 * *
허기를 채운 수나라 진영이 부산스러워지고 있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강이식이 공별과 황우를 불러 땅에 그림을 그리며 말하였다.
“대충 여기가 우리 위치고, 다음 위치는 이곳이어야 하는데, 거리가 반나절 거리다. 저놈들이 배도 채웠겠다. 우리를 잡으러 이제 곧 산에 오를 것이니, 끌고 이곳까지 가야 한다.”
출정 후, 처음으로 강이식이 정확한 목표 지점을 언급하자, 공별이 의아해 물었다.
“대장군, 여기는 천추산 아닙니까? 산은 높고 험하지만, 사통팔달로 길이 뚫려 사방에서 적이 올라올 수 있는 곳이온데, 진을 꾸리기 위험하지 않습니까?”
“산이 크고 넓어 위충 군의 군사만으로는 모든 길을 막지 못하니 염려할 것은 없다. 우리가 천추산에 단단히 진영을 꾸리면, 수나라 입장에선 탁현과의 연결로 하나가 끊어지는 것이니, 우리를 잡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산에 오르려 할 것이다. 아주 딱 좋은 곳이야.”
강이식이 단호히 말하던 그 순간.
산 아래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올라오는군. 대충 맞서 싸우다가 후퇴한다. 목적지는 이곳이니, 당주들에게 알려 뿔뿔이 흩어진 후 합류하라 전하게.”
강이식이 말을 마치니, 공별과 황우가 바로 당주들을 불러 명을 내렸다.
배를 채운 수나라 군은 기세 좋게 산을 올랐으나, 산세가 험해 이내 곧 기병들은 말에서 내려 산을 올라야 했다.
양현감은 창병과 궁병, 부월수만 위충에게 딸려 올려 보내고, 자신은 중장보병을 이끌고 수레들을 지켰다.
아침이 되어 오르기 시작해 해가 머리 위에 오를 때쯤 산 위에선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산위에 펄럭이는 수나라 기를 응시하며 양현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충의 수나라 군이 산을 점령한 모양이었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위충이 군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붙잡힌 말갈 기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총관, 승리를 감축 드리옵니다.”
양현감이 허리 숙여 예를 올리자, 위충이 손을 내저었다.
“승리는 승리인데, 또 그놈을 놓쳤소이다. 영 찜찜하네.”
계속해 이기고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에 위충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때, 공손향이 말을 몰아오더니, 소리쳤다.
“강이식이 천추산으로 도주한 것 같사옵니다.”
“뭐라? 사실이오? 천추산이라면…….”
위충이 놀라 소리쳐 물으며 바로 말에 올랐다.
“서두릅시다. 놈들이 그곳에 진영을 꾸리고 터를 잡으면, 영주성과 탁현 행군원수부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오.”
위충의 재촉에 수나라군은 이제 막 산에서 내려와 지친 말을 몰아 천추산으로 향해야 했고, 양현감도 보급을 이끌고 뒤를 따라야 했다.
강이식에게서 낭아봉을 빼앗아 쥐고 다니느라 야수도 지쳐 양현감이 이끄는 보급 수레에 올라 있었다.
“점점 영주성과 멀어지고 있구나.”
왠지 모를 불안감에 양현감이 중얼거리자, 야수가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 그게 문제요?”
야수의 물음에 양현감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였다.
“문제지요. 우리가 승리를 거두고 있으나, 정작 적은 피해도 별로 없을 뿐더러 우리 군만 나뉘어 힘이 분산되고 있지 않습니까.”
야수도 듣고 보니, 양현감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서, 설마. 놈들이. 유, 유인책을 편다고. 생각하는 게요?”
야수의 물음에 양현감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 북쪽에서 수나라 기병 한 기가 급히 말을 몰아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영주성에서 보내온 전령이 분명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려.”
양현감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전령이 전한 내용 또한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고구려 군이 요하를 넘어 영주성으로 오고 있습니다. 총관께 아뢰어 속히 회군해야 합니다.”
양광이 보낸 서찰을 읽은 양현감이 야수를 바라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위충과 공손향이 이끈 기병들은 천추산 인근으로 내달리고 있기에, 그들에게 전황을 알리려면 오늘 밤 늦게나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천추산으로 가야겠습니다.”
양현감이 야수에게 말하고는 전령에게 말로 전황을 보고하라 명하였다.
“급하니, 서찰은 따로 올리지 않겠다. 너는 돌아가 태자 전하께 아뢰거라. 위충 총관이 천추산으로 이동 중이라 오늘 밤 늦게나 명을 전할 수 있으니, 회군을 시작하면 사흘 뒤에나 영주성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올리거라.”
양현감은 마음 같아선 자신만이라도 군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회군하고 싶었으나, 보급이 끊긴 위충 군이 위태로울 것도 고려해야 했다.
“서둘러 천추산으로 갑시다.”
양현감이 야수에게 말하고는 군을 독려하여 천추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