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6)
강이식은 맹렬히 돌진해 오는 야수를 향해 말을 몰아 나오며, 나름 반기듯 소리쳤다.
“이놈! 참 오랜만이로구나. 네놈 주인이 바뀐 게냐? 이젠 우문도웅은 섬기지 않는 것이냐?”
야수는 강이식의 물음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몸을 날려 허공을 밟듯 거리를 좁히더니, 두 자루의 박도를 동시에 힘껏 내리쳤다.
깡!
강이식의 낭아봉이 두 자루의 박도를 막아내며 쇳소리를 일으켰다.
강한 충격에 의지할 곳 없이 허공에 떠 있던 야수의 몸이 솟아올랐다.
이때를 노려 강이식이 야수의 허리를 노리고 낭아봉을 휘두르니, 야수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는 강이식의 머리를 타고 넘어가 말 잔등을 밟고 다시 몸을 비틀며 솟구쳤다.
허공에 뜬 야수의 눈이 매섭게 빛나며 등을 보인 강이식을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등 뒤에서 강한 살기를 느낀 강이식이 급히 상체를 돌리며 힘껏 낭아봉을 내지르니, 정확히 야수의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야수는 급히 박도를 거두고 몸을 웅크려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강이식의 낭아봉을 사뿐히 밟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 도약하며 다시 강이식의 머리와 허리를 노리며 박도로 베어갔다.
위와 아래를 동시에 지켜야 하는 강이식으로선 급히 박도를 거둬들여 야수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이때까지도 야수는 여전히 허공에 몸이 뜬 상태였고, 강이식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상대하고 있었다.
강이식이 등을 돌려 야수의 공격을 막는 틈을 노려, 공손향이 한 대의 화살을 날리니, 매우 빠르고 정확하였다.
그러나, 야수의 맹렬한 공격에 몸을 돌리지 못한 강이식이 오른손을 뻗어 날아드는 화살을 낚아채니, 신기에 가까운 이 재주에 고구려군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허나, 강이식의 집중이 흐트러진 이 순간.
전력을 다한 야수의 일격이 머리를 노렸고, 강이식은 급하게 왼손만으로 낭아봉을 치켜 올려 머리를 지켰다.
깡!
불꽃이 일며 귀청을 찢는 쇳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강이식의 낭아봉이 떠오르더니, 묵직한 소리를 내며 땅에 박혔다.
푹!
야수의 일격에 강이식이 낭아봉을 놓친 것이다.
오른손에 고작 화살 한 대만 쥔 강이식이 놀라 멍한 눈빛으로 야수를 올려다보았고, 야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이식의 머리를 노려 박도를 내리쳤다.
“대장군!”
상장군 주용과 화진이 놀라 부르짖었고, 강이식의 부장들이 말을 몰아 나왔다.
그러나, 야수의 박도에 고스란히 머리를 내어줄 것 같았던 강이식이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하며 오른손에 쥔 화살을 힘껏 날렸다.
공허히 허공을 벤 야수가 허공에서 휘청이다가 강이식이 날린 화살을 박도로 쳐내며 그 탄력으로 뒤로 날아가 땅에 사뿐히 내려섰다.
야수는 발끝에 강이식의 낭아봉이 느껴지자, 왼손의 박도를 허리춤에 차고 발로 툭 차 들어 올리더니 왼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는 하늘 높이 강이식의 낭아봉을 치켜 들고는 맹수처럼 포효하였다.
“크으아아악!”
야수의 포효에 강이식을 구하러 오던 부장들의 말이 발굽을 땅에 박듯 뚝 멈춰 섰고, 위충 군에서는 기뻐 함성이 울렸다.
“야수의 승리다! 몰아쳐라!”
위충이 기뻐 크게 소리쳐 명을 내리니, 삼만 기병이 밀물처럼 고구려 군을 향해 밀려들었다.
기세 오른 위충 군에 비해 대장군 강이식이 낭아봉을 뺏긴 것에 고구려군은 망연자실해 공격도 퇴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빈손인 강이식을 노려 야수가 달려드니, 천하의 강이식도 적수공권으로는 야수를 대적할 수 없어 급히 말을 몰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일단 군을 물려 재정비한다! 퇴각하라!”
강이식의 외침에 말갈 기병 오만 기가 일사분란하게 퇴각하였고, 서쪽에 자리하던 개마무사 일만 기도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야수는 도주하는 강이식을 쫓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낭아봉의 무게가 상당하여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그의 곁으로 위충의 삼만 기병이 스쳐 지나며 고구려군을 쫓았다.
“수고했다, 야수.”
공손향이 말을 몰아 야수의 곁에 서서 칭찬하였다.
“이거. 너무 무거워. 아까 들어… 올리다가. 어, 어깨 빠질 뻔… 했어요.”
왼쪽 어깨가 축 쳐져 있었으나, 야수는 아직도 낭아봉을 놓지 않고 있었다.
“좋은 전리품이다. 잘 간직하자.”
공손향이 빙긋 웃으며 시선에서 멀어져 가는 위충 군으로 옮겼다.
남쪽으로 아군과 적군 팔만 기가 쫓고 쫓기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총관이 기세 올랐군. 우리도 추격에 가세하자.”
자신의 말에 야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손향이 손을 들어 사병 일천 기를 몰아 나가기 시작했고, 야수도 힘을 내어 그 뒤를 쫓았다.
그러나, 점점 낭아봉의 무게에 다리가 지쳐가더니, 끝내는 한 발도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이, 이런 무게를… 그 고구려 놈은… 매, 매일… 쥐고 다녔던… 것인가?”
황야에 홀로 우뚝 선 야수가 어처구니없어 할 때, 급히 군을 몰아온 양현감이 그를 불렀다.
“야수 대인! 수고하셨소. 이 수레에 오르시오.”
야수가 돌아보니, 창병과 중장보병, 궁병 등 다양한 병종들로 구성된 군을 이끌고 양현감이 달려왔는데, 행렬 속엔 소가 끄는 수레까지 있었다.
* * *
오전에 시작한 추격전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멈추었다.
위충 군은 광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구릉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고, 뒤늦게 합류한 공손향이 위충에게 다가와 물었다.
“멀리도 왔군요. 저 작은 구릉 위에 고구려 놈들이 있는 겁니까?”
“전부는 아니요. 놈들이 제 살 길 찾아, 뿔뿔이 흩어지는 통에… 강이식만 쫓다 보니, 그놈이 대략 삼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저 구릉 위로 올라갔소이다.”
“삼천 기라… 나머진 죄다 흩어진 건가요?”
“그런 셈이오.”
“고작 삼천 기인데, 단숨에 치고 올라가 섬멸하시지요.”
공손향의 제안에 위충이 고개를 저었다.
“해가 지고 있소. 이미 우리의 대승인데, 행여 실수할 수도 있으니, 에워싸고 내일 날 밝으면 공격합시다.”
위충의 말도 일리가 있어 공손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제는 보급이었다.
구릉에 오른 고구려군도 보급이 끊겼겠지만, 위충 군 역시 보급이 끊겨, 저녁부터 굶어야 했다.
이때, 양현감이 야수와 함께 군을 이끌고 도착하는데, 소가 끄는 수레에 보급품이 실려 있었다.
“양 장군! 어찌 알고 식량까지 싣고 온 게요? 참 잘하셨소이다.”
위충이 기뻐 입이 귀에 걸리며 반겼다.
이에 비해 양현감은 차분히 손을 모아 말하였다.
“장군이라니, 가당치도 않사옵니다. 소인은 그저 부친을 도와 태자 전하를 모시는 소졸일 뿐이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군사 일만을 내주셨으니, 어찌 장군이 아닐 수 있소? 너무 사양치 마시구려. 이제 저 구릉 위 고구려 대장군만 잡는다면, 더한 지위도 얻을 수 있을 게요. 우리 함께 내일 날 밝으면 공을 세웁시다.”
“총관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하온데, 영주의 태자 전하께서도 전황을 궁금히 여기실 터이오니, 전령을 보내야겠사옵니다.”
“그게 좋겠소.”
위충은 양현감이 가져온 식량 덕에 한시름 덜어 마음이 무척이나 느긋해졌다.
* * *
해 저문 들판을 내려다보며, 강이식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시야엔 횃불을 환하게 밝힌 수나라 진영이 들어왔으나,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저것들 밥 짓네.”
강이식이 중얼거리자, 곁을 지키던 부장 공별이 말린 고기를 찢어 강이식에게 건네며 답하였다.
“기병이 기동력 떨어지게 식량을 끌고 다니며 싸우다니, 특이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강이식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별이 건넨 말린 고기를 우걱우걱 씹었다.
“우리도 따신 밥 해 먹으며 싸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공별이 여전히 말린 고기를 씹으며 부러운 듯 밥 짓는 연기를 내고 있는 수나라 진영을 바라보았다.
공짜 별이란 특이한 이름을 지닌 공별은 강이식의 가노 출신이었다.
공별의 부친은 서쪽 바다에서 잡아와 노예로 삼았다 하여, 서해라 불리었는데, 자맥질을 잘하고 물길을 잘 살피는 인물이었다.
강이식은 서해의 재주를 무척 아끼어 부친이 돌아가시자마자,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며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하였으나, 서해는 강이식의 은혜를 갚기 위해 곁을 지켰고, 현재는 고구려의 수군 기지 비사성에 머물고 있었다.
강이식은 서해 못지않게 공별 역시 아끼며 격식 없이 대하였다.
공별이 우걱우걱 말린 고기를 씹으면서도 밥 짓는 연기에 눈을 떼지 못하자, 강이식이 혀를 찼다.
“허허, 남 밥 먹는 거 쳐다보며 군침 흘리는 것 아니다. 근천스러워 보인다.”
공별에게 한 소리하면서도 강이식 역시 부러운 시선으로 수나라 진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체격이 매우 건장한 부장이 다가와 강이식과 공별의 뒤에 서며 물었다.
“대장군, 하온데 작전이 성공한 것이 맞사옵니까?”
강이식도 거한이었으나, 이 사내는 강이식보다 머리 하나는 더 훌쩍 커 강이식의 뒤에서도 수나라 진영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 사내는 공별과 함께 강이식을 따르는 부장으로 황우라 불리었다.
성은 없이, 그저 누런 소라 불리는 이 사내 역시, 가노 출신으로 강이식이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었다.
씨름을 잘하고, 황소보다 힘이 세다 하여 황우라 불리는 맹장이었다.
그러나 공별과 황우 두 사람은 병법과 지략이 부족하였고, 강이식 역시, 무용에 비해 병법과 지략은 크게 뛰어나지 않았다.
황우의 물음에 강이식이 심드렁이 답하였다.
“작전이야 틀림없겠지. 을지문덕이 세운 작전인데, 틀림이 있겠는가?”
답하는 말투가 강이식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시죠?”
공별이 힐끔 쳐다보며 묻자, 강이식이 빙그레 웃었다.
“나야 모르지.”
공별이 어이없어 바로 되물었다.
“우리가 포위된 것 같은데, 살 수는 있는 겁니까?”
“이게 다, 을지문덕 그 친구의 계략이니, 죽기야 하겠는가?”
“내일 저것들이 치고 올라오면 우리 뒈지는 거 아닌가요? 을지 공에게 뭐 잘못한 거 있으세요?”
공별이 재차 묻자, 강이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였다.
“죽으면 쓰나. 황우가 길을 열고 도망쳐야지.”
“아니, 뭔 작전이… 도대체 우린 어디까지 도망가야 하는 건가요? 요서를 침공한다면서 도망 다니면 어쩝니까?”
공별이 작정한 듯 다그쳤으나, 강이식은 여전히 태연했다.
“요서 침공이니, 이왕이면 임유관까지 도망치면 되겠지. 어쨌든 우리 고구려 군이 요서를 종횡무진하니 침공은 맞지 않나?”
“아니, 대장군!”
강이식의 대책 없는 말에 공별이 그만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어허, 공별 이 친구. 어디 감히 대장군께 큰 소리인가? 대장군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일리도 있구먼 그래.”
황우가 공별을 엄히 꾸짖었다.
“일리? 어떤?”
공별이 대뜸 묻자, 황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하였다.
“어, 그게… 이렇게 임유관이든 어디든 우리가 도망치며 군을 끌고 가다가 슬쩍 만리장성도 넘어가면, 중원 침공도 되고… 이렇게 근방을 휘젓고 도망 다니면 요서 침공도 되고 그러는 거 아닌가?”
더 대책 없는 소리에, 공별이 기가 질려 그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기적의 논리로세. 하하하.”
이에 강이식이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아니야. 황우의 말이 정답일세. 을지문덕도 그리 말하였다네.”
“네? 뭐? 뭐요?!”
공별이 턱 빠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강이식을 바라보았으나, 강이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전히 말린 고기를 씹으며 수나라 진영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도 추운데, 따뜻한 밥 먹고 싶네.”
강이식의 중얼거림에 공별도 벌린 입을 다물고 수나라 진영으로 시선을 옮기며 다시 말린 고기를 씹었다.
“뭐, 어쨌든 패하며 요서 일대를 도망 다니는 게 작전이라면 성공은 했군요. 그런데, 곧 겨울인데 반격은 언제 한답니까?”
공별이 차분히 물었으나, 강이식은 여전히 건성으로 답하였다.
“겨울에.”
“네?”
“눈 내리는 겨울에.”
“네?”
“눈 내리는 겨울에 반격한다고. 안 들려?”
겨울이 올 때까지 도망 다니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지만,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반격을 한다는 말에 공별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니, 추운데 싸워요?”
“쟤들도 추울 거잖아. 뭐, 아무튼 곧 겨울이니깐 빨리 도망쳐서 임유관 근처까지 가야 해. 급하다고. 도망치는 것도 바쁜 일이야.”
공별은 놀라 또다시 입을 떡 벌렸고, 황우는 바쁘다는 강이식의 말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참 많이 바쁘겠구먼요. 겨울이 언제 오려나? 아주 쌔가 빠지게 도망 다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