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4)
위충이 출전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향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겠구나.’
위충이 무엇을 바라는지 짐작한 공손향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야수에게 말하였다.
“야수, 우리도 총관을 도와 출전하세.”
그제야 위충이 환하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공녀, 고맙소. 그대와 야수가 도와준다면, 무엇이 두렵겠소이까? 하하하.”
이때, 한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사내가 불쑥 일어나, 태자 양광에게 공손히 말하였다.
“태자 전하, 신 양현감 한 말씀 아뢰겠나이다.”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된 양현감은 양소의 장자로 양소에겐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장자 양현감이 가장 출중하여 세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인품이 바르고 어질어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필 줄 알며, 말을 달리며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나 신궁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 되던 해, 수백 명의 도적 떼가 인근 마을을 약탈한다는 소식을 접한 양현감은 고작 수하 열 명만 이끌고 도적 퇴치에 나선 일이 있었다.
이때 가장 선두에서 말을 달려 도적 떼 속에 들어가니, 망설이던 수하들도 뛰어들어 난전을 펼쳤는데, 양현감은 창이 꺾이고 칼마저 부러졌음에도 적수공권으로 도적 떼의 괴수를 때려 죽여 끝내 도적 떼를 물리쳤었다.
여기에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수하 십여 명 중 아무도 상한 이가 없었는데, 모두 양현감이 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수하들을 지키며 싸운 덕분이었다.
이날 함께했던 수하들은 이 어린 주인을 충심으로 믿고 따르게 되어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태자 양광도 양현감의 바른 성품과 출중한 능력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래, 무엇인가? 어디 말해 보게.”
“총관의 무용과 용병술은 천하의 명성이 자자하오나, 적은 그 수가 많고, 선봉 개마무사는 우리 군이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철기병으로 뛰어난 돌파력을 지녔다고 들었사옵니다.”
양현감의 말처럼 양광의 군은 아직 개마무사를 접한 일이 없었다.
“또한, 중군의 대장군 강이식은 검귀라 불리는 용장이옵고, 그가 이끈 말갈 기병은 들과 산 모두 뛰어난 기동력을 지녔으니, 적의 선봉을 맞아 싸우다가 자칫 지체된다면, 강이식이 이끈 중군에 에워싸일 수도 있사옵니다.”
북방 초원의 민족들이 광활한 대지에 넓게 펼쳐 기사로 적을 물리친다면, 말갈인들은 험준한 산맥을 말을 타고 내달리며, 매복과 협공으로 섬멸전을 펼칠 수 있었다.
양현감은 말갈 기병의 이런 특성을 이미 파악한 듯했다.
그러나, 양광은 양현감의 근심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여?”
“하여, 총관께선 기병을 이끌고 성 앞에서만 적의 선봉을 맞아 싸워 격퇴하시길 감히 아뢰고자 하옵니다.”
“멀리가지 말라?”
“그렇사옵니다.”
양현감은 반드시 매복과 협공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마도 총관 위충의 위신을 배려한 처신이리라.
양현감이 공손히 자세를 바로하고 처분을 기다리자, 양광이 난처하다는 듯 위충을 바라보았다.
“총관, 멀리 가지 않는 게 좋다는데, 어쩌시겠소?”
사실, 태자 양광도 양소와 함께 숫한 전투를 치러 온 인물로 병법에 능하고 용병술이 뛰어났지만, 아랫사람의 의견을 중시하여 결코 함부로 무시하는 일이 없었다.
“심려치 마시옵소서. 반드시 적을 격퇴하고, 허술히 방심하여 역습당하는 일 없도록 하겠나이다.”
위충이 양현감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하자, 양광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양소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에, 양소가 위충과 양현감을 번갈아 살피고는 빙그레 웃으며 아뢰었다.
“총관의 용맹을 믿으십시오. 만일 위험하다 판단되면 호각을 불어 퇴각 명령을 내리시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또한 총관이 승기를 잡았다면 그 여세를 몰아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성 내에서도 따로 준비를 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양소의 말이 타당하다 생각한 양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현감에게 명하였다.
“양현감은 듣거라! 네게 따로 군사 일만을 내어 줄 터이니, 총관을 지원할 채비를 하라.”
“명을 받사옵니다.”
양현감이 머리 숙여 명을 받자, 태자 양광은 위충에게 시선을 옮겨 다시 당부하였다.
“총관은 호각 소리에 맞춰 반드시 퇴각하시오.”
호각 소리에 퇴각하려면, 성에서 멀리 떨어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위충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머리 숙여 명을 받고는 양현감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양광은 결국, 군을 끌고 출병하는 위충의 체면은 살리면서, 양현감의 의견 또한 수렴한 셈이었다.
위충이 말에 오르자, 공손향이 야수와 함께 사병 일천을 이끌고 따라 나서니, 도합 삼만 일천 기의 기병이 성문을 나섰다.
이때 벌써, 고구려의 선봉 흑비걸이 이끈 개마무사 일만 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영주성 앞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성벽 위로 오른 양광과 양소는 말까지 철갑을 두른 고구려 기병들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실로 대단하오. 저 무거운 철갑을 견뎌내려고 얼마나 많이 단련을 했겠소?”
적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양광의 말에 양소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말로만 듣던 고구려의 개마기병을 접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과연 무적이라 불리울 만하옵니다.”
개마무사와 말의 철갑주가 햇살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기까지 하니, 양광은 위충이 이끌고 나간 삼만여 기병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호각을 준비하길 잘한 듯하오.”
고구려 개마무사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용의 비늘처럼 엮어 만든 그들의 갑주가 일정한 박자로 출렁이며 쇳소리를 만들었다.
촥! 촥! 촥!
이 소리는 성 벽 아래에서 대기 중인 양현감에게까지 전해졌다.
양현감은 창병과 중장보병, 궁병, 부월수 등의 다채로운 병종으로 일만여 군사를 구성하였는데, 이들은 개마무사들이 일으키는 쇳소리에 벌써부터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촥! 촥! 촥!
개마무사의 위용은 소리만으로도 적을 압박하고 있었다.
* * *
성 밖으로 나온 위충의 삼만 기병 역시, 개마무사들이 천천히 다가올수록 겁에 질려 그저 침만 삼킬 뿐이었다.
특히나, 이들이 탄 말들은 개마무사들이 일으킨 쇳소리에 벌써부터 흥분해 있었다.
이와는 달리, 공손향의 사병 일천 기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아마도 이미 개마무사를 접한 덕분일 것이다.
“총관, 개마무사를 처음 접하면 다들 놀라기 마련이옵니다. 이것은 전투로 극복해야 하옵니다.”
공손향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위충은 긴장한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현감이 우려한 개마무사가 바로 저런 모습이었구려.”
위충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철기병을 상대로 기가 꺾인 자신의 기병을 몰아 돌진하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놈들이 멈추지 않고 돌진해 오면 우린 갈라져 포위 섬멸할 것이오.”
경기병의 장점과 수적 우위를 이용한 전법이었다.
위충은 개마무사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헌데, 천천히 기동하는 모습이 곧 멈출 듯 하구려.”
위충의 말대로 개마무사들은 대열을 유지한 채 멈춰 섰다.
화살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으나, 개마무사들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저들의 갑주는 화살도 튕겨 내옵니다.”
공손향의 설명에 위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부장을 불렀다.
“누가 인사를 하고 오겠는가?”
위충은 전장에도 예와 격식이 있다고 믿는 위인이었기에, 휘하 장수 손창이 말을 몰아 나왔다.
“총관, 소장이 전장의 예를 가르치고 오겠나이다.”
백마에 올라 긴 창을 비껴든 손창의 모습이 매우 훌륭하여 위충이 만족해 명하였다.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오시게.”
개마무사에게 기가 질린 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위충이 손창을 내보내니, 늠름히 말을 몰아 적진으로 향하는 손창의 모습에 수의 기세가 올라 함성이 울려 퍼졌다.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요하를 넘어 이곳까지 온 것이냐? 군량미가 떨어져 구걸하러 온 게냐?”
손창이 고구려군을 식량이나 구걸하러 온 거지 떼 취급을 하자, 위충의 진영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야유가 쏟아졌다.
이에, 고구려군에서도 한 명의 장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오는데, 긴 창 일색의 개마무사들 속에서 유일하게 방패를 쥐고 있었다.
고구려의 선봉 흑비걸로 커다란 단패에 새겨 그린 치우천왕이 무섭게 손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놈 말 한 번 잘했구나. 그렇다! 식량을 얻으러 왔으니, 삼천만 석만 주거라. 허면, 네놈 목숨은 보전할 수 있을 게다.”
흑비걸의 외침에 고구려군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며, 쌀을 달라 외치기까지 하였다.
“뭐라? 삼천만 석? 이런 미친놈이!”
손창이 야유를 참지 못하고 흑비걸을 향해 말을 달려 나왔다.
손창에 비해 왜소한 흑비걸도 두려운 기색 없이 말을 몰아 나오며 환두대도를 뽑아드는데, 아침 햇살에 찬란히 빛나 무척이나 위용이 넘쳤다.
빠르게 달려온 손창의 창이 흑비걸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자, 흑비걸이 급히 환두대도로 창날을 쳐내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만들었다.
챙!
손창은 흑비걸이 자신의 일격을 가볍게 쳐냈으나, 당황하지 않고 다시 창을 휘둘렀다.
쾅!
이번엔, 흑비걸의 단패가 손창의 창을 막아 내었다.
두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으나, 긴 창의 이점을 살려 손창이 다시 공격하니, 흑비걸은 이번에도 단패로 막으며 말잔등을 발로 차 박차를 가하였다.
“이랏!”
흑비걸의 외침에 주인의 마음을 읽은 말이 힘차게 달려들더니 철판을 씌운 머리를 손창이 탄 말 머리에 확 들이밀었다.
히이잉!
손창의 말이 기겁해 비명을 지르며 앞다리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흑비걸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라붙어 철판을 씌운 머리로 손창의 말 목을 들이 받았다.
히이잉!
심한 타격은 아니었지만, 놀란 말이 비명을 지르며 뒷다리로만 버티다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손창도 말에 깔려 쓰러지자, 이때를 노려 흑비걸이 말을 몰아 나오니, 흑비걸의 말발굽에 손창의 얼굴이 으깨지고 말았다.
“으아아악!”
얼굴이 터져 죽을 때까지 손창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펴지자, 수의 군사들은 기가 질려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아니, 어찌… 단기접전에서 말로 짓밟는단 말인가? 전장의 예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것들 같으니…….”
위충이 분해 장탄식을 하자, 공손향의 곁에서 말도 타지 않고 서 있던 야수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장에선 뭔 수를 쓰든 적을 죽이는 것이 옳다. 말로 밟아 죽이든 칼로 찔러 죽이든 많이 죽이는 것이 최선이다.’
야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위충의 수하 장수 하나가 용감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커다란 도끼를 어깨에 걸친 거한으로 그가 탄 말도 다른 말에 비해 머리가 훌쩍 올라온 거대한 말이었다.
“오! 거정! 그래, 그대가 있었지. 어서 저놈의 버릇을 고쳐 놓으시게.”
떨어진 사기를 올리기 위해 위충이 거정을 반기며 격려하였다.
“저 조그만 놈이 고구려의 선봉 흑비걸이란 놈 같사오니, 목을 잘라 가져오겠나이다.”
듬직한 말을 남기고 거정이 맹렬히 돌진하니, 수의 군사들이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말도 크고 탄 사람도 큰데다가, 휘두르는 도끼마저 거대하니 그 모습이 어찌 용맹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돌진해오는 거정을 향해 흑비걸이 한 대의 화살을 날리는데, 화살은 거정을 맞추지 못하고 그가 탄 말 머리에 꽂히고 말았다.
“저런, 빗나갔군.”
흑비걸의 중얼거림과 함께, 맥없이 무너지듯 거정이 탄 말이 쓰러졌다.
이번에도 흑비걸이 말을 몰아 짓밟으려 달려드니, 거정은 기겁해 도끼도 버리고 줄행랑을 놓았다.
“와하하하!”
뒤를 쫓지 않고 멈춰 선 흑비걸이 꽁무니 빼는 거정을 가리키며 웃으니, 수의 군사들은 더욱 기가 꺾일 뿐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
위충이 추한 몰골로 도망쳐 오는 거정을 가리키며 분통을 터트릴 때, 보다 못한 야수가 두 자루 박도를 뽑아들고 흑비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