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46화 (146/328)

146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2)

고구려는 부채 모양의 국토를 지닌 국가로, 북방의 겨울은 길고 매우 혹독하였다.

하여, 북방의 전쟁은 봄부터 가을까지만 치루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있었다.

평양성의 가을이 한참이면, 벌써 요동성은 두툼한 옷을 입어야 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평양성 내에선 곧 세워질 전시 조정의 가부를 놓고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오늘도 태왕을 모시고 한바탕 치룰 설전을 준비하기 위해 종리소형 동정찬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조의대두형 동금호의 장자로 태왕의 명을 신료들에게 전하고 또한 태왕에게 보고할 사항을 정리해 고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종리소형은 종리부의 소형으로 위로는 종리대형과 종리부의 수장인 종리위두대형을 모셨지만, 이제 고작 스물다섯의 그로선 상당한 고위 관직이었다.

종리부에는 나라 안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하는 종리대형이 있어, 무장을 임명하는 조의부와 함께 군권과 인사권을 지닌 막리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보게,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신료들의 동정을 태왕에게 고하기 위해 바삐 발을 옮기는 동정찬을 조의대형 명림신이 불러 세웠다.

명림신은 명림(明臨) 씨 일족의 젊은 지도자로 동정찬과 동갑내기 벗이지만, 승찬이 매우 빨라 장래가 총망되었다.

“오늘도 태왕 폐하와 신료들의 설전이 예상되니,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하네.”

동정찬은 태왕이 매우 아끼는 측근으로 그 역시도 태왕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하였다.

“오부 귀족들과 신료들에 대한 동정 보고인가?”

명림신의 물음에 동정찬이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하였다.

“허허, 이 친구 나에게도 말 못하는가? 그래, 오늘 설전은 누가 이길 것 같은가? 폐하께서 많이 준비하셨는가?”

놀리듯 묻는 명림신에게 동정찬이 엄히 눈을 부라리며 말하였다.

“목이 성하지 못할 농이로세. 자넨 그 입을 조심해야 계속 승찬할 걸세. 나 가네.”

상급자이자, 벗인 명림신의 어깨를 툭 치며 동정찬이 발을 옮겼다.

“이보게 정찬이 자네, 잠시만 기다리시게.”

오늘 따라, 명림신이 바쁜 동정찬을 계속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시나? 마음이 급하니, 할 말 있거든 빨리 하시게.”

동정찬이 발을 멈추자, 명림신이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북(北) 씨와 사선(似先) 씨가 이번 전시 조정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북(北) 씨와 사선(似先) 씨는 목원의와 우연순이 세상을 떠난 후, 새로 절노부를 장악하기 시작한 일족으로 두 가문 모두 영양 태왕에게 딸을 바쳐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다.

북 씨 여인에게서 먼저 아들이 태어난다면, 사선 씨는 폐족이 될 것이고, 역으로 사선 씨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북 씨 일족은 폐족이 될 처지였다.

그러나 이들 북 씨 일족과 사선 씨 일족의 고심은 전시 조정으로 인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로 변하고 있었다.

전시 조정이 만약 요동에 세워진다면, 태왕은 친히 군을 지휘하기 위해 요동성으로 향할 것이고, 평양성은 태자가 남아 지키게 된다.

허나, 현재 영양 태왕은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하여, 태왕은 이복동생인 건무를 태자로 세워 평양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요동성의 전시 조정을 이끌고자 하고 있었다.

전시 조정은 태왕이 친히 신료들과 군을 이끌고 전장을 지휘하기에, 태왕의 사후를 염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왕후와 후궁을 세운 북 씨와 사선 씨 역시 태왕의 사후가 자신들 일족의 흥망성쇠를 정하기에 심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야, 태자로 세울 후사를 내지 못하였으니, 전시 조정을 반대함은 당연한 일이지. 폐하께서도 이미 아시네.”

동정찬이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명림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속삭였다.

“그들 일족의 존망이 걸린 일이네. 단순히 반대만 하진 않을 걸세. 너무 무리해 전시 조정을 세워선 아니 되네. 부디, 폐하께서 숙고하시도록 잘 전해 주시게. 전쟁보단 수와 화의를 맺어야 하네.”

굳은 표정으로 명림신이 당부하였으나, 동정찬은 평소와 달리 벗과의 대화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래, 잘 알았네. 내 급해서 그러니, 이만 가보겠네. 우리 서로 애쓰세.”

앞만 보고 걸음을 재촉한 동정찬이 태왕의 처소에 서자, 환관이 태왕에게 고하지도 않고 스르르 문을 열어주었다.

태왕의 처소엔 이젠 눈썹까지도 하얗게 센 단공이 홀로 지키고 서 있었다.

“왔는가? 고하시게.”

태왕이 부드러운 미소로 동정찬을 반기며 명하였다.

“일 식경 째, 신료들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기에, 짧게 아뢰겠나이다.”

무엄한 언사였으나, 동정찬의 성격을 익히 아는 태왕이었기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자넨 항시 뭐가 그리 바쁜가? 그래 짧게 말해 보게.”

태왕의 말에 동정찬이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서부총관이 대장군에게 사람을 보내어 막리지의 장자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였사옵니다. 이에, 대장군께선 봄이 아닌, 겨울에 임해관을 넘겠다 하십니다.”

길지 않은 보고였다.

허나, 설명 또한 생략된 보고였다.

잠시, 동정찬을 바라보던 태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그런가? 그리고 다음은?”

설명이 짧아 이해하기 어려웠을 터인데도 태왕은 다음 보고를 명하였다.

“전시 조정은 건무 저하를 비롯한 신료 대부분이 불안해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요동으로 조정을 옮기시게 된 경우, 평양성을 지킬 태자의 안위를 걱정하셔야 하옵니다.”

태자의 안위를 걱정해야 한다는 동정찬의 말 속엔, 정변이 예상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허나, 태왕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히 물었다.

“건무를 비롯한? 건무도 두려워하는가?”

태왕의 물음에 동정찬이 허리 숙여 아뢰었다.

“아뢰겠나이다. 건무 저하께선 ‘태왕 폐하께서 아직 영민하신데, 어찌 자신이 태자에 오를 수 있느냐.’며 아니 될 일이라 하셨나이다.”

“내 동생 건무는 그런 아이다. 그렇기에 맡기고자 하는 것이지. 건무만큼 용맹히 평양성을 지킬 장수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될 소리다. 신료들이 기다린다 하였으니, 가세.”

태왕이 먼저 일어나자, 단공이 앞서 걸었고, 동정찬도 허리를 펴고 태왕의 뒤를 따랐다.

* * *

이미 일 식경이나 태왕을 기다리던 신료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태왕은 이들을 찬찬히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전시 조정이 요동성에 세워지면, 평양성은 태자가 지켜야 할 것이오. 내가 후사가 없으니, 나의 동생 건무가 당연히 태자가 되어 이 평양성을 지켜야 하오. 하여, 서둘러 책봉식을 준비해야 할 것이오.”

영양 태왕의 말에 건무를 비롯한 신료들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폐하, 신 종리위두대형 북장원 아뢰나이다.”

“장인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구려. 어디 국장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젊은 태왕이 미소 지으며 의견을 듣고자 하였다.

“태왕 폐하는 우리 대고구려의 근본이온데, 어찌 친히 군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서려 하시옵니까? 전장은 막리지와 대장군의 지휘만으로도 충분하오니, 폐하께선 이 평양성을 굳건히 지키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장인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던 태왕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장인께서 이 사위 걱정이 심대하시구려. 참 좋은 일이오. 허나,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수가 감히 요하를 넘을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려면, 고구려의 태왕인 내가 바로 요동에 있어야 하오.”

태왕과 고구려의 신료들이 전시 조정을 최전선에 세울 시, 군의 사기가 높은 면도 있으나, 적이 태왕을 노려 전시 조정을 세운 곳을 집중 공격할 위험도 있었다.

태왕은 바로 이런 위험성을 오히려 역으로 노려, 적을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유인책을 사용하고자 했다.

“아니 되옵나이다. 신 태대사자 사선종유 아뢰나이다.”

새로 태대사자에 오른 사선 씨 일족의 수장인 사선종유가 감히 태왕의 앞에서 흰 수염을 매만지며 말하였다.

왕후를 배출한 북 씨 일족의 북원장보다 사선 씨 일족의 세가 더욱 강해 후궁을 배출한 사선종유의 위세가 태왕을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선대 태왕께서 친히 군을 이끌고 전시 조정을 세워 북주 잔당과 돌궐 연합군을 물리치셨으나, 이듬해 명을 달리하셨으니, 태왕께선 이를 가벼이 여기시면 아니 되옵나이다.”

전시 조정을 이끌었던 평원 태왕의 죽음까지 언급하는 그의 언사에 동금호가 흰눈썹을 꿈틀거리며 엄히 꾸짖었다.

“어찌! 태대사자께선 이리도 무엄한 게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무장들을 임명하는 조의부의 수장인 조의두대형인 그는 문신 출신 관료였지만, 적지의 사자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담대하였다.

하여, 무신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다.

조의두대형의 꿈틀거리는 흰눈썹을 사선종유가 비웃듯 코웃음 치며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태왕에게 다시 말하였다.

“폐하, 소국이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일은 합당치 않사옵니다. 지금이라도 수와 화의를 청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수는 내년 봄에 출병할 것이오니, 화의할 시간은 충분하옵니다.”

“장인, 장인께선 화의를 해야 한다 생각하는데, 화의를 하려면 무엇을 바쳐야 할까요?”

영양 태왕이 미소를 담아 물었다.

표정만으로는 태왕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사선종유는 미간을 좁히며 답하였다.

“수의 황제가 보낸 사신에게 감히 무례한 언사를 했던 강이식을 벌하시고, 막리지를 폐한 후, 제가회의로 대대로를 선출하게 하시오면 수의 황제는 태왕 폐하의 진정성을 느껴 화의를 받아들일 것이옵니다.”

“서부총관 을지 공은 벌하지 않고요?”

태왕이 빙그레 웃으며 되 물었다.

태왕의 진심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사선종유가 더욱 미간을 좁히며 다시 아뢰었다.

“서부총관 을지문덕은 본래 강이식의 수하에 있던 자로서, 특별한 공과 재주가 없음에도 강이식이 부총관에 임명하였고, 이에 총관까지 오른 인물이옵니다. 그는 벌할 필요 없이 관직만 박탈하오면 되실 줄로 아뢰나이다.”

명재상 을파소의 후예로 그 재주가 천하를 뒤덮는다며 오부 귀족 모두가 두려워하는 을지문덕을 깎아 내리는 언사에 태왕이 피식 웃었다.

“장인, 수의 황제 양견이 한왕 양양에게 행군원수직을 내리며 말하길, 고구려엔 강이식과 온달, 건무의 무용이 뛰어나니 조심하고, 을지문덕과 연태조의 지략이 뛰어나니, 이들을 더욱 조심하라 했다 들었소. 수의 황제도 두려워하는 을지문덕을 우리 장인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그 기상이 드높아 나도 본을 받아야 할 듯 하외다. 하하하.”

태왕이 웃으며 말없이 서 있는 이복동생을 불렀다.

“건무야, 내 동생 건무야.”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건무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답하였다.

병장기를 들고 말을 타 달리지 않을 땐, 늘 어두운 동생을 바라보며 태왕이 명하였다.

“조의두대형 동금호의 여식이 혼기가 꽉 찼다 들었다. 너는 조의두대형을 장인으로 모실 채비를 함이 좋겠구나. 보라! 내 장인들이 얼마나 든든하지를! 하하하.”

태왕의 호쾌한 웃음에 건무가 머리 숙여 명을 받았다.

“조의두대형 어른께서 소인을 사위로 받아 주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나이다.”

무신들의 신망이 높은 동금호를 건무의 장인으로 정한 태왕이 바로 호령하였다.

“동정찬은 듣거라!”

종리소형 동정찬이 앞으로 나와 명을 받았다.

“하명하시옵소서.”

“건무를 태자로 책봉할 터이니, 조칙을 준비하고 책봉식을 서두르라. 또한, 책봉식 이후 바로 조의두대형의 여식과 혼례도 진행도록 하라!”

동금호에게 조차 의견을 묻지 않고, 혼례를 준비하라 명한 태왕이 신료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전시 조정은 이미 막리지가 요동성에 준비 중이니, 책봉식 이후 다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이미 내려진 명, 궐에는 허명은 없는 법.

젊은 태왕이 이토록 서둘러 결정을 내릴 것이라 예기치 못했던 신료들은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태왕의 명을 받아 신료들에게 전하는 직을 맡은 동정찬만은 눈을 반짝이며 큰 소리로 명을 받았다.

“신, 종리소형 동정찬, 태왕 폐하의 명을 받사옵니다.”

종리위두대형 북원장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의 직속 수하인 종리소형 동정찬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평양성을 지키던 태자가 죽으면… 태자는 다시 세울 수 있다.’

그의 생각처럼 태왕은 젊고, 태자는 죽으면 다시 세우면 그만이었다.

허나, 멀쩡한 사람이 죽으려면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평양성도 요동성만큼, 최전선이 될 수 있겠지. 전장은 어디든 될 수 있는 법이야.’

이미 결심을 굳힌 북원장이 그윽한 시선으로 건무를 바라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하자, 살짝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건무 저하, 잠시나마 태자가 될 수 있어 좋으시겠구려.’

머리를 들어 태왕에게로 시선을 옮긴 북원장은 여전히 미소 짓는 태왕의 모습에 불현듯 의구심이 치솟았다.

“하온데, 폐하. 전쟁은 내년 봄에 치러질 터 이온데, 어찌 겨울도 되기 전에 벌써 요동성에 전시 조정을 세우시나이까?”

“국장, 미리 미리 준비하여 나쁜 일은 없는 법이외다.”

태왕의 답변에도 북원장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미리 미리? 수의 경계만 강화시킬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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