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고구려의 요서 침공 (1)
폐족이 된, 팽무일은 폐허가 된 팽가장으로 향했고, 개소문이는 팽무일의 흔적을 쫓으며 탁현으로 향했다.
그 시각, 목과 손발을 쇠사슬에 묶인 온동은 소가 끄는 수레에 홀로 갇혀 태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이 자신의 세력지로 압송하는 것이리라.
이와 달리 온동의 수레 뒤로, 독고영은 화려히 꾸민 마차 안에 송현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온동처럼 곧 처형될 죄인의 모습이 아니었으나, 눈물로 얼룩진 얼굴에 생기는 없었다.
이 아이들의 사정을 알리 없는 온달은 서부총관부에서 온 장주를 만나고 있었다.
마침 온달은 개소문이를 찾아 영주 인근까지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터였기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총관의 전갈을 가져왔습니다.”
허리 숙여 예를 올린 장주가 본론부터 꺼냈다.
“그렇소? 무엇이오?”
온달이 갑작스레 찾아온 전령을 의아히 바라보며 짧게 물었다.
그의 곁엔 언제나처럼 평강이 함께 했고, 막바우와 경우도 전령이 가져온 소식을 듣기 위해 자리했다.
장주가 막바우와 경우에게 잠시 시선을 두고 머뭇거리자, 눈치 빠른 경우가 막바우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우린 나가세.”
그러나 막바우는 장주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호통을 쳤다.
“아니, 나도 장군이야. 어디 쫄따구가 감히. 말해!”
당황한 경우가 급히 막바우의 입을 막았다.
“이보게 막바우, 온달 장군과 공주님이 계시네. 언성 높이지 말게나.”
“어푸푸. 손 치우게.”
막바우가 머리를 흔들어 경우의 손을 털어냈다.
온달이 이 둘의 소란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장주에게 부드러이 말하였다.
“이 두 분 장군은 나와 한몸이요. 편히 말 하시오.”
온달이 한몸과 같다고까지 말하니, 장주도 더는 막바우와 경우를 경계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팽가장에 비극이 있었습니다.”
“비극?”
온달이 놀라 물었다.
“한왕 양양이 온달 장군을 대적하기 위해, 무림 고수들을 초청하였고, 이들이 팽가장을 급습해 팽 장주가 절명하였습니다.”
“아니, 이런!”
절정의 무공을 지닌 팽무성의 죽음에 온달이 놀라 부르짖더니, 이내 정신을 차려 장주에게 다시 물었다.
“온동과 해진님, 독고선님 그리고 영이는 어찌 되었는지 혹시 아시오? 내가 팽 장주에게 전할 물건이 있어 그들이 지니고 갔는데… 잘 돌아오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어찌, 어찌 그렇소?”
“독고선님과 해진님의 머리는 행군원수부 한왕 양양이 지니고 있고, 몸은 탁현 외곽 야산에 버려졌습니다. 온동과 독고영은 태원유수 이연이 압송해 갔으니, 이 또한 생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주가 차분히 설명하자, 평강이 놀라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막바우가 격분해 소리쳤다.
“뭣? 뭣이라? 그게 사실이오? 이… 쳐 죽일 수나라 놈들이… 감히!”
경우도 손을 바르르 떨며 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온달만 쳐다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듣던 온달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몸과 머리가 따로라니… 어찌… 이런 일이… 동이와 영이를 왜 태원유수가 압송을? 그 어린 것들을?”
“온동이 온달님의 일가인 것을 그들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아이이기에 캐낼 정보가 없다 판단하여 인질로 삼으면 살 수 있겠사오나, 큰 전쟁이라 인질이 필요 없다 생각되면 처형될 것이옵니다.”
장주가 감정을 실지 않고 너무도 담담히 말하자, 온달은 꿈인지 생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장군, 당장 해진님과 독고선님의 시신을 수습하러 갑시다.”
막바우가 성급히 나서자, 장주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해진님의 아우 되시는 해권님께서 이미 탁현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장군께 전할 말씀이 또 하나 있습니다.”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있다는 말에 막바우가 겨우 진정하자, 온달이 다시 물었다.
“그래 또 하나는 무엇이오?”
“연태조의 장자 개소문이가 영주 인근에서 수의 태자를 암습하던 팽가장의 장자를 물리치고, 수의 태자에게 금을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막바우와 경우가 또다시 놀라 소리쳤다.
“뭐? 그놈이 누굴 구해?”
“아니, 그 조그만 도적이 왜 수의 태자를 구해?”
평강도 눈물을 닦고는 멍하니 온달을 바라보았다.
총명한 그녀조차도 의외의 말인 듯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개소문이가 영주에서 수의 태자를 구했다는 말에 온달도 허망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개소문이가… 영주에서, 누구를 구했다는 것이오?”
“수의 태자 양광의 행차를 팽가장의 장자 팽무일이 급습하였다 하옵니다. 하온데, 개소문이가 팽무일에게 사로잡혔던 양광을 구해내고, 팽무일을 쫓아내어 양광이 금을 하사하였다 하옵니다.”
장주가 다시 설명하였으나, 온달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평강을 바라보았다.
겨우 마음을 수습한 평강이, 고개를 갸웃하며 온달을 대신해 물었다.
“개소문이의 무공이 팽무일을 당해내지 못할 터인데… 그 말이 정녕 사실이오?”
“목격한 이가 상당하옵니다.”
장주의 말에 평강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였다.
“그 아이가… 파천신검을 훔친 것이 맞구나. 벌써 익힌 게야.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공주님 말이 맞습니다.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을 익히지 않고서야, 팽무일을 당해내지 못할 터이니, 그 아이가 도적이 맞습니다.”
경우도 이를 갈며 분해 소리쳤다.
“그만 하시게.”
침통한 표정의 온달이 경우의 말을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평강에게 물었다.
“파천신검은 파산신검의 방어 네 초식으로 오류가 있어 실전에선 사용을 금한다 하지 않았소?”
“장군, 공격 여덟 초식과 방어 네 초식으로 구성된 파산신검에서 사용을 금한 것이나, 따로 떼어낸 파천신검은 익혀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듯하옵니다.”
“그렇다면, 고작 방어 초식만으로 팽무일을 물리쳤단 말인데… 방어 초식은 공격 수단이 없지 않소? 어찌 팽무일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이오?”
이 말은 평강분만 아니라, 장주에게도 묻는 말이었다.
장주 역시 스스로 목격한 것이 아니었기에, 들은 대로 전하였다.
“돌멩이를 날렸다고 하옵니다.”
온달과 평강 일행은 이미 온동이 비검술을 발휘해 돌멩이를 날리는 것을 봐왔기에, 그제야 납득해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한 아이로군요.”
평강이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히 말하였다.
경우도 흥분해 온달에게 말하였다.
“이 조그만 도적놈을 잡아 근골을 끊어야겠습니다.”
온달도 분이 치밀었으나, 마음을 다스려 참고는 엄히 말하였다.
“팽무일도 좋은 사람은 아니오. 어떤 연유로 수의 태자 목숨을 구했는지 그 이유를 듣는 것이 순서가 되어야 하오.”
평소라면 결코 온달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평강마저 경우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장군, 팽무일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을 훔쳐 익힌 것은 분명하오며, 또한 수의 태자와 팽무일을 놓고 비교할 시, 고구려의 강적은 필경 수의 태자이온데, 개소문이가 강적을 구했으니, 우리 고구려의 해악임은 분명하옵니다.”
평강의 이 말에 온달도 더는 개소문이를 두둔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공주님 말이 맞습니다. 수의 태자와 팽무일을 놓고 세 살 먹은 아이에게 물어도, 수의 태자 목을 베는 것이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더구나, 팽무일은 팽가장의 참극을 복수하던 중이었으니, 저는 무조건 팽무일의 편입니다. 장군께선 결코 간적의 편을 들으셔선 아니 됩니다.”
막바우가 장황히 말하며 은근히 온달을 꾸짖었다.
막바우의 버릇없는 태도에 익숙한 온달은 묵묵히 비난을 들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개소문이를 팽가장에 부탁하기로 막리지와 약조했거늘,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돌보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 * *
온달이 이처럼 자책하고 있는 그 시각.
비밀리 전시 조정 준비를 위해 요동에 당도한 막리지 연태조에게도 개소문이의 소식이 전해졌다.
가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연태조가 끝내 탄식을 했다.
“정녕, 태자를 구한 아이가 스스로를 갓쉰동이라 했더냐?”
“그렇다하옵니다.”
가람도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이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많은 이의 공통적 이야기는 그 아이가 스스로를 갓쉰동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의도해 악의적 소문을 퍼트리지 않는 한, 사실이 분명했다.
성미 급한 모용상이 참지 못해 가람을 다그쳤다.
“공자는 온달과 함께 계셔야 하는데, 어찌 홀로 영주에 나타났단 말인가? 이는 필경, 온달의 수작이 분명하다. 합하! 온달과 서부총관 을지문덕의 암수이옵니다.”
연태조는 가람을 다그치던 모용상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 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엇을 위해, 암수를 쓰는가?”
연태조의 이 물음에 모용상은 답을 찾지 못하였다.
“큰 전쟁을 앞두고 을지문덕이 고작 내 목숨을 노려 이런 수를 쓸 리 없다. 상이는 경거망동을 삼가하라.”
“하오면, 합하께선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시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공자께서 발군의 기재라 하여도, 어찌 하북의 검술명가 팽가장 장자를 제압하여 수의 태자를 구한단 말입니까? 이는 필경, 합하를 수와 엮어 내치려는 암수이옵니다.”
“그들은 내 머리를 취해 얻을 것이 없다하지 않았느냐!”
모용상에게 버럭 호통을 내지른 연태조가 모용설에게 시선을 옮겨 물었다.
“나는 올해 죽느냐?”
연태조의 물음에 모용설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합하께선 올해도 무탈하시옵고, 내년에도 무탈하시옵니다. 하오나.”
“무엇이냐?”
연태조가 답답해 재촉하였다.
모용설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상이는 내년을 넘기지 못하옵니다.”
“뭐라?”
연태조가 놀라 모용상을 바라보니, 그 역시 크게 놀라 멍하니 누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합하, 우리 상이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천수를 누리는 듯 하였습니다. 허나, 이곳에 당도해 가람이 전하는 말을 들은 후엔 그 운명이 변하였사옵니다.”
“누, 누님. 제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 겁니까?”
모용상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타인의 죽음을 보는 여인 모용설의 말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모양이다.
“상이, 너는 임유관 인근에서 창을 든 사내에게 죽는다.”
모용설이 눈을 감은 채 답하자, 모용상이 더욱 놀라 재차 물었다.
“창을 든 사내? 그게 누구이옵니까?”
모용설은 마치 모용상이 죽는 현장에 있는 듯 마치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답하였다.
“온달의 수하 장수, 막바우다.”
“막, 막바우? 일장산의 도살자 그자가? 제가 고작 그자에게 죽는단 말입니까? 하하하. 가당치도 않습니다. 하하하.”
산을 무너뜨려 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을 몰살한 막바우의 악명은 이미 고구려 전체에 퍼진 상태였다.
그러나 막바우와 수차례 마주한 바 있는 모용상은 자신의 무용이 막바우보다 위라 자부하고 있었기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허허 웃었다.
허나, 연태조와 모용설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막바우가 상이를 해한다면, 온달의 지시란 말인가?”
연태조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모용설을 바라보았으나, 타인의 죽음을 볼 수 있지만, 그 연유까지는 알 수 없는 그녀였기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운명은 변하는 법이다. 상이는 괘념치 말라. 나를 따르며 충성한 너는 내게 자식과 같고 아우와 같다. 너를 살리기 위해선 온달의 수하 막바우쯤은 언제든 목을 벨 수 있느니라.”
연태조가 단호히 말하자, 모용설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기운에 연태조가 바로 물었다.
“무엇이냐? 나도 이 말 때문에 죽는 것이더냐?”
“그, 그렇사옵니다.”
모용설이 조심스럽게 답하자, 모두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누구냐? 누가 나를 죽이더냐?”
“온달 군 제일의 명궁, 경우의 살이옵니다.”
“허허, 이런… 이런… 허허허.”
연태조는 너무도 어이없어,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