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갓쉰동 연개소문 (10)
개소문이가 날린 돌에 팽무일이 맞아 비명을 지르는 사이, 태자 양광은 손을 발 삼아 네 발로 기어 도망치기 바빴다.
“태자! 어디 가시오?”
팽무일로선 개소문이에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선 태자 양광을 사로잡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떠오르지 않았다.
팽무일이 피로 물든 얼굴로 매섭게 몸을 날려 태자의 목덜미를 낚아채려 하니, 야수도 함께 몸을 날려 태자를 지켜야 했다.
야수는 팽무일이 재차 태자를 인질로 삼지 못하게 태자와 팽무일 사이로 뛰어들며 박도를 휘둘렀다.
바위도 가를 기세로 야수의 박도가 팽무일의 머리를 노렸으나, 파천신검 초식을 펼쳐 가볍게 쳐 낸 팽무일이 몸을 날려 야수의 머리를 타 넘고는 그대로 태자의 머리 위로 내리 꽂혔다.
야수로선 너무도 허무하게 자신의 일격이 막히자 당황해 팽무일을 놓쳤으나. 이내 곧 급히 몸을 돌려 태자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팽무일의 손이 태자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다.
“태자 전하, 다시 붙잡혔구려! 하하하. 그래, 우리 팽가장이 어찌 되었다고요?”
“무엄한 놈!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태자 양광이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도 위세를 부려 보았지만 팽무일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니지요. 태자 전하 우리 함께 가 팽가장이 어찌 되었는지 살펴보십시다.”
태자를 들어 올려 야수의 공격을 막으며 팽무일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야수로선 태자를 방패로 삼은 팽무일에게 펼칠 공격 수단이 전무해 이를 갈 뿐이었다.
그때, 개소문이가 달려오며 팽무일을 불렀다.
“제자야! 이 사부를 두고 어디를 가려는 것이냐?”
개소문이의 외침과 동시에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팽무일이 태자를 들어 앞을 막았다.
영주총관부와 요서총관부의 정병들은 감히 태자의 몸이 상할까 우려되어 화살도 날리지 못하는데 비해, 개소문이는 거침없이 돌팔매질을 했다.
개소문이가 비검술을 이용해 날린 돌팔매질은 무척이나 정확해 태자의 비명이 터져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태자를 방패 삼아 질질 끌며 뒤로 물러서던 팽무일이 의아해 고개를 살짝 내미니, 개소문이가 날린 돌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놈이 허수를?’
그제야 팽무일은 개소문이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며 태자의 목덜미를 쥐고 몸을 날려 이곳을 빠져 나가려 했다.
그러나, 팽무일이 아주 잠시 고개를 내민 그 순간을 노려 근처까지 다가온 개소문이가 또다시 돌을 날렸다.
빡!
태자를 방패로 삼아 막을 여유도, 파천신검을 펼쳐 몸을 지킬 시간도 없던 팽무일의 이마에 정확히 돌맹이가 날아들어 피를 뿌렸다.
“악!”
고통에 겨워 팽무일이 태자의 목덜미를 놓치자, 이 틈을 노려 야수가 달려와 태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뒤로 끌며, 한편으론 팽무일의 머리를 노려 박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팽무일 역시 이대로 머리를 내어 줄 인물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야수와 개소문이의 공격에 대비해 본능적으로 파천신검을 펼치니, 이번에도 야수의 공격은 맥없이 막히고 말았다.
야수의 박도를 튕겨낸 팽무일이 그 탄력을 이용해 뒤로 몸을 날리는 그 순간.
개소문이가 날린 돌멩이도 팽무일을 집요히 따라붙었다.
그러나 절정에 달한 팽무일의 경공은 그 돌멩이마저 가볍게 밟고 다시 재도약하여 하늘 높이 솟더니, 어느새 들판을 가로질러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공이라면, 야수도 팽무일 못지않았으나, 공손향을 수나라 군사 속에 홀로 두고 팽무일의 뒤를 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야수가 박도를 허리춤에 다시 차자, 태자의 곁으로 양소와 위충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지켰다.
“거친 놈이요. 역시 팽가장의 장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찾아 온 모양이구려. 이 흉악무도한 놈들 같으니… 한왕은 어찌 일을 처리한 것인지… 허허.”
태자 양광이 모든 이가 듣도록 거짓으로 단정을 내리니, 양소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머리 숙여 동의를 표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는 반드시 향후, 한왕에게 책임을 물으셔야 할 듯하옵니다.”
양소의 말에 태자 양광의 입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뜻밖의 수확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하하하.’
역시, 양광과 양소는 이심전심으로 속뜻을 내비치지 않아도, 멀리 떨어진 이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음모를 꾸밀 정도였다.
망신을 면한 양광이 자세를 바로 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 야수와 개소문이에게로 시선을 옮겨 공을 치하했다.
“그대들의 공이 크오. 어디서 온 협객들이신가?”
양광의 물음에 야수와 개소문이는 그저 눈만 매섭게 빛낼 뿐 답을 하지 못하였다.
야수는 본래, 우문도웅의 수하로 수의 황실을 멸하는 것이 목적인 인생이었다.
허나, 잠시 위충을 의지해 다시 세력을 쌓자는 공손향의 말을 따르는 신세였기에, 지금 태자의 목을 쳐 우문도웅의 뜻을 따를지, 공손향의 말대로 세력을 쌓아 후일을 도모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개소문이 또한, 곧 고구려와 수가 큰 전쟁을 벌일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태자를 구한 것이 옳은 일인지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고운 목소리가 이들의 대답을 대신하였다.
“소녀, 백마장군 공손찬의 후손으로 향이라 하옵고, 저자는 저의 식객인 야수라 하옵니다. 저희는 위충 총관을 찾아뵙고, 태자 전하를 견마지로로 섬기고자 영주로 향하던 길이었사옵니다.”
상황 파악이 빠른 공손향이 위충마저 언급하여 자신들의 신분을 보증하였다.
“허허, 그러하오? 총관, 아시는 분들이었소?”
태자 양광이 흡족해 물으니, 위충이 허리 숙여 답하였다.
“일대에 대대로 세력을 일군 공손 씨이옵니다. 일전에, 우문도웅의 겁박에 잠시 힘을 보탠 바 있사오나, 밝은 길을 찾아 태자 전하께 귀순하고자 하오니, 부디 해량하여 살펴 주시옵소서.”
위충의 말에 양소가 공손향과 야수를 살펴보니, 야수는 무공이 드높고 공손향은 일대에 세력과 재력을 지녀 큰 도움이 될 인물들이었다.
“이 모두가 태자 전하의 홍복이옵나이다.”
책사 양소가 부드러이 아뢰니, 태자 양광이 이들을 마다할 리 없었다.
“좋다! 아주 좋아! 오늘 내가 망신을 당하였으나, 이런 연도 맺게 되니,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이로구나. 소득이 있는 날이야. 하하하.”
껄껄껄 웃은 태자가 이제 개소문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소년 협객은 어디의 누구를 사부로 두었는가? 참으로 대단하이.”
좋은 말로 칭찬하며 사부까지 명성을 높여주려 하였으나, 개소문이의 표정은 냉랭하였다.
“나는 고구려의 갓쉰동이라 하오.”
개소문이의 입에서 고구려란 단어가 나오자, 양광은 물론 주위 군사들마저 놀라 당황하여 술렁였다.
“뭐, 뭣이라? 고구려인이었느냐?”
태자 양광이 재차 물으니, 개소문이가 당당히 다시 답하였다.
“그렇소.”
양소가 개소문이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니, 눈매가 아이답지 않게 사납고, 턱선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 보였다.
‘눈매가 사나워, 상관이 무척이나 흉해 초년 복이 없구나, 허나 턱선이 굵고 강해 하관은 뛰어나니, 필경 반드시 크게 될 상이다. 고구려인이라면 반드시 우리 수에 강적이 될 터, 살려둬선 아니 된다.’
관상을 볼 줄 아는 양소로선 개소문이가 달갑지 않았으나, 태자 양광은 입장이 달랐다.
‘비록 고구려인이라 한들, 오늘 나를 구한 공이 크다. 고구려도 우리 수가 정벌한다면 그곳의 백성 또한 나의 백성이 될 터, 이 아이를 내친다면 훗날 세인들이 은혜도 모른다 하여 나를 비웃을 것이다.’
개소문이를 계기로 양광과 양소가 처음으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고구려의 소년 장수로구나. 비록 수와 고구려가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라 하여도, 오늘 네가 나를 구한 공은 당연히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원하는 것이 있느냐?”
양광이 짐짓 위엄 있게 묻자, 살기등등했던 주위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요.”
개소문이가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무엇이냐?”
“고구려와 수의 평화요.”
“평화?”
“그렇소. 그대가 수의 태자라 하니,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겠소? 고구려와 수가 전쟁을 벌여,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힘 써 주시오.”
금과 은을 내릴 생각을 하던 양광으로선 조금 의외의 청이었으나, 이미 듣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보기엔, 사나운 아이지만, 요구하는 것이 고작 평화라니, 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말인가. 평화 약속만큼 쉬운 것이 어디 있는가? 오늘 평화라 말하고, 내일 전쟁을 일으키면 그만인 것을…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일 뿐이구나.’
기습 공격과 거짓 투항으로 가득한 손자병법을 신봉하는 양광이었기에, 평화 약조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한 쉽게 깰 수 있는 가장 쉬운 약속이었다.
“내, 참고하겠다.”
태자 양광이 웃는 낯으로 부드럽게 답하니, 개소문이의 굳었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양광은 그런 개소문이를 보며, 내심 크게 웃었다.
‘역시 겨우 아이일 뿐이다. 살려 보내 나의 덕이나 세상에 알리자.’
양광이 말한 참고하겠다는 표현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참고해 보니, 지킬 수 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교묘한 말장난임에도 개소문이는 자신의 힘으로 평화를 약조 받았다 생각하여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의 그 약조 감읍하옵니다.”
개소문이가 처음으로 공손히 예를 올리자, 양광이 빙그레 웃으며, 비단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금이다. 내 목숨 값으로 부족하겠으나, 지금 지닌 것은 그것뿐이로구나. 좋은 날 좋은 곳에서 다시 보도록 하자.”
개소문이와는 함께할 수 없음을 느낀 양광의 마지막 배려였다.
개소문이가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예를 표한 후 몸을 돌리자, 야수가 달려와 소매를 붙잡았다.
“어. 어린… 어린 사부. 어, 어디로… 가시오?”
어눌하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투였지만, 개소문이에 대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큰 전쟁을 막았으니, 이젠 내 제자를 찾아 세상에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가르쳐야겠습니다.”
“몸… 몸조심하고. 우리. 우리 꼭… 꼭 또 봅시다. 오늘… 어린 사부 덕에… 무척… 즐거웠소. 만나 기뻤소.”
야수는 자신과 눈매가 닮은 이 소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였다.
개소문이 역시, 온달 이후로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난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훗날을 약속했다.
“반드시 봅시다. 갓쉰동, 내 이름은 갓쉰동이요. 부디, 기억해 주시오.”
* * *
요동성의 성주로 고승이 새로 부임하였고, 곧 전시조정이 요동성에 세워질 것이란 소문이 가득했다.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장주가 총관부 별채로 날아들자, 해권이 맞이했다.
“신크마리께서 묻힌 곳을 알아냈습니다.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해권은 해진의 동생으로 이미 팽가장의 비극을 접해 해진의 시신이 묻힌 곳을 찾던 중이었다.
해권이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입을 열었다.
“총관께서 기다리신다. 가자.”
해진이 묻힌 곳보다 더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해권과 장주가 들어오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어득구와 선예가 일어나 예를 표했다.
상석에 앉은 을지문덕도 고개를 들어 해권에게 자리에 앉으라 권하였다.
“앉으시게. 어득구가 기이한 정보를 가져왔네.”
해권과 장주가 자리에 앉으니, 을지문덕이 어득구에게 눈짓을 보냈다.
“태자 양광이 영주 일대를 시찰하던 중, 팽가장의 장자 팽무일이 커레이트 부족 전사 삼백을 이끌고 급습하였고, 갓쉰동이란 아이가, 수의 태자 양광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뭐라?”
해권이 놀라 묻자, 어득구가 바로 말을 이었다.
“태자 양광이 갓쉰동이의 공을 치하해 몸에 지닌 금을 모두 하사했다고 하며, 다음에 꼭 다시 보자 했다 합니다.”
세상 이야기란, 입을 거칠수록 말이 더해져, 눈으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법이다.
어득구 역시,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세인들의 입을 거친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에, 사실과 다름은 당연하였다.
무척 살이 많이 붙고, 태자 양광에게 좋은 방향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갓쉰동이라 하면, 연태조… 그자의 장자 아니더냐? 아니, 그 아이가 어찌 수의 태자를 구한단 말인가?”
세상 일 모든 정보를 취하는 을지문덕이었기에, 갓쉰동이 누구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 * *
한편, 수의 한왕 양양의 휘하 무림 고수들의 급습으로 해진이 죽음을 맞이했기에, 해권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총관, 본래 연 씨 일족은 불경스럽게도 태왕을 선택해 세우고, 심지어 연을 비롯한 중원의 나라들과 결탁해 우리 고구려를 위태롭게 했던 간적들이었습니다. 멸문지화를 당해 마땅한 것들이 어찌 다시 세력을 쌓고 막리지까지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해권이 오랜 역사까지 언급하며 성토하였으나, 을지문덕은 표정을 굳힌 채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총관, 소인 신크마리의 시신을 수습해야 하니, 하북으로 향하겠나이다. 돌아오는 길엔 연태조의 장자를 잡아 수와 전쟁 전까지 오겠나이다.”
해권의 말에 그제야 꾹 다물었던 을지문덕의 입이 열렸다.
“조심히 다녀오시게. 수와의 전쟁은 염려치 말고 일 보시게. 우리 대고구려의 막리지, 연태조 그자의 장자가 떠돌아서야 되겠나. 적이 이를 알고 이용하지 못하도록 반드시 데려오시게.”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개소문이를 데려오란 명이었다.
해권이 머리 숙여 명을 받으니, 을지문덕이 다른 이에게도 명하였다.
“장주는 적봉진으로 향해 온달 장군에게 팽가장의 참극을 알리고, 개소문이의 일도 알리게. 아마도 온달이 개소문이를 찾을 거야. 그리고 이젠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도 기다리겠지. 알리시게.”
해권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곧 온달이 느낄 비통함에 을지문덕의 마음 또한 무거웠다.
“어득구는 대장군께 이 사실을 알리고, 선예는 막리지를 감시하라.”
을지문덕이 다시 명을 내리니, 어득구와 선예도 일어나 머리 숙여 예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
“어찌하여, 막리지의 장자가…….”
큰 전쟁을 앞둔 을지문덕의 시름이 깊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