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갓쉰동 연개소문 (9)
항가이가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군마가 몰려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중 금빛 찬란한 갑옷으로 멋들어지게 치장을 한 장수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수의 태자 양광이었다.
그러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항가이가 태자 양광을 알아 볼 리 만무했다.
‘이것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적인가? 수가 많으니, 피해야 하나? 싸워야 하나?’
내심 궁리하며 팽무일을 바라보니, 개소문이를 공격하던 검을 거두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일단 팽 선생의 행동을 살펴 공격할지 도망갈지 판단해 보자.’
항가이는 이미 도주할 생각이 가득했지만, 이 역시도 쉽지 않을 것 같아 팽무일에게 의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태자 양광의 곁을 지키던 위충이 제법 위엄 있게 외치며 꾸짖었다.
“너희는 무엇하는 자들인데, 이곳에 떼로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것이냐? 당장 무기를 거두고 예를 올리지 못할까!”
그러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항가이의 전사들은 그저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머리를 조아리지도 엎드려 절을 올리지도 않았다.
물론, 개소문이 또한 예를 올릴 생각 따위는 없기에 그저 서서 바라만 보았다.
개소문이는 별안간 나타난 수의 태자 행차에 크게 당황하였으나, 항가이의 전사들과 팽무일의 공격이 멈춰 그나마 잠시 숨을 고르며 수의 태자마저 공격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객잔 문 앞에 선 공손향만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아무도 이렇다 할 예를 올리기는커녕, 무기조차 거두지 않자 위충이 크게 노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놈들이 어찌 이리도 무엄하단 말인가? 이놈들이 정녕…….”
단숨에 몰아쳐 모두 척살하고자 마음먹은 위충을 대신해 양소가 양광에게 말하였다.
“북방 초원의 것들은 우리말을 모를 수도 있으며, 예와 격식 또한 우리와 다르기에,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 또한 익히지도 못하였을 것이옵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자를 찾아 그에게 싸움을 벌인 연유를 묻고 멀리 쫓으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큰 전쟁을 앞두고 사소한 일로 북방 초원의 민족에게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한 뜻이 담겨 있었다.
양소의 말에 태자 양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충에게 말하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내가 누구인지 저들이 어찌 알겠소. 나의 백성도 아닐뿐더러 싸우다 말고 예를 올리는 것도 우스우니, 총관은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양광의 말을 위충이 머리 숙여 받들었다.
“명을 받사옵니다.”
“그런데 총관, 지금 보니… 이자들은 고작 저 아이 하나를 상대로 싸움을 벌인 듯 하오.”
양광이 손을 들어 항가이의 전사 무리 속 우뚝 선 개소문이를 가리켰다.
항가이의 전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양광이 가리킨 손끝을 피해 길을 내 주었다.
“고작, 열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 혼자서 수백여 명을 상대했단 말인가?”
양광이 놀랍고도 신기해 고개를 갸웃했다.
위충도 이런 전투는 듣도 보도 못했기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계속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온 팽무일이 엎드려 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인 이곳에서 태자 전하를 알현하옵니다. 태자 전하 천세! 황제 폐하 만세!”
난데없이 땅딸보가 나타나 엎드려 절하며 외치니, 태자 양광을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 위에 앉아 시야가 높았고, 팽무일이 너무도 작고 볼품없어 그가 걸어오는지도 몰랐기에 양광은 아직도 놀란 기색으로 위충을 바라보았다.
“총관, 저건 또 뭐요?”
양광이 아직도 엎드려 있는 팽무일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위충이라고 호의적일 수는 없었다.
“너는 무엇하는 물건인데…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느냐?”
팽무일도 위충의 노기 띤 음성이 못마땅해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를 올리라고 하여 예를 올렸건만 왜 이리 말을 함부로 하는가?’
허리를 펴고 일어선 팽무일이 일부러 고개를 세워 위충을 노려보며 크게 소리쳐 답했다.
“나는 팽무일이라 하오!”
“팽무일? 헌데, 어찌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고작 어린아이 하나를 상대로 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위충이 아직도 개소문이를 둘러 싼 항가이의 전사들을 가리키며 꾸짖자, 팽무일이 입을 실룩거리며 오만불손하게 답했다.
“저들은 북방 초원의 전사들로 대족장 항가이가 이끄는 커레이트 부족이요. 나와 함께 태자 전하를 따르고자 이곳까지 온 용맹한 전사들로 저 고구려 아이를 잡아 태자 전하께 바치려던 것이오.”
“뭣이라… 용감한 커레이트 부족? 그리고 고구려 아이? 그래, 고구려 아이는 왜 잡아 바치려 한 것이더냐?”
위충이 비웃음을 담아 되물었다.
아이 하나를 상대로 수백여 명이 달려든 것을 조롱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놈이 나를 비웃는구나. 고작 태자의 행차 앞이나 지키는 수행원 따위가 어디서 감히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영주자사이자, 요서총관인 위충을 태자의 행차 수행원으로 여긴 팽무일이 일부러 위충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태자를 바라보며 답하였다.
“소인은 하북 탁현의 검술명가 팽가장의 장자인 팽무일이라 하옵니다!”
팽무일이 기세 좋게 당당히 외치자, 태자 양광과 그의 책사 양소가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의 말에 태자가 놀라자, 팽무일은 득의에 차 만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태자 전하, 팽가장의 장자 팽무일 다시 예를 올리옵나이다.”
일부러 팽가장에 유독 힘주어 외치며 엎드려 절을 하려 하자, 양광이 엄히 소리쳐 명하였다.
“당장 저 거북이를 포박하라!”
“태, 태자 전하… 어찌… 저를?”
엉거주춤 선 팽무일이 당황해 양광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희 팽가장이 고구려와 내통해 온달이 보낸 간자들을 비호하고, 한왕이 베푼 연회에서 감히 황후 마마를 암습하였거늘, 어찌 나를 능멸하여 찾아 온 것이냐?”
“네? 네? 네?”
팽무일은 그저 놀라 버벅거릴 뿐 이 상황과 태자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너희 팽가장은 한왕이 초빙한 무림 고수들이 응징하여, 이미 불타 없어졌거늘. 무엇이라? 하북 탁현의 검술명가의 장자? 네놈 따위가 감히 내게 복수라도 하고자 온 것이냐?”
“아, 아니. 아니, 아니옵고. 저는 이미 팽가장에서 쫓겨난 몸이라… 복수는 가당치도 아니하옵고… 그런데… 팽가장이 어찌 되었다 하였사옵니까?”
팽무일이 당황해 아무 말이나 마구 중얼거리다가, 무례하게 되물으니, 위충이 노해 꾸짖었다.
“이놈이 정신 나간 놈이로구나. 어쩐지, 영주를 불태우는데 힘을 보탰던 커레이트 부족과 함께한 것부터 수상하더니, 네놈도 동생 팽무성의 뒤를 따라 땅에 묻혀야 정신 차릴 놈이로구나!”
위충은 온달을 도와 카사르의 몽고 부족과 호타크의 커레이트 부족이 영주를 불태웠던 일을 알고 있었기에, 항가이의 전사들이 커레이트 부족이란 사실에 이미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팽무일이 팽가장의 장자라고 밝히기까지 하니, 어찌 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양광과 양소는 연회에서 황후의 암습을 자신들이 꾸몄기에, 한왕이 황제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무림 고수들과 도모해 팽가장에 그 죄를 덮어씌운 음모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여, 팽가장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기 위해 팽무일을 잡아들이라 명한 것이다.
팽무일로선 이런 깊은 사정까지는 알 수 도 없을 뿐더러, 팽가장이 불에 타고 동생 팽무성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실 또한 알 수 없었으니,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넣은 격이었다.
“당장 저놈을 잡아들이고, 이 비렁뱅이 커레이트 것들도 꽁꽁 묶어라!”
태자의 명을 받은 위충이 크게 호령하니, 호위하던 군사들이 일시에 말에서 내려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도대체! 네게 왜 이 지랄인 거야!”
성난 파도처럼 달려드는 군사들에 파묻히게 생긴 팽무일이 벼락 치듯 소리 지르며 검을 마구 휘두르는데, 근래에 막 익힌 파천신검의 초식이었다.
다리는 굳어 보법은 펼치지 못하였고, 심법 또한 고르지 못해 위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그 품세만은 정확해 군사들의 창과 칼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팽무일은 자신도 모르게 펼친 파천신검의 초식들이 모든 공격을 막아내며 몸을 지키자, 놀라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겨우 여유가 생긴 팽무일이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항가이는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 않았다.
말에 오르지 못한 항가이의 부족 전사들은 곡도와 다채로운 병장기로 총관부의 정병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수에서 밀리고 무예에서도 밀려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말을 달리며 활을 당기는 북방 초원의 전사들이 근접전에서 수의 정병들을 대적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방이 비명으로 가득했다.
파천신검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팽무일은 자신도 곧 커레이트 전사들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지게 되리라 생각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여기서 죽을 순 없다. 도대체 그 순둥이 무성이가 뭔 죄를 지어 죽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건 필경 누명이다. 나까지 누명을 쓰고 죽어선 저 지하에서 무성이와 시건방진 팽가사협이 비웃을 것이다. 반드시 살아야 한다.’
이를 악물며 독기를 품은 팽무일이 살길을 찾아, 한 곳을 바라보았다.
태자 양광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태자를 잡아야 내가 산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내가 살아야 황제도 있고 태자도 있는 법. 나를 죽이려 하는 태자 따위는 모가지를 잡아 끌고 인질로 삼으면 그만이다.’
결심이 선 팽무일이 파천신검 초식을 거둬들였다.
방어가 풀린 팽무일의 몸으로 칼과 창이 찔러 들어오던 그 순간.
팽무일이 발을 굴러 몸을 띄웠다.
자신을 에워싼 군사들의 머리 위로 훌쩍 뛰어오른 팽무일이 발아래 깔리듯 펼쳐진 군사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오직, 태자 양광이었다.
“태자 전하! 거기 그대로 계시옵소소!”
쇠종 치듯 크게 외치며 달려오는 팽무일의 기세가 사나운 범과 같아 태자 양광이 두려워 부르르 떨었다.
“막아라! 팽가장 놈의 암습이다! 막아라!”
양소가 태자의 앞을 지키며 외쳤지만, 어느새 달려온 팽무일이 몸을 솟구쳐 한번 더 하늘 높이 떠오르더니,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태자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꽂혀 왔다.
“태자 전하! 나와 함께 갑시다!”
위충이 창을 치켜 들어 팽무일의 가슴팍을 찔렀지만, 허공에서 몸을 비튼 팽무일이 오히려 위충의 창을 발로 툭 차 탄력을 받더니, 그대로 태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코앞까지 날아든 팽무일의 손이 목에 닿는 순간, 겁에 질린 태자는 몸을 웅크리지도 못한 채 그저 눈만 질끈 감았고, 팽무일의 입꼬리는 기뻐 실룩거렸다.
‘죽으란 법은 없다. 세상 어디에도 태자만 한 인질은 없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팽무일의 귀청을 때렸다.
‘뭐지?’
팽무일이 급히 시선을 돌리자, 그의 눈에 험악한 기세로 빠르게 날아드는 박도가 들어왔다.
짐승처럼 눈을 빛내는 봉두난발한 사내, 야수였다.
이미 객잔에서 야수에게 머리를 밟혀 욕을 봤던 팽무일이었기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언제 저놈이?’
급히 파천신검을 펼쳐 막기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팽무일이 태자를 향해 뻗은 손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날아 태자의 목을 움켜쥐고는 땅에 굴렀다.
“으아악!”
팽무일에게 목을 잡힌 태자 양광의 비명이 울리고 간신히 야수의 박도를 피한 팽무일이 의기양양해 웃었다.
“하하하. 태자가 내 손에 있느니라! 누가 감히 내게 칼을 들이대느냐! 하하하.”
그러나, 그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팽무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으악!”
어디서 날아왔는지, 돌멩이 하나가 정확히 팽무일의 입을 때렸고, 돌멩이에 맞은 팽무일의 입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앞니 두 개가 튀어 나왔다.
“제자야. 이곳은 소란스러우니, 이제 그만 나와 함께 가자꾸나.”
비검술을 발휘해 돌을 날린 개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