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갓쉰동 연개소문 (8)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알지 못하는 개소문이는 팽무일을 시원히 혼쭐을 낸 후, 널브러진 팽무일의 몸을 밧줄로 꽁꽁 묶고 있었다.
“어. 어린… 사부. 그… 줄. 그렇게. 묶으면… 좋지 않아.”
야수가 어눌히 말하며 개소문이가 묶던 줄에 손을 대었다.
“이. 이렇게. 포박술은. 이렇게. 그래야. 안… 안. 풀려. 흐…….”
팽무일을 짐승 묶듯 단단히 묶고는 야수가 만족해 히죽 웃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야수의 눈빛이 사나운 맹수의 눈처럼 빛났지만, 개소문이는 개의치 않고 눈을 빛내며 웃음 지었다.
개소문이의 눈빛 역시 먹이를 낚아채려는 맹수의 눈빛이었고, 야수는 그런 개소문이가 마음에 드는 기색이었다.
“조, 좋은… 좋은 눈이야. 어린. 어린… 사부.”
야수의 말에 공손향이 야수와 개소문이의 눈을 번갈아 살피며 웃었다.
“좋은 눈이라… 호호호. 어린 사부가 눈만큼은 어른 못지않군요. 호호호.”
“대인 그리고 부인, 도와주셔서 감읍합니다.”
개소문이가 손을 모아 예를 표하자, 공손향이 개소문이를 천천히 살피며 물었다.
“그래, 공자께선… 아니, 사부께선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오?”
바닥에 꽁꽁 묶여 누운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사부라 칭하던 것을 따라 부르며 공손향이 물었다.
“존성대명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갓쉰동이라 불립니다.”
개소문이 스스로를 갓쉰동이라 부르자, 공손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군요. 아무튼 어린 나이에 대단한 무공을 성취하셨습니다. 실로, 소영웅이라 할 재주입니다.”
공손향도 야수와 마찬가지로 개소문이가 마음에 드는지, 자리를 권하였다.
개소문이가 옆에 앉자, 야수가 개소문이를 위해 팽무일의 입에 재갈을 대신 물리고는 자신의 발밑에 팽무일을 뉘였다.
“어. 어린 사부… 제자는. 잘 있. 다. 오… 반갑소. 나는… 야수요. 야수.”
개소문이가 공손향과 야수의 곁에 앉는 사이, 항가이는 부족 전사 삼백여 명을 이끌고 바로 앞까지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 * *
요서총관 위충은 영주총관에 임명되어 최전선으로 오게 된 태자 양광을 모시고 일대를 안내하고 있었다.
동에서 출발하여 서로 천천히 이동하던 태자의 행차는 그 수행 인원이 요서총관과 영주총관의 정병 삼천으로 단순 시찰임에도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보통의 경우, 전장이 될 요하 일대 시찰이 행차의 목적이겠지만, 위충은 서와 남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는 향후 고구려와 전쟁 시, 자신이 요서총관부의 정병을 이끌고 영주를 지키고, 태자는 군을 물릴 수 있도록 안배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태자에게 영주를 지키라는 황제 양견의 명이 있었지만, 위충으로선 태자가 최전선을 지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물론, 한왕 양양이 대군을 이끌고, 영주를 지나 무사히 요하를 넘는다면 굳이 태자가 군을 물려 전장을 이탈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
만일을 대비한 위충의 배려를 태자 양광과 양소도 내심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총관! 저 언덕 위로 수상한 움직임이 있사옵니다.”
부장의 말에 위충이 시선을 북서 방면 언덕 위로 옮기니, 흙먼지가 일며 수백 필의 말이 기세 좋게 오르고 있었다.
말 위에는 가죽옷을 걸친 사내들이 등에 활을 매고 있었다.
“총관 저들은 뭐요? 거란인들이요?”
태자 양광도 시선을 옮겨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이 일대는 거란의 세력일지이오나, 저들은 거란인이 아닌 듯합니다.”
“하면 무엇이오?”
위충은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일전에 우문도웅과 사발락가한이 이끈 연합군이 고구려와 일전을 벌일 때, 북방 초원에서 군이 내려와 영주가 불타오른 적이 있었사온데, 저들의 몰골을 보니, 북방 초원의 비렁뱅이들이 분명하옵니다.”
위충의 설명에 태자 양광이 놀라 바로 되물었다.
“뭐라? 북방의 비렁뱅이들? 큰 전쟁을 앞두고 저것들이 또다시 일대에 나타나다니… 저것들이 고구려와 내통이라도 했다면 큰일 아니오?”
태자의 물음에 위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답했다.
“저것들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제 잡아서 물어보도록 하겠나이다.”
위충의 말에 양소도 웃는 낯으로 태자 양광에게 말하였다.
“흉악한 것들이 수를 쓰기 전에 먼저 발견하였으니, 이 모든 것은 태자 전하의 홍복이옵니이다.”
아부가 마음에 든 태자 양광의 입이 귀에 걸렸다.
“내 직접 심문하겠노라! 모두 나를 따르라.”
위충이 만류할 새도 없이 기세 오른 양광이 앞서 말을 몰아 나갔다.
“태자 전하를 모셔라!”
위충이 급히 명을 내리며 말을 내달려 태자의 뒤를 쫓으니, 삼천에 달하는 기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를 따랐다.
* * *
두두두두.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개소문이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흙먼지가 자욱이 일며 항가이가 기세 좋게 삼백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있었다.
“저자가…….”
개소문이가 놀라 급히 바닥에 누운 팽무일을 내려다보았다.
재갈이 풀리자, 팽무일이 말을 쏟아냈다.
“사부, 항가이가 왔나보구려. 하하하.”
꽁꽁 묶인 채 누워있던 항가이가 몸을 비틀어 앉아 자세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나를 풀어주시오. 그럼 사부는 무사하실 것이오.”
부드럽게 타이르듯 팽무일이 말하였다.
“세상일은 참 알 수 없는 법이라오. 사부 같이 어린아이는 더욱 그럴 것이고 말이요.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오늘 일은 서로 잊도록 합시다. 어서 나를 풀어주시오. 문제는 해결해야지 키워선 안 되는 법이라오.”
팽무일이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였다.
그 사이, 삼백여 필의 말이 객잔 앞 넓은 들에 멈춰 서더니, 말 위의 전사들이 일제히 활을 빼들었다.
객잔 안은 일대 소란이 벌어지며, 겁에 질린 점원이 다가와 개소문이에게 연신 굽신거리며 사정하였다.
“공자, 대인, 대협, 소영웅 나리.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화를 면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개소문이가 객잔 안을 둘러보니,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으나, 공손향과 야수만은 즐기듯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 고작. 고작… 삼백여 명입니다. 죽. 죽일까요?”
야수가 나지막이 묻자, 공손향이 손을 내저었다.
“저 소영웅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구경이나 좀 해보자.”
낮게 말하였지만, 공손향의 목소리는 개소문이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다. 내 비록 어리지만, 이곳에서 싸움을 피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미 웃음거리는 이 팽무일에게 잡혀 끌려오면서 충분히 되었다. 이젠 사양하겠다.’
결심한 듯 개소문이가 팽무일의 뒷덜미를 잡고는 질질 끌며 객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밖으로 개소문이가 팽무일을 끌고 나오자, 항가이가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팽 선생! 오래 기다리셨소! 하하하.”
“항가이 대족장! 내 체면이 말이 아니오. 이 아이를 잘 타일러 보시구려.”
팽무일이 끌려 나오면서도 제법 호기롭게 소리쳤으나, 이들의 대화는 개소문이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객잔 밖에 나와 우뚝 선 개소문이는 또래의 아이들은 물론이요.
팽무일같이 키가 작은 사내 따위는 내려다 볼 정도로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를 지녔기에, 본래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였다.
보통 초원의 민족은 열다섯, 열여섯이면 성인으로 취급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고,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그렇기에, 항가이를 비롯한 부족 전사들은 팽무일과 달리, 개소문이를 어리다고 결코 만만히 보지 않았다.
“활은 날리지 말고, 잡아 오너라.”
항가이의 명에 부족 전사 다섯이 말에서 내리더니 곡도를 뽑아들고 다가왔다.
항가이의 부족민들에게 곡도는 귀한 물건으로, 전사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으며 사용하였다.
그렇기에, 지금 개소문이를 향해 다가오는 이들 다섯 명의 전사들은 항가이의 부족 전사들 중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개소문이도 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팽무일의 곁에서 한 발 앞으로 나와 자세를 취했다.
파천신검 일 초식으로, 이는 개소문이가 펼칠 수 있는 가장 절정의 초식이었지만, 아쉽게도 공격 수단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오너라!”
개소문이가 벼락 치듯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다섯 명의 전사들이 일제히 곡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공녀님. 도. 도와야. 도와야 합니다.”
야수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며 말하였다.
공손향도 스르르 미끄러지듯 야수의 뒤를 따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야수, 재밌지 않은가?”
공손향이 웃으며 가리킨 곳엔 맹렬히 덮쳐오는 곡도 다섯 자루에 맞서 개소문이가 고작 부러진 탁자 다리로 파천신검을 펼치고 있었다.
수련이 짧아 매끄럽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개소문이의 초식에 야수가 감탄해 소리쳤다.
“어. 어린! 어린 사부! 훌륭. 하오!”
사실, 공손향이 보기엔 개소문이의 무공은 야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조잡한 실력이었지만, 삼백여 명의 적을 앞에 두고도 두려움 없이 맞서는 용기는 무척이나 가상했다.
“어린아이가 겁이 없구나.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으로 몸을 보호하고 백두검법으로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방어에만 집중하던 개소문이가 별안간 공격 수단을 펼치자, 다섯 명의 전사들이 당황해 곡도가 흐트러지며 발끝이 어지러워졌다.
마침내, 개소문이에게 손목과 어깨를 얻어맞은 전사가 바닥에 나뒹굴며 곡도를 놓치자, 개소문이가 매끄럽게 지면을 날듯 보법을 펼치며 곡도를 낚아챘다.
“이 칼은 잠시 빌리겠다.”
짧게 말한 개소문이가 탁자 다리를 비검술을 발휘해 날리며 힘차게 곡도를 휘둘렀다.
탁자 다리에 맞은 전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고, 연이어 개소문이가 휘두른 곡도에 또 다른 전사가 옆구리를 베여 뒤로 물러났다.
“이 조그만 놈이!”
크게 노한 전사 둘이 맹렬한 기세로 곡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을 펼쳐 몸을 지키며, 동시에 백두검법을 펼쳐 반격을 가했다.
파천신검은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백두검법은 나름 열심히 수련해 왔기에, 무척 깔끔하고 정교하게 펼칠 수 있었다.
방어를 하다가 일순 공격해 오는 개소문이의 곡도에 연달아 두 명의 전사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어깨와 손목이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런 망할! 시간 끌지 말고 몰려와 잡아!”
팽무일이 악을 쓰며 외치자, 주춤하던 항가이가 손을 들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잡아들여라!”
항가이의 명이 떨어지자, 삼백여 필의 말에서 전사들이 일제히 뛰어내리더니, 제각각 무기를 빼어 들고는 개소문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끼와 몽둥이를 비롯한 짧은 비수와 곡도 등, 병장기들이 다채로웠다.
‘수가 많다하여 모두가 내게 칼을 들이댈 수는 없다. 한번에 고작 대여섯이 전부다. 나는 대여섯만 꾸준히 상대하면 된다.’
개소문이는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흔들리지 않고 파천신검을 펼쳐 몸을 지켰다.
개소문이를 에워싼 병장기들이 쉴 새 없이 찔러오고 베어들었지만, 단단히 파천신검을 일 초식부터 사 초식까지 펼치고 다시 또 펼치며 개소문이는 단단히 몸을 지켰다.
응용동작과 연계동작은 아직 개소문이가 펼칠 수 없었지만, 이제 막 익히기 시작한 초식들을 차례대로 펼치며 방어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개소문이가 파천신검 초식을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떤 전사들도 개소문이의 몸에 병장기를 댈 수조차 없었다.
“대. 단. 대단. 대단하오! 어린 사부!”
야수가 감탄하며 외치자, 곁에서 지켜보던 공손향도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이가 아니구나. 저 거북이 같은 사내가 사부라고 부를 만도 하군.’
공손향의 시선이 팽무일에게 향했다.
마침 전사 중 한 명이 달려와 팽무일의 결박을 풀고 있었다.
‘저자도 만만치 않던데… 저자가 이 싸움에 참여한다면 어찌될까?’
공손향이 빙그레 웃으며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몸이 자유로워진 팽무일이 검을 빼어들고 개소문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사부! 이 제자의 검도 막아 보시구려!”
경공이 뛰어난 팽무일이 허공을 달리듯 날아와 개소문이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쳤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며 파열음과 불꽃이 일었다.
완력에서도 팽무일에게 밀리지 않는 개소문이가 쉬지 않고 파천신검을 펼치며 몸을 지켰다.
제 아무리 수가 많고, 검술과 경공 수련이 개소문이보다 위라 하여도 파천신검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개소문이의 몸에 병장기를 댈 수 없었다.
“내가 지치나, 너희가 지치나 어디 두고 보자!”
숨을 헐떡이면서도 개소문이는 악착같이 파천신검을 계속 펼쳐 몸을 지켰고, 오히려 맹렬히 공격을 펼치던 전사들의 다리가 슬슬 풀리며 발끝이 어지러워졌다.
마음이 조급한 항가이가 독려하기 위해 소리치려던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우렁찬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멈추어라! 태자 전하의 행차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