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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140화 (140/328)

140화 갓쉰동 연개소문 (6)

팽무일은 개소문이의 매섭던 눈빛이 흔들리자, 더욱 엄포를 가했다.

“어찌하겠느냐? 이 책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내게 가르침을 주고 책을 온달에게 가져갈 것이냐?”

개소문이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책을 집어 들고는 당장이라도 찢을 듯 힘을 주었다.

“별 수 없지. 나도 익힐 수 없다면 이 책 따위는 필요도 없다. 온달이 무척 실망할 것이야. 책을 지키지 못한 네게 말이야.”

투두둑.

팽무일이 힘을 주자, 책이 반으로 찢어졌고, 개소문이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항가이가 더 놀라 뛰어왔다.

“아니, 팽 선생! 어찌 이러시오? 이 책 귀한 거 아니오? 돈 되는 물건 아니오?”

항가이가 팽무일의 손을 부여잡고 사정하는 사이에도 팽무일은 반으로 나뉜 책을 다시 잡아 힘껏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보다 더 두꺼워진 탓에 쉽사리 찢어지진 않았다.

“안 찢어지네. 에잇! 이야압!”

책을 찢기 위해 팽무일 기합까지 지르며 힘을 줬다.

힘 준 보람이 있는지 책이 조금씩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하시오!”

책이 찢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개소문이도 소리쳐 팽무일을 제지했다.

“왜? 찢지 말어? 그만해? 애야 이 책 살릴 것이냐?”

팽무일이 반으로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책을 개소문이의 눈앞에 들이대며 물었다.

체념한 듯 개소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르쳐 줄 터이니, 더는 그 책을 찢지 말아라.”

“오냐. 네가 가르쳐 준다면야 내가 이 책에 해를 가할 이유가 없지. 이 책의 무공을 익힌 뒤엔 나도 너덜너덜해진 이 책 따위는 필요도 없으니, 네게 줄 것이야.”

도적 떼의 괴수까지 한 팽무일에게 어린아이 하나 윽박지르는 일 따위, 무척 손 쉬운 일이었다.

득의에 찬 팽무일에게 개소문이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조의선인의 보법과 심법을 배우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어떤 조건이냐?”

“먼저 조의선인이 되어야 한다. 조의선인이 되지 못한 자에겐 그 누구라도 가르침을 줄 수 없다.”

“고작 그것이냐? 나야 원래 머리가 민둥산이니, 깎을 필요도 없고 검은색 조복만 찾아 입으면 되겠구나.”

팽무일이 시원시원하게 답하였다.

“또 있다.”

“그래, 무엇이냐?”

“내게 절을 올려 스승으로 섬겨야 한다.”

“뭐, 뭐라?”

팽무일이 어이없어 되물었다.

“나를 스승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이다. 조의선인은 스승에게서만 무공을 배울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체면과 염치 따위는 개나 줘버린 팽무일이었기에, 이 역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좋다. 아니, 좋습니다. 사부님, 절 받으십시오.”

개소문이가 마음 바뀌기 전에 우선 절부터 올리고 보는 팽무일이었다.

‘보법과 심법을 배울 수만 있으면 스승이 아니라 양부로 섬기라 해도 할 나다. 다른 조의선인에게선 결코 배울 수 없을 보법과 심법이다. 내가 이 꼬맹이를 만나 운이 틔었구나. 하하하.’

마냥 기뻐 얼굴 가득 웃음꽃이 활짝 피자, 지켜보던 항가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이 광경이 대체 뭔 일인가? 저 아이가 실은 무척 지체가 높은 집 자제인 건가? 팽 선생이 이렇게 절까지 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터인데…….’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었다.

“팽 선생, 왜 절을 하는 거요?”

항가이의 물음에 팽무일은 귀찮다는 듯 짧게 답했다.

“사부로 모시는 절이오. 바쁘니,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넙죽 절하는 팽무일을 엄히 내려다보며, 개소문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어찌 스승을 묶어 놓은 것이냐? 어서 줄부터 풀거라.”

개소문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팽무일은 망설임 없이 줄을 끊어 개소문이를 자유롭게 했다.

‘이까짓 줄 따위 없어도 요 꼬맹이는 내게 도망칠 수 없다. 나의 경공은 달리는 말도 따라 잡을 경지이거늘 염려할 것이 무엇이더냐.’

내심 믿는 구석이 있는 팽무일이었다.

개소문이는 담대하고, 여느 아이보다 체격도 크며 용감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다.

신분이 귀한 연 씨 일족의 장자로 태어나 그 누구도 감히 개소문이를 속인 일 없었고, 개소문이 역시 누구를 속이고 거짓을 말한 일 없었다.

그렇기에 온달의 책을 지키기 위해, 개소문이는 진심으로 팽무일을 제자로 받아 들였고 조의선인의 보법과 심법을 가르쳐 주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어른 못지않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지나치도록 영리해 남을 속일 줄 아는 온동이었다면, 팽무일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보법과 심법을 거짓으로 가르치겠지만, 개소문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내 너를 제자로 받아들여 진심으로 가르칠 터이니, 너 역시 나를 스승으로 받들고 섬기며 감히 조의선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개소문이의 이 말이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기뻐 팽무일이 헤벌레 웃으며 연신 감사를 표했다.

“제자, 어찌 스승의 말씀을 거스르겠나이까? 죽으라면 죽고, 소를 끌고 지붕 위로 오르라면 오르겠나이다.”

답하면서도 팽무일은 자신의 말이 너무도 우스워 킥킥거렸다.

‘선친께서 팽가도법을 가르치실 때 내가 이렇게 성실했다면, 지금 팽가장의 장주는 나였을 것인데… 어찌 되었든, 얻고자 하는 것만 취하면, 이놈 목을 꺾어 놔야겠구나. 하하하.’

팽무일의 이런 생각도 모른 체, 개소문이는 손을 내밀었다.

‘왜 손을? 사부와 제자가 된 기념으로 손을 맞잡자는 것인가? 일단 이놈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

개소문이의 속을 알 수 없어 팽무일은 냉큼 손을 맞잡았다.

“내 손은 왜 잡는 것이냐?”

“네? 하, 하오면?”

개소문이가 계속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자, 팽무일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계속 존대를 해야 했다.

“책을 달라는 말이다. 네가 찢은 책 말이다. 파천신검!”

개소문이가 제법 위엄 있게 말하였다.

“하, 하오나… 이 책은… 인질, 아니지… 책이니까? 서질인가? 아무튼 담보? 어쨌든 지금은…….”

팽무일이 망설이며 허둥대자, 개소문이가 버럭 화를 냈다.

“이놈! 어찌 감히! 네가 벌써부터 스승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더냐? 냉큼 파천신검을 건네지 못할까!”

개소문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팽무일이 두 손으로 너덜너덜해진 책을 건넸다.

‘별 수 없지 일단 주자. 이놈이 책을 들고 튈 생각인 듯하나, 결코 내게서 벗어나진 못한다. 이런 꼬맹이 하나 가지고 노는 것은 내겐 일도 아니다.’

팽무일도 나름 자신이 있어서 파천신검을 건넨 것이었다.

그러나 개소문이는 책을 들고 도망칠 생각 따위는 품고 있지 않았다.

“네가 책을 함부로 다루니, 내가 지니고, 이 책에 담긴 무공을 구전으로 전하겠다.”

“아니, 그… 그러시오면… 거짓으로 가르치실 수도…….”

“이놈! 어찌 스승을 능멸하느냐! 내게서 배운 네가 허투루 익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면, 검신이라 칭송받으시는 온달 장군님께 누가 되거늘 내가 너를 속이기라도 할 것 같으냐?”

개소문이는 온달을 스승으로 여기며 진심으로 따르었다.

하여, 온달의 무공이라 생각되는 파천신검 비급은 자신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놈이 훔쳐 배우는 것을 막을 방법은 내게 없다. 어차피 이놈이 익힐 수밖에 없다면, 온달 장군의 무공은 내가 가르쳐 이놈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옳다.’

만약 온달이었다면, 팽무일이 온갖 협박을 해도 죽을지언정 가르침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달리 생각해보면 만일 온달일지라도 팽무일이 자신의 목숨이 아닌 스승의 책으로 위협을 한다면 가르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름드리 나무 같은 온달과 열 살 개소문이는 다르면서도 닮은 부분이 무척이나 많았다.

팽무일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이 이런 어린아이에게 맥없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책을 되돌려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사부님, 제자가 아둔해 사부님의 말씀으로만 익히기 어렵사오니, 사부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침을 내리신 후, 이 제자가 책을 살펴 볼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개소문이가 말로 전하는 내용이 책에 적힌 내용과 일치하는지 검증하고자 말한 것이다.

“좋을 대로 하라.”

개소문이가 선선히 답하고는 너덜너덜해진 책을 고이 펴서 소중히 품 안에 넣었다.

이후, 팽무일은 다음 마을에서 검은색 일색의 조복을 구해 입었고, 개소문이는 틈틈이 파천신검을 읽고 또 읽어 자신이 먼저 익힌 후, 팽무일에게 말로 가르침을 내렸다.

팽무일은 개소문이의 가르침을 외우고 또 외운 후 파천신검의 내용과 같은지 반드시 확인했다.

‘이놈이 나를 속이지는 않는구나.’

의심 많은 팽무일도 점점 개소문이의 가르침을 신뢰하기 시작했다.

십여 일 쯤 지나 파천신검 비급에 적힌 방어 네 초식을 모두 팽무일이 암기할 수 있게 되자, 개소문이는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을 가르쳐야 했다.

“제자는 듣거라.”

영주와 지척인 객잔에서 개소문이가 엄히 말하기 시작했다.

“듣사옵나이다.”

땅딸보에 거북이처럼 생긴 팽무일이 공손히 답하자, 주위 사람들이 신기해 힐끔거렸다.

항가이는 자신이 괜히 무안해 고개를 푹 숙였다.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아무튼, 팽 선생이 잡아온 저 아이가 실은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팽 선생이 저리 극진히 모시지. 사부로 모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항가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개소문이는 조의선인만이 익힐 수 있는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을 팽무일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잘 듣거라. 본래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은 조의선인만이 익힐 수 있느니라. 너는 비록 고구려인이 아니지만, 나의 제자가 되었으니 가르침을 내리겠다. 허나, 이후 너는 결코 조의선인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아니 되느니라.”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팽무일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명심하고 또 명심하겠나이다.”

거짓으로 답하였으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개소문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조의선인의 명예를 더럽힌 경우, 큰 스승이 스승에게, 스승이 선배에게 선배가 내게 죄를 물을 것이다. 결국 나는 너를 가르친 죄로 직접 너를 벌해야 하니, 네 근골은 내가 직접 잘라 무공을 폐하게 될 것이다.”

조의선인의 계율과 위계질서 및 조직 구조를 알 리 없을 뿐더러 관심도 없는 팽무일이었기에, 이 역시도 대수롭지 않게 답하였다.

“제자가 어찌 거역하겠나이까? 가슴 깊이 조각하겠나이다.”

사실, 팽무일은 개소문이를 업신여겨 보법과 심법만 익히면 한 주먹에 때려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품세에 불과한 검법에 보법과 심법이 더 해지면 마침내 위력을 발휘할 것인데, 꼬맹이에게 지금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린들 억울할 것은 없다.’

파천신검 비급에 적힌 네 초식은 서로 연계하여 다양한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검술명가에서 자란 팽무일은 품세만 적힌 파천신검을 읽고도 단번에 절정의 검법이라 판단할 수 있었기에, 개소문이에게 배울 보법과 심법에 기대가 컸다.

‘이까짓 꼬맹이 따위, 배울 것 다 배운 뒤엔 필요 없으니, 염라대왕을 알현케 해주면 그만이다. 상승무공을 익힌 내가 두려울 게 무엇이랴.’

그러나 팽무일은 개소문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팽무일에게 파천신검 비급에 적힌 방어 네 초식을 가르치는 동안, 개소문이 역시 이 네 초식을 익히고 있었다.

파천신검 비급엔 겨우 네 초식만 담겨있었지만, 말로 전하듯 품세를 자세히 풀어 기재되어 있었기에, 개소문이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해진이 글로 상세히 남긴 덕분이었다.

팽무일과 달리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을 이미 익힌 개소문이는 파천신검 품세에 그 위력을 더한 상태였다.

‘고작 네 초식에 불과하지만, 품세의 오묘함과 다양한 연계 동작은 우리 팽가도법보다 우월하다. 단언컨대, 절정 고수들이 사위를 에워싸도 결코 나의 방어를 뚫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보법과 심법이 더해진다면, 천군만마 속에서도 종횡무진하리라.’

벌써부터 마음이 들뜬 팽무일은 간신히 마음을 누르며, 개소문이가 설명하는 보법과 심법을 집중하여 듣고 외우기를 반복했다.

개소문이가 익힌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은 기초적인 것으로, 이미 절정의 검법인 팽가도법을 수련한 바 있는 팽무일로서는 쉽게 익힐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외우고 또 외운 후, 자신이 붙은 팽무일이 객잔 중앙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는 보법을 펼쳐보았다.

내력이 실리고, 몸놀림이 무척이나 가벼운 것이, 개소문이가 허투루 가르치진 않은 듯했다.

“하하하, 사부께서 진정으로 백두검법의 보법과 심법을 내게 전수하셨구려. 하하하.”

뛸 듯이 기쁜 팽무일이 껄껄껄 웃으며 개소문이에게 다가왔다.

“사부, 이제는 사부께 더 배울 것이 없을 듯하옵니다.”

팽무일의 눈이 야비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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