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갓쉰동 연개소문 (5)
본래, 파천신검이란 이름의 무공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낙랑사냥 대회 전, 해진이 글로 남겼던 무공은 파천신검이 아닌, 파산신검이었다.
총명한 평강이 파산신검을 파천신검이라 기억해 무공비급 명을 엉뚱하게 기재할 리는 없었다.
구전되어 온 파산신검은 공격 여덟 초식과 방어 네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파산신검에서 방어 네 초식을 제외한 것이 파산귀검으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한다는 파산신검의 기본 원칙에서, 오직 공격 일변도로 조정하여 공격만으로 적을 무력화하여 방어까지 겸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기 씨 사 형제가 펼친 파천진의 방어 진법을 눈여겨 본 해진이 파산신검의 방어 네 초식을 따로 떼어 파천신검이라 명한 것이다.
하지만, 공격 초식과 분리된 방어 네 초식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으나, 적을 상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었기에,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평강은 방어가 전무한 파산귀검을 익힌 온달이 훗날 어려움을 겪을까 우려하였다.
하여, 파신신검의 방어 네 초식인 파천신검을 기억해 내어 무공 비급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온달이 해진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익히지 않을 것을 우려해 그저 간직하며 해진이 돌아오면 자신이 허락을 얻을 생각이었다.
이미 온달에게 파산귀검을 전수한 해진이라면, 파천신검 전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해진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평강과 온달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니, 해진에게 허락을 얻지도 용서를 구할 방법도 전무했다.
어찌 되었든, 파천신검이란 무공명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사한 무공명들이 많았기에, 선대 조의선인의 큰 스승들이 살아 돌아온다 한들, 무공명만으로는 파천신검이 파산신검의 방어 네 초식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십여 일 째, 영주로 향하는 동안 팽무일은 이런 사연을 지닌 파천신검 비급을 틈날 때마다 펼치고, 읽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고작 네 초식뿐인 이 무공 귀결은 읽을수록 뭔가 빠진 듯 허전했고, 귀결에 담긴 뜻을 파악하기도 어려워 머리만 지끈거렸다.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 보통의 무공 비급의 경우는 보법, 심법도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찌하여 초식만 있는 것이지? 기본이 되는 보법, 심법을 익히지 않고선 이 초식들을 펼친들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겠는데…….”
팽무일의 말처럼 파천신검은 파산신검의 방어 네 초식만 기록하였기에, 보법과 심법은 따로 기재되지 않았다.
보법과 심법은 조의선인들이 기본으로 익히는 백두검법의 보법, 심법과 동일할 뿐더러, 비검술의 심법과도 다르지 않았다.
백두검법과 비검술을 익힌 조의선인들에게 그들의 보법과 심법을 이용해 파천신검을 펼치라고 한다면 쉽게 익혔겠지만, 팽무일이 익히기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작은 비급에 담긴 대로 초식을 따라해 익힐 수 있지만, 조금도 힘이 실리지 않아 거세게 달려드는 상대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질 것이 자명했다.
평소 팽가도법 수련에 게을리한 팽무일이었지만, 검술명가의 장자답게 보는 눈은 정확하여 이 무공비급에서 배제된 보법과 심법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파천신검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팽무일은 자신의 곁에 꽁꽁 묶여 누운 개소문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온달이 수련하던 것을 본 적 있느냐?”
팽무일의 물음에 개소문이는 그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어른이 말씀하시면 답을 해야 하느니라. 다시 묻겠다. 온달이 수련하는 것을 본 적 있느냐?”
팽무일이 다시 물었으나, 개소문이는 팽무일을 잡아먹을 듯 노려만 볼 뿐 조금도 답할 기색이 아니었다.
‘이 어린놈의 눈 꼬라지가 어찌 이리 흉악스러운 거냐? 아주 그냥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구나. 이놈이 이 비급을 나보다 먼저 알아보았으니, 이 녀석은 분명 뭔가 알고 있을 것인데… 어찌 달래서 캐낼 수 있을까?’
팽무일은 치미는 화를 꾹 누르며 개소문이를 달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 말해 보았다.
“네가 내게 화가 난 것은 잘 알고 있단다. 홍산 온달의 게르 안에서 네가 내 턱을 후려쳐서 또다시 네가 내 턱을 때릴까 봐 이렇게 묶은 것이지, 나는 실상 네게 감정이 없단다. 네가 나를 때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면 밧줄은 풀어줄 생각이란다.”
“이 따위 밧줄, 묶던지 말던지, 나는 상관없다. 그 책! 주인에게 어서 돌려드리거라!”
개소문이가 마침내 입을 열고 호통을 쳤다.
‘아니, 이 어린놈이 어디서 호통이야? 성질 같아선 한 주먹에 머리를 박살내고 싶지만… 이놈에게서 뭐라도 캐내야 하니 참는다.’
팽무일이 화를 꾹 누르고는 얼굴에 억지웃음을 띠며 다시 좋은 말로 개소문이를 달랬다.
“화 좀 그만 내고… 이 책의 주인이 누구냐? 누군지 알아야 돌려드리지 않겠느냐?”
“뻔한 것을 어찌 묻는 것이냐! 온달 장군의 게르 안에서 훔친 물건인데, 어찌 주인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냐?”
개소문이가 버럭 화를 내자, 조금 떨어져 앉은 항가이가 힐끔 쳐다보더니, 하늘에 떠 있는 검수리로 시선을 옮겼다.
“온달의 게르 안에 있다고 이게 온달 것이란 법은 없지 않느냐?”
“그럼 누구 것이란 말이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일축하며 개소문이가 팽무일을 노려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전혀 아이답지 않았다.
“아니, 아니. 화만 내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고. 나도 이 책이 내가 원하던 물건이 아닌 듯하여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 중이란다. 즉, 우린 서로 생각이 일치한다는 말이야.”
팽무일이 주인에게 돌려 줄 생각이라 말하자, 개소문이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녕, 그 말이 사실이더냐?”
“당연히 사실이지. 내가 이 책을 보니, 빠진 부분이 딱 눈에 들어오거든. 하여 온달이 이걸 익혔을 리는 없을 것 같아서 주인이 누구인지 찾아 돌려줘야 할 것 같구나.”
“빠진 부분이 있어서 온달 장군이 익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
팽무일의 말에 개소문이가 정색해 반박했다.
“얘야, 나는 일전에 온달과 겨뤄 본 적 있는 사람이란다. 그때 온달은 거대한 검과 신력을 지녔지만, 무공은 익히지 못한 듯했지.”
망우산에서의 온달과 대결을 떠올리며 팽무일이 말하였지만, 개소문이는 자신이 존경하는 온달을 팽무일이 평하는 것이 못마땅해 그저 노려만 보았다.
“그렇게 노려보다가 눈알 빠지겠다. 아무튼, 그런데 소문으로 듣자하니, 온달이 배찰산에서 북주와 돌궐 연합군을 아주 박살내어 고구려 왕에게 검신이란 칭호를 얻었다지?”
“그렇다. 온달 장군께선 배찰산의 영웅으로 검신이라 칭송받으신다. 네놈 따위는 감히 온달 장군의 무공을 논할 수 없다.”
“아니야. 논해야 한단다. 그래야 이 책의 주인을 찾아주지.”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달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생각에 이 책의 무공을 온달이 익혔을 리 없는 것 같은데, 너는 온달이 수련하는 것을 봤을 테니, 네가 이 책을 한 번 보겠느냐?”
팽무일이 책을 펼쳐 개소문이의 눈앞으로 들이대었다.
읽고 싶지 않아도 눈을 감지 않는 한,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니, 편히 읽어 보거라. 분명 뭔가 빠진 부분이 있어서 온달이 익히지 않았을 듯해서 하는 소리란다.”
여전히 팽무일은 좋은 말로 개소문이를 달랬다.
개소문이가 첫 장을 눈으로 훑자. 팽무일이 다시 다음 장을 넘겨 눈으로 훑게 했다.
이들이 파천신검을 살피는 동안, 하늘에 떠 있던 검수리가 내려와 항가이 곁으로 다가왔다.
이 검수리는 항가이의 부족민들이 키우며 사냥과 연락을 취하는데 사용하고 있었다.
검수리가 항가이를 찾아왔다는 것은 흩어졌던 그의 부족 전사 십여 명이 부족으로 돌아가 그를 찾고 있음을 의미했다.
항가이는 자신의 옷을 찢고 손끝에 피를 내어 대원(大原)이라 적은 후 검수리를 다시 날렸다.
평소 글을 배우지 못한 항가이였기에 긴 글은 적을 수 없어 목적지만 간단히 적은 것이다.
대원이란, 한족인 중국인들이 그들의 근거지인 주나라의 왕기를 중원(中原) 또는 중토라 부르듯이, 요동 일대의 광활한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수 황제 양견은 대원마저 취해야 진정한 천하를 취해 진시황을 앞선다 믿고 있었다.
이렇듯 대원은 실로 광대하면서도 피를 부르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항가이가 검수리 다리에 매어 보낸 대원이란 두 글자는 요동으로 진입하기 전 만나는 수의 전초기지인 영주를 뜻했다.
영주는 항가이의 부족민들이 사냥한 짐승 가죽을 식량과 교환하기 위해 종종 들렸던 곳으로 항가이가 적은 대원이 이곳을 의미함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항가이가 검수리를 날려 보낼 때까지도 팽무일은 개소문이에게 책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긴 팽무일이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린 후 물었다.
“어떠냐? 온달의 무공이 맞느냐? 내 생각엔 이 무공은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온달이 익히지 않았을 듯한데 말이야. 그렇다면 주인은 따로 있을 테니, 그 주인을 찾을 때까지 내가 보관해야 하지 않겠느냐?”
넌지시 운을 띄우자, 개소문이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닥치거라! 이 무공비급은 온달 장군의 것이니, 장군께 돌려드려야 한다.”
개소문이는 초식을 살펴보며, 온달이 수련하던 것과 다름을 이미 깨달았지만, 이 무공비급이 온달의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어리지만 개소문이는 이미 조의선인에 들어 수련 중이었고, 백두검법과 비검술의 기본은 익힌 상태였다.
파천신검의 초식이 백두검법에 비하여 심오하며 그 위력이 상당한 듯 보이지만, 백두검법의 방어 초식과 일맥상통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개소문이는 말 수가 적지만, 아둔하지는 않았기에, 온달이 수련하던 파산귀검도 글로 설명된 귀결을 읽었다면,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온달 장군께서 이 무공을 수련하지 않으신 것은 이미 익히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무공은 방어 일변도의 초식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은 기술되어 있지 않으니, 전장에서 크게 활용 가치가 없어 집중하여 수련하지 않으셨을 것이야. 그렇다하여, 결코 이 도적놈이 갖게 할 수는 없다. 반드시 온달 장군께 전해야 한다.’
개소문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팽무일이 빙그레 웃었다.
“애야, 네가 이 책을 볼 줄 아는 듯하구나. 그렇지? 온전한 형태가 아닌데도 온달의 것이라 단정 내린 이유가 무엇이더냐? 온달이 수련하는 것을 본 것이냐?”
평무일의 물음에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개소문이의 성격 상, 바른 말만 튀어 나왔다.
“장군께서 이 초식들을 수련하시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무공비급은 장군 것이 맞다.”
“어째서? 이렇듯 보법과 심법이 누락된 초식은 실전에선 그저 품세 놀음에 불과할 뿐인데.”
“보법과 심법이 누락된 것은, 우리 조의선인들의 백두검법과 비검술의 보법, 심법을 사용하면 되기에 따로 기재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제야, 팽무일도 깨닫는 바가 있어 무릎을 탁 쳤다.
“오호라! 그리하구나. 조의선인… 그래, 그때도 조의선인이 함께 있었지.”
망우산에서 머리를 짧게 밀고 조복을 입었던 해진을 떠올리며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개소문이도 승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검은색 일색의 조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거였구나.”
팽무일이 다시 무릎을 탁 치며 빙그레 웃었다.
“애야, 내게 조의선의의 보법과 심법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거절한다.”
“내게 보법과 심법을 가르쳐 줄 경우 너를 풀어줄 것이야. 솔깃하지 않느냐?”
조의선인의 보법과 심법은 조의선인에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으로 크게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다만, 배우기 위한 전제 조건인 조의선인부터 되어야 했다.
“너는 조의선인이 아니기에, 배울 수 없을 뿐더러, 온달 장군의 비급을 훔친 도적인데 내가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느냐?”
개소문이의 말에 팽무일이 대뜸 파천신검 비급을 개소문이의 앞에 툭 던졌다.
“이걸 이렇게 네게 주면 나는 도둑이 안 되는 것이더냐?”
개소문이가 당황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애야, 솔직히 말하마. 네게서 보법과 심법을 배우고, 이 책의 적힌 무공을 내가 익힌다면, 나는 이 책을 미련 없이 네게 줄 것이다. 네가 온달에게 전하든 그건 그때 알아서 하면 되느니라.”
“네가 감히 온달 장군님의 무공을 익히겠단 말인가? 더구나 나보고 도우란 말이더냐?”
개소문이가 어이없어 바로 물었다.
“바로 그렇단다.”
팽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자, 개소문이는 단호히 잘라 말했다.
“내가 설령 네 손에 죽을지언정 가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기는 왜 죽는다고 하는 것이냐. 잘 생각해야 하느니라. 나는 배우지 못할 바엔 이 책을 그냥 불살라 버릴 것이란다. 그리고 거추장스런 너는 풀어줄 것이고 말이야. 너는 그저 빈손으로 온달에게 돌아가면 되느니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개소문이에게 팽무일은 목숨이 아닌, 책을 없앨 것이라 말하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