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갓쉰동 연개소문 (4)
“공주, 어찌 이러시오?”
온달이 놀라 황망히 평강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평강은 거듭 고개 숙여 온달에게 용서를 구했다.
“장군, 여인네의 좁은 속이… 도적질을 했나이다.”
주위에 경우와 막바우는 물론이요.
카사르마저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 공주의 신분인 평강이 이토록 용서를 구하자, 온달은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마냥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를 달래기 바빴다.
“아니, 공주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요. 오해나… 뭐 그런 거 말이요. 어찌 된 영문인지 속 시원히 말이나 해보시구려.”
카사르는 평소 격식을 따지지 않고 부족민들과 어울려 술을 즐기며, 마음이 상한 일이 있을 경우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며 거침없이 행동했지만, 평강의 이런 모습에는 크게 당황해 게르 입구로 발을 옮겨 누가 오는지 살피기 바빴다.
막바우 역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자신이 괜한 곳에 있음을 한탄하였다.
경우만이 침착히 평강의 이야기를 해석하기 바빴다.
‘공주께서 말씀하신대로 도적질을 하셨을 리는 없지만, 파천신검을 지니고 계셨다면 의심받기 딱 좋다. 개소문이가 그 비급을 훔쳐 달아난 것이 분명하니, 서둘러 잡아야 일이 커지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말을 몰아 개소문이의 뒤를 쫓고 싶었지만, 온달과 평강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어 마음만 조급했다.
“낙랑사냥 대회 전, 객잔에서 해진님이 파천신검을 기록하신 일이 있으셨지요.”
평강의 말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선대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을 기억을 더듬어 글로 남기셨지요.”
“그 기록하신 것을 보여주신 일도 있으셨지요.”
“그렇소. 그런 일도 있으셨지요.”
“하온데, 파천신검은 방어 초식에 심대한 오류가 있어 실전에서 사용이 금지되었고, 해진님은 공격 초식만 따로 떼어내어 파산귀검이라 명하셨지요.”
“그렇소. 그 파산귀검을 내게 말로 전수하셨으나, 내가 아둔하여 공주가 글로 남기고 해진님의 동작을 그림으로 남겨 무공비급으로 지니게 된 것 아니오?”
“제 욕심에… 훗날 장군께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여, 근래 이 적봉진에 돌아와… 해진님이 보여주신 파천신검 방어 초식을 기억해 내어 따로 남겼나이다.”
“아니, 그런 일이? 낙랑사냥 대회 전에 한 번 본 것을 기억해내어 무공비급으로 만들었단 말이오? 그게 가능하오?”
온달이 놀라 큰 눈이 더욱 커졌다.
한 발 뒤로 물러섰던 막바우도 덩달아 놀라 소리쳤다.
“우와! 공주님 대단하십니다. 이야! 어찌 그걸 기억해내실 수가 있으십니까? 대단, 대단.”
보다 못한 경우가 막바우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면박을 줬다.
“좀 닥치시게.”
“아니, 이건 닥칠 일이 아니야.”
경우에게 핀잔을 들어도 막바우는 계속 입을 놀렸다.
“공주님 그리고 온달 장군님, 제 생각엔 그건 도둑질이 아니옵니다.”
막바우가 정색을 하고 자신 있게 말하자, 온달과 평강은 물론이요.
경우마저 막바우의 입만 바라보았다.
게르 입구에 서서 밖을 살피던 카사르도 막바우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한 발 다가왔다.
모두의 시선을 끌자, 막바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릇 도둑질이란 이렇듯 형체가 있는 것을 주인의 허락 없이 취하는 것이옵니다.”
막바우가 경우의 활을 덥석 쥐었다.
“아니, 이 사람이! 활 이리 주시게!”
갑작스레 막바우에게 활을 뺏긴 경우가 놀라 소리치자, 온달이 손을 내저으며 경우를 제지했다.
“우선 말 좀 더 들어봅시다.”
활을 취한 막바우가 의기양양해져 말을 이어 나갔다.
“하온데, 공주님께선 허락 없이 보고 베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훔쳐 본 것도 아닌 해진님이 보여주신 것을 기억하여 책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막바우의 말처럼 파천신검 초식은 훔쳐 본 것이 아닌 해진이 보여준 것이었다.
“그랬지. 그때 해진님이 보여주셨지.”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께서 너무도 총명하시어 머릿속에 새기신 것을 몇 해 지나 글로 정리한 것이라 도적질로 보기 어렵사옵니다. 해진님께서 공주님께 보여주실 때 머릿속에 담아두지 말라 당부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자신의 머릿속에 지닌 걸 꺼내 글로 적은 것이온데, 어찌 도둑질이 되겠습니까?”
막바우가 자신만만히 단정을 내리자, 경우와 카사르가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막바우 장군 대단하시오.”
어눌한 고구려 말로 카사르가 칭찬하자, 경우도 거들었다.
“그렇네. 막바우 자네 정말 대단하이.”
막바우는 배우지 못해 지식이 부족했지만, 눈치가 빨라 결코 어수룩한 인물은 아니었다.
“대단하니, 장군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리 놀라고 그러나.”
막바우가 으시대며 거드름마저 피웠다.
그러나 평강은 여전히 수심이 가득하여 고개를 저었다.
“막바우 장군의 말씀도 일리는 있사오나, 해진님께 글로 남겨도 된다는 허락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본래 파천신검은 조의선인의 큰 스승이 후대의 큰 스승에게만 구전으로 전하는 무공이옵고, 주인의 허락을 얻지 못한 것을 글로 남긴 것은 죄가 맞습니다.”
평강의 말에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말대로 죄가 맞는 것 같소.”
온달마저 죄를 인정하자, 속이 터질 지경이 된 경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긴 뭐가 맞습니까? 막바우 말이 맞지!”
“장군까지 어찌 그러십니까? 공자 맹자의 말을 기억해 책으로 남긴 자들 모두가 도둑이옵니까? 또 그 책을 익혀 다시 책으로 남긴 이들도 도둑이옵니까? 예로부터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 했습니다.”
막바우도 마치 온달을 타이르듯 장황히 말하였으나, 남의 말에 반박하길 좋아하지 않는 온달이 웬일인지 정색하고 또박또박 반박하였다.
“책 도둑도 도둑일세. 서책이 얼마나 귀하고 비싼데 도둑이 아닐 수 있는가? 공맹의 말을 기록한 이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고, 공맹에게 배운 것을 글로 남겨 후대에 전한 것일세. 공맹이 살아생전 다른 이에게 비밀로 하라 명하였다면, 그들도 글로 남겨 전하지는 않았을 것일세. 실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것은 죄가 맞네.”
너무도 단호한 태도에 막바우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평강은 이렇듯 사리분별이 바른 온달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온달에게 무척이나 섭섭했다.
“제가 죄인이옵니다. 장군.”
이젠 온달에게 서운한 마음에 평강은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장군께서 어찌 저리 야속하실 수가…….’
“공주의 죄는 나로 인한 것이니, 나 역시 죄인이오. 선후가 바뀌었지만, 해진님께 파천신검 비급을 드린 후 내가 거듭 용서를 구하겠소.”
온달의 자상한 말투에 그제야 평강이 고개를 들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선 서둘러 개소문이를 찾는 게 우선입니다.”
경우가 추적을 서두르자고 말하자 온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문이는 결코 파천신검을 익혀선 아니 되오. 해진님께서 말씀하시길 방어 초식은 심대한 오류가 있기에 실전에 사용할 수 없다 하셨소. 그 아이가 무공을 잘못 익혀 해를 입기 전에 서두릅시다.”
온달이 파천신검을 훔친 개소문이를 염려하여 말하자, 경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적을 걱정하다니, 온달님은 참으로 여전하시구나. 어린놈이 벌써부터 도둑질이면, 커서는 더한 짓도 저지를 터인데… 잡아서 반드시 혼쭐을 내야 한다. 온달님을 위해서라도 내가 해야 한다.’
처음 볼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순박한 온달이 걱정되는 경우였다.
온달이 바로 추격대를 꾸리자, 일대의 지리를 잘 아는 카사르가 부족 전사를 이끌고 도왔다.
경우도 개소문이를 벌하기 위해 온달을 따라 나섰다.
드넓은 초원 어디로 향했는지 알 길 없기에, 카사르 부족 전사들은 사방으로 말을 몰아 내달렸고, 온달과 경우의 추격대는 개소문이가 왔던 길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하여 남으로 향했다.
“장군 너무 걱정 마시오. 어린아이가 홀로 말을 몰아갔으면, 멀리는 못 갔을 것이오.”
카사르가 수심 가득한 온달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날이 저물 무렵까지도 개소문이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평선까지 거칠 것 없이 펼쳐진 초원 끝까지 살필 수 있는 카사르의 시야 그 어디에도 개소문이는 보이지 않은 채 어둠이 내렸다.
“불빛도 없소이다.”
카사르가 어둠 사위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멀리 갈 수는 없을 것인데…….”
초원에서 불빛은 멀리는 말을 달려 하루거리까지도 전해질 수 있었다.
“분명 반나절 거리 안에는 있을 것인데… 장군, 그 아이는 아마도 불도 켜지 않고 야영을 하는 것 같소.”
카사르의 말에 온달이 의아해 물었다.
“이 야심한 밤에 불도 켜지 않고?”
“너무도 어두워 불도 켜지 않고 말을 달리지는 않을 것이오. 그 아이는 추격을 예상한 모양이오. 추격을 피하기 위해 어딘가 저 벌판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야영을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소.”
“혼자, 이 어둠 속에서? 허허, 이런 이런… 실로 큰일이오. 서둘러 찾아야 할 것인데… 어린 것 혼자 어찌 야영을 할꼬.”
카사르의 설명에 온달이 더욱 수심 가득해져 개소문이를 걱정했다.
“카사르 대족장, 우리 좀 더 찾아보도록 합시다. 부탁하오.”
온달의 간곡한 말에도 카사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될 말이오. 이 밤에 추적을 하다간, 오히려 지나쳐 갈 수도 있소. 헌데, 지리도 모르는 고구려 아이가 홀로 이처럼 멀리까지 온 것이 좀 이상하오.”
카사르의 말에 온달이 바로 재촉했다.
“허면, 혹여 도적이 따로 있고 개소문이는 그 도적에게 붙잡혀 간 것일지도 모르오. 도적에게 붙잡혀 있다면 서둘러 구해야 하오.”
그러나 카사르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이 혼자 멀리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따로 도적이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소. 도적이 있었다면, 홍산 밑에 있는 우리 부족민들이나, 홍산 위 고구려 군사들이 어찌 못 보았겠소? 도적이 날개 달린 것도 아니고, 장군의 게르에서 홍산 아래까지 도적의 흔적은 찾지 못하였으니, 그 아이가 혼자인 것은 분명하오.”
카사르의 말을 경우도 거들었다.
“도적이라면, 장군의 게르 안 값진 물건들을 취했을 것인데, 고작 서책 하나만 취했습니다. 즉, 그 책을 알아 본 자의 소행이란 말이지요. 안타깝지만, 장군의 무공을 배우고 싶은 어린 욕심에 개소문이가 저지른 짓이 분명하옵니다.”
경우의 말처럼,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을 알아보지 못했다만, 팽무일은 온달의 게르 안 다른 값진 물건을 취해 떠났을 것이 분명했다.
개소문이가 파천신검을 알아 본 것이, 불행의 시초인 셈이다.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온 개소문이가, 초원에선 도적 누명마저 쓰게 되었으니, 실로 고달픈 인생이었다.
개소문이를 걱정하던 온달도 카사르와 경우의 말을 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어 더는 재촉하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 기다려야 했다.
‘어린 마음에 저지른 욕심이라면, 좋은 말로 가르치고 타이르면 된다. 부디 개소문이가 멀리 가지 않아야 할 것인데.’
* * *
온달이 야영하는 곳에서 남으로 반나절 거리 쯤.
카사르의 예상처럼 개소문이는 불도 켜지 않고 야영을 하고 있었다.
다만, 몸이 꽁꽁 묶인 채 팽무일의 곁에 누워 있었다.
“팽 선생, 저 아이 뭐라도 먹여야 하지 않소?”
항가이가 어둠 속에 누운 개소문이를 가리켰다.
온달의 추적대가 두려워 불도 켜지 않았기에, 그저 달빛에 의지해 형체만 파악할 수 있었다.
“뭘 먹이려면 줄을 풀어줘야 하는데, 이놈이 워낙 사나워서 혹여 도망이라도 치면 어둠 속에서 낭패 아니오. 그냥 굶깁시다. 내일 날 밝으면 그때 좀 줘도 될 거요.”
팽무일이 심드렁이 답하자, 항가이도 일리가 있다 생각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문이는 팽무일과 항가이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이들이 불도 켜지 않고 야영하는 모습에 온달이 추적대를 이끌고 자신을 찾고 있다 생각하여 내심 안심하였다.
‘장군께서 나를 찾으시는 거야. 장군이 두려워 이 도적들이 불도 못 켜는 것이야.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선 분명 장군이 지금도 말을 달려오시고 있을 것이야. 장군이 오실 때까지 저 거북이처럼 생긴 팽무일이 비급서를 따로 빼돌리지 못하게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
사방이 어두워 어디가 북인지, 어디가 홍산 방향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개소문이는 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말을 달려 올 온달을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지평선에 해가 떠오를 때까지도, 온달의 추적대는 오지 않았다.
날이 밝기 무섭게 항가이가 말에 오르며 팽무일을 재촉했다.
“서둘러 가야 하오. 추적대가 흙먼지를 알아보고 우리 뒤를 쫓을 것이오.”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리자, 항가이의 부족 전사 십여 명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찌 흩어지는 게요?”
팽무일이 놀라 묻자, 항가이가 빙그레 웃었다.
“추적대를 피하기 위해서요. 뿔뿔이 흩어져야 추적대도 혼란해 할 것 아니오. 곧 흙먼지를 쫓아 놈들이 올 터이니, 우리도 떠납시다.”
이리 하여, 항가이와 팽무일이 오른 두 필의 말만 계속 남서 방향으로 향했다.
“듣자하니, 한왕 양양이 무림 고수를 초청한다 들었는데, 팽 선생도 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덕분에 나도 수나라 장수 한 번 해봅시다.”
항가이의 말에 팽무일이 손을 내저었다.
“거긴 아니 되오.”
“어찌 안 되오?”
“한왕은 현재 탁현에 있는데, 거긴 내 동생이 나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오.”
“어찌하여 동생이?”
“그럴 일이 있소. 우린 차라리, 영주로가 태자인 양광을 모시는 게 좋을 듯하오.”
수의 태자를 모시겠다는 팽무일의 말에, 항가이는 입이 귀에 걸리며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