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갓쉰동 연개소문 (3)
팽무일은 금강대도를 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 홍산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보고 있었다.
오늘 마침 온달이 평강과 홍산을 내려간 후, 막바우와 경우마저 자리를 비우자 게르 안에 침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아무리 뒤져도 금강대도는 보이지 않았다.
점차 마음이 조급해지던 차에 개소문이가 게르 입구를 막고 서서 호통을 친 것이다.
“애야, 나는 온달 장군과 오랜 인연을 지닌 팽무일이란 아저씨란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되니, 이리 가까이 와 아저씨에게 인사를 올리거라.”
팽무일이 히죽히죽 웃으며 개소문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온달과 창잡이 놈, 활잡이 놈이 이곳에 없는 이상 고구려 병사들이 몰려온들 두려울 것은 없다. 이 꼬마가 온달과 관련 있는 것 같으니, 잡아가 금강대도와 바꾸도록 하자.’
이렇듯 팽무일이 음흉한 계책을 세우며 개소문이를 좋은 말로 부르는 사이, 개소문이는 팽무일의 발밑에 떨어진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표지에 적힌 파천신검 네 글자가 개소문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파천신검? 사부님의 무공은 파산귀검인데… 어쨌든, 저것은 사부님의 무공을 기록한 서책이다. 평강 공주께서 늘 소중히 다루던 귀한 책인데… 이자가 게르 안을 마구 뒤지며 함부로 바닥에 떨구었구나. 감히…….’
개소문이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불끈 쥐자, 묘한 기색을 느낀 팽무일도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책? 이 책 때문에 저놈이 화난거야? 뭔 책이지?’
팽무일이 발끝으로 책을 툭 차 공중에 띄우더니, 짧은 팔을 빠르게 놀려 책을 쥐었다.
절묘하고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이자가 게르 안에 침입할 때도 그 몸놀림이 신묘하더니, 지금 책을 낚아채는 재주도 보통이 아니구나. 그나저나 저 귀한 책을 저자가 취했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범도 두려워하지 않는 개소문이었지만, 팽무일이 도망칠까 우려되어 게르 밖을 향해 외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개소문이는 자신의 외침과 동시에, 팽무일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생각하며, 달려드는 팽무일을 향해 일격을 날릴 준비도 단단히 했다.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선 개소문이가 고개를 돌리자, 팽무일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렸다.
“침입자다!”
그러나 팽무일을 경계하느라, 목청은 생각보다 크게 나오지 않았다.
역시, 팽무일은 개소문이가 사냥하던 범이나 대련하던 조의선인들보다 한 수 위였다.
달려드는 팽무일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지만, 허공을 가를 뿐 팽무일의 몸에 조금도 타격을 주지 못하였다.
둔해 보이는 몸과 달리 경공만큼은 뛰어난 팽무일이었기에, 코앞까지 미끄러지듯 다가와 두툼한 손으로 개소문이의 목을 움켜쥐고는 히죽 웃었다.
“이 책 뭔지 알려 줄 수 있느냐?”
목이 잡혀 다라마저 들리자, 개소문이는 소리쳐 도움을 청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팽무일을 대적하기로 결심했다.
지면에서 들린 다리에 힘을 주어 무릎을 꺾어 획 들어 올리고는 그대로 팽무일의 턱을 가격했다.
퍽!
꽤 강한 타격음이 울렸지만, 팽무일은 조금 고개가 들릴 뿐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퉤! 얘야, 턱은 급소란다. 그렇게 마구 차다간 죽는단 말이야.”
입술이 터진 팽무일이 피를 뱉으면서도 히죽거리며 말했다.
“죽… 죽으라고 찬 것이다.”
목이 조여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에 개소문이가 간신히 말을 맺었다.
“아니, 내가 죽는단 말이 아니고. 네가 죽는단 말이란다. 크크크.”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비웃으며 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컥!”
개소문이는 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겨우 비명만 남기고 팽무일의 손아귀에서 축 늘어졌다.
팽무일은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지 잠시 귀를 기울이고는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빠르게 게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개소문이의 목을 쥔 상태에서 미끄러지듯 게르와 게르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였다.
신속하면서도 무척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빠르게 외곽으로 이동한 팽무일은 망설임 없이 홍산 아래로 뛰어 내렸다.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개소문이도 정신을 차렸다.
‘아니, 여긴?’
여전히 팽무일에게 목을 잡혀 정면을 볼 수는 없었지만, 홍산 정상에 세워진 적봉진의 목책과 게르들이 멀어지고 있었다.
몸이 솟구쳤다 뚝 떨어지듯 내려오던 팽무일이 홍산의 가파른 비탈에 발이 닿자, 다시 발을 굴러 껑충 뛰어올랐다.
이렇듯 몇 차례 지면을 솟구치기를 반복하자, 어느새 홍산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팽무일의 손에 잡힌 개소문이는 솟구칠 때마다 목이 조여와 정신이 아득해졌고, 결국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홍산 아래에 내려선 뒤에도 팽무일은 몸을 솟구치기를 반복하며 쉬지 않고 내달렸고, 홍산은 점점 지평선 끝으로 멀어져 갔다.
* * *
지평선 끝에선 항가이가 십여 명의 수하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칼 가지러 간 사람이 애는 왜? 그 애는 뭐요?”
항가이의 물음에 팽무일이 전리품이라도 되는 듯 으시대며 말했다.
“온달이 데리고 있던 아이올시다. 온달과 꽤 친분이 있는 듯하여 잡아왔소이다. 하하하.”
그러나 항가이는 팽무일이 잡아온 아이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몸값 받으시려고? 허구헌 날, 칼 타령이시더만, 그래 칼은 못 찾은 게요?”
팽무일의 몸에 그럴싸한 칼이 보이지 않자, 항가이가 의아해 물었다.
“그게 아마도 워낙 대단한 칼이다 보니, 온달이 지니고 다니는 모양이외다.”
“그렇다면… 헛수고 아니오? 우리 힘으로 그 고구려 놈을 어찌 대적하오? 이제 그 칼은 포기하시구려.”
항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였으나, 팽무일은 여전히 기분 좋은 듯 통쾌히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뭐, 그러시지요. 내 칼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온달도 잘 알 터이니 함부로 남 주진 않을 테고, 좋은 날, 좋은 때에 다시 찾아가면 되겠지요. 하하하.”
칼을 찾지 못하였음에도 팽무일이 시원시원히 답하며 한바탕 웃자, 항가이는 의아해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왜 웃는 것이지? 혹시, 저 꼬마를 잡아와서 기분이 좋은 것인가? 보통 꼬마는 아닌가 보구나.’
항가이의 생각과 달리, 팽무일이 이토록 기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 품속의 책! 이 책은 온달 그놈이 익힌 무공비급일 것이다. 이 책이야 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온달의 강함은 바로 이 책 때문일 것이야. 이 책! 이 책을 통해 나도 상승무공을 익혀 온달은 물론, 내 사랑스런 아우 무성이마저 누르고 팽가장의 장주가 되고 말리라!’
이렇듯 야심찬 생각에 마냥 기쁜 팽무일이었다.
“이보시오 팽 선생. 그만 웃고 서둘러 이곳을 떠납시다.”
이 일대가 대족장이 된 카사르의 영토임을 잘 아는 항가이가 불안하지 팽무일을 재촉했다.
“그럽시다. 일단 이 아이부터 좀 잘 묶어 주시구려.”
팽무일이 개소문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발로 밟고 말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개소문이는 항가이의 수하들에게 꽁꽁 묶여 말 위에 올려졌다.
“자, 그럼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보도록 합시다.”
온달의 무공비급을 살펴보기 위해 마음이 급한 팽무일이 오히려 항가이를 재촉하며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 * *
해질녘이 되어서야 홍산 아래에 도착한 온달과 평강은 때 마침 카사르와 함께 사냥에서 돌아오는 경우와 막바우를 만났다.
“카사르 대족장, 사냥 다녀오시는 길이시오? 많이도 잡으셨구려.”
온달의 물음에 카사르가 빙그레 웃으며 말 위에 실린 짐승들을 가리켰다.
“경우 장군의 활 솜씨가 워낙 출중하여 나보다 더 많이 잡더이다. 하하하.”
과연 카사르의 말처럼 경우의 말 위엔 사냥한 짐승들이 가득하였다.
큰 것들은 없었지만, 그 수는 상당하여 카사르가 칭찬할 만하였다.
반면에 막바우의 말 위엔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막바우 자넨?”
온달이 의아해 물으니, 막바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장군, 나는 창잡이잖소. 뭘 그리 물어보십니까? 무안하게.”
막바우의 대답에 온달이 허허 웃으며 함께 홍산에 오르자 말했다.
“오랜만에 카사르 대족장과 술이나 한잔 합시다. 마침, 소개할 아이도 있습니다. 개소문이도 혼자 무척 무료했을 듯하니 어서 가봅시다.”
온달이 항상 자신을 따르는 개소문이를 생각해 서둘러 홍산에 올랐다.
그러나, 쪼르르 달려 나와 자신의 뒤를 따를 개소문이가 보이지 않았다.
“애가 어디를 갔나?”
온달이 주의를 둘러보면 개소문이를 찾자, 평강이 웃으며 말하였다.
“일단 게르로 가서 식사 준비부터 하시지요. 개소문이는 우리 게르 안이 시끌벅적해지면 슬그머니 찾아와 장군 곁에 서 있을 것이옵니다.”
평강의 말처럼, 개소문이는 어디에 있든, 온달의 호쾌한 음성이 들리면 조용히 다가와 그림자처럼 서 있곤 했었다.
“그럽시다.”
온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자신의 게르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게르 안으로 들어선 순간.
모두가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누가 침입한 건가요? 수의 간자일까요? 이 적봉진이 수나라 놈들에게 노출된 건가요?”
막바우가 난장판이 된 게르 안을 훑어보며 소리치자, 눈치 빠른 경우가 손으로 막바우의 입을 막고는 나지막이 말하였다.
“닥치시게. 수의 간자면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안을 살피지, 이렇듯 게르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채 가지는 않네.”
“그, 그럼 뭐야?”
“도적이네.”
경우의 짧은 대답에 카사르와 막바우가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리 부족은 친구인 고구려의 물건을 탐하지 않소이다. 원하면 그대들이 주지 않소?”
카사르가 대뜸 변명부터 하였다.
카사르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막바우가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애들인가? 이놈들이 감히 장군의 게르에서 도적질을 해?”
“좀 닥치시게.”
뭔가를 알고 있는 듯 경우가 냉정히 막바우의 말을 잘랐다.
“경우 자네 왜 자꾸 사람 말을 끊나?”
그때, 평강이 흩어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차분히 말하였다.
“장군, 개소문이부터 찾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평강의 말에 그제야 온달도 개소문이를 떠올리며 걱정하였다.
“그렇군. 개소문이가 혹여 도적에게 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니 서둘러 찾아봐야겠구려.”
그러나 온달의 걱정과 달리, 이번에도 경우가 냉정히 말하였다.
“개소문이는 해를 입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경우, 어찌 그렇소? 개소문이는 괜찮은 것이오?’
이 정도 소란이라면 언제나 게르 근처에 있던 개소문이가 분명 알아채고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개소문이의 성품상 반드시 도적과 실랑이를 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우는 개소문이가 무사하다 말하니, 온달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사냥을 떠날 때, 개소문이는 이 게르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녀석 성격상, 장군이 돌아올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만, 없을 뿐더러… 게르 안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은…….”
경우가 말을 끝맺지 못하자, 막바우가 답답해 재촉했다.
“어서 말하시게. 빨리 듣고 서둘러 개소문이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이 게르 안… 개소문이의 짓일세.”
개소문이를 도적으로 단정 지으며 말하자, 온달과 막바우가 놀라 멍하니 경우를 바라보았다.
“공주 마마, 없어진 물건 중에 비급서가 있사옵니까?”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챈 듯 경우가 단정 지으며 평강에게 물었다.
평강이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혹여, 파산귀검… 비급서인가요?”
경우는 개소문이가 온달의 파산귀검을 배우길 갈망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온달이 가르침을 내리지 않자, 어리고 성급한 마음에 무공 비급을 훔쳤을 거라 예단 내린 것이다.
평강은 경우의 물음에 잠시 뜸을 들인 후, 품 안에서 책을 꺼냈다.
표지에 파산귀검이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뭐야? 경우 자네가 개소문이를 공연히 의심한 거잖아!”
막바우가 경우에게 호통을 치고는 온달에게 말하였다.
“장군, 당장 개소문이를 찾아야겠습니다. 이 어린것이 분명 도적에게 해를 당한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 없을 리가…….”
“막바우 장군.”
평강이 막바우를 불러 그의 말을 끊었다.
“공주님, 말씀하시옵소서.”
거친 막바우도 평강에겐 예를 다해 물었다.
“무공비급서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네? 거기 있는 건?”
막바우가 놀라 평강이 쥐고 있는 파산귀검 비급서를 가리켰다.
“이 비급서는 파산귀검이고, 파천신검 비급서가 사라졌습니다.”
사냥 대회 전, 해진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조의선인의 오의를 글로 적은 것이 파천신검이었고, 이후 그가 온달에게 말로 가르친 것은 파산귀검이었다.
평강은 양해를 구해 해진이 온달에게 말로 가르치던 것을 글과 그림으로 남겨 비급서를 만들었다.
이 비급서를 통해 따로 해진의 가르침이 없어도 온달은 평강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해진이 객잔에서 보여주었던 파천신검 귀결을 평강이 기억해 내어 따로 비급서를 만들었는데, 해진은 물론, 온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었다.
“파, 파천신검이요?”
파천신검은 들어본 적도 없는 막바우가 당황해 물었다.
온달도 평강이 어찌하여 파천신검을 지니고 있었는지 의아해 물었다.
“공주, 파천신검이라니요. 그건 아직 해진님께 배우지 못한 것이고… 허락도 얻지 못하였는데…….”
조의선인의 큰 스승이 큰 스승에게만 전하는 파천신검은 오랜 구전으로 인해 치명적인 오류를 지니게 되어 실전에선 사용을 금하고 있었다.
하물며, 해진은 온달에게 파천신검을 가르치지 않았으니.
오류를 감안하더라도, 배울 수도 배울 자격도 없었다.
온달의 물음에 평강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말하였다.
“장군… 용서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