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팽가장의 비극 (13)
아직 의식이 끊기지 않은 팽무성의 시선은 미동도 없는 채 부인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했구나.’
꺼져가는 팽무성의 눈에, 금화법왕의 제자들과 하오문의 졸개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약탈을 하고 있었고, 온동이 겁에 질린 독고영을 꼭 안고 있었다.
‘미안하오. 소영웅.’
단목순의 검끝이 목에 닿는 날카로운 감촉을 느끼면서도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담장을 소리 없이 뛰어넘어 안으로 날아들더니, 빠르게 소향에게 달려가는 모습이 팽무성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때 마침,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남궁민이 다시 칼을 쥐고 섰다.
그도 누군가 담장을 넘어 소향에게 접근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모두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 두기 위해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려 외쳤다.
“너무 많이 죽었다. 결코 좌시할 수 없다.”
기왓장이 들썩이고 옷깃이 펄럭일 정도의 웅후한 내력이었다.
“지독한 놈. 아직… 살아 있었나? 불살은 저놈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단목순이 남궁민에게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온몸이 피로 범벅이 된 남궁민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며 모두의 시선을 이끌고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이십팔숙이 다시 앞으로 나왔다.
팽무성의 목을 가르던 단목순의 검도 일순 멈추었다.
“실로, 질긴 인생이로다.”
단목순이 비웃듯 중얼거렸다.
이렇듯, 모두의 시선이 남궁민에게 향한 사이 소리 없이 소향에게 접근한 사내가 그녀 번쩍 안아 들고는 팽무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 팽가장에서 대력거사에게 망신당하던 것을 가림이 구해준 노진평이었다.
노진평에게 안긴 소향의 등엔 금강대도가 매어 있었고, 그녀의 가슴엔 팽무성의 어린 딸 팽운이 안겨 있었다.
노진평의 무공은 별 볼일 없었지만, 소리 없이 움직이는 동작은 제법 훌륭했다.
그러나 모두가 남궁민과 이십팔숙의 접전에 시선이 팔린 사이에도 노진평의 기척을 눈치 챈 제갈여가 소리쳤다.
“누구냐!”
제갈여의 외침에 하오문의 제자 넷이 노진평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모두를 구할 수 없어 미안하오!”
노진평은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깨닫고, 서둘러 팽무일에게 외치고는 바삐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진평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볼 조피골이 아니었다.
“저놈을 잡아라! 한 놈도 빠져나가선 안 된다!”
조피골의 외침에 사방에서 하오문의 졸개들이 몰려들었고, 선두 네 명이 노진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안 되는구먼!”
온동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네 개의 돌멩이가 힘차게 날았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네 명의 하오문 졸개들이 쓰러졌고, 분노한 조피골이 손짓을 하며 외쳤다.
“저 고구려 꼬마를 당장 때려 죽여라!”
조피골의 외침에 온동과 가까운 곳에 있던 하오문의 졸개 하나가 커다란 쇠몽둥이를 들고 뛰어왔다.
그러나 온동은 자신의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진평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계속 돌을 날렸다.
그 사이, 온동의 조그만 머리를 향해 쇠몽둥이가 힘차게 바람을 갈랐다.
“이 조그만 고구려 간적!”
“온동 오라버니!”
하오문의 졸개와 독고영의 외침이 동시에 일었지만, 온동은 여전히 노진평을 향해 달려드는 하오문의 졸개들을 향해 돌멩이를 날릴 뿐이었다.
“소영웅!”
팽무성이 남은 힘을 쥐어짜 손끝으로 옮긴 후, 작은 돌멩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휭!
팽무성의 남은 내력이 모두 실린 돌멩이가 허공을 찢으며 날아가더니, 쇠몽둥이로 온동의 머리를 내리치던 하오문의 졸개 뒤통수를 박살내었다.
털썩.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하오문의 졸개가 쓰러졌다.
“이놈이?”
단목순이 아직도 움직이는 팽무성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팽무성의 목덜미를 검으로 푹 찔렀다.
천하의 명성이 드높던 하북 팽가의 마지막 장주 팽무성은 비명도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그 사이, 온동의 도움을 받은 노진평이 힘차게 뛰어올라 담을 넘었다.
“당장 저놈을 뒤쫓아라!”
조피골의 외침에 하오문의 졸개들이 모두 문을 향해 내달렸다.
노진평처럼 높은 담을 뛰어넘을 재주가 부족한 탓이었다.
“이 고구려 간자 놈.”
제갈여가 노진평의 도주를 도운 온동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살려둘 아량 따위는 제갈여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송현이 제갈여의 흉악한 기세에 놀라 엎드려 사정했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대인, 부디 황후 마마의 뜻을 따르시오. 이 아이들만은 살려주시오.”
황후를 언급했음에도 제갈여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이미 온동과 독고영의 주위는 금화법왕의 제자들이 에워싼 상태였다.
“큰 전쟁을 앞둔 상황이라 고구려의 간자들을 살려둘 수는 없다오.”
제갈여가 엎드려 애원하는 송현을 비켜 지나 온동의 앞에 섰다.
“조그만 놈이 재주가 좋으나, 그 재주 때문에 단명함을 애석해 하라.”
차가운 말과 함께 제갈여의 소리비도가 온동의 목을 노렸다.
“멈춰라!”
그때 위엄 있는 목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장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군사들의 선두엔 말에 오른 선우천이 있었고 그의 곁엔 역시 말에 오른 태원유수 이연과 그의 오랜 벗 배적이 함께 하고 있었다.
“태원유수이시며, 팔주국 대장군 이연 공께서 황후 마마의 명을 받아 행차하셨다. 모두 꿇어라!”
배적이 소리 높여 외치자, 당장이라도 선우천과 일전을 벌이고자 마음먹었던 조피골이 두려운 기색으로 제갈여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명이라… 골치 아프게 되었구나. 상대는 팔주국 대장군 이연이다. 결코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제갈여가 앞으로 나와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제갈여라 하옵니다. 이연 대인을 뵈어 영광이옵나이다.”
이십팔숙의 검도 멈추어 남궁민도 그제야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쨌든, 팽 장주의 딸은 살았구나.”
얼굴의 물든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고는 지친 몸을 벌렁 뉘었다.
“죽든 살든 잠부터 자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은 그의 귓속으로 제갈여의 예의바른 음성이 파고들었다.
“이자들은 고구려 장수 온달의 측근들이오며, 팽가장 인물들은 고구려의 간자들과 내통한 간적들로 큰 전쟁을 안둔 이 시점에서 결코 좌시해선 아니 되옵나이다. 하여, 소인 제갈여가 충의지사들과 함께 감히 벌하고 한왕 전하께 목을 바치고자 하였나이다.”
일부러, 온달과 고구려 간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연은 제갈여와 아직도 엎드려 있는 송현을 번갈아 살피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중후한 음성으로 제갈여에게 답했다.
“제갈세가의 영웅 제갈여님이시구려. 반갑소이다. 그대와 같은 충의지사가 있으니, 고구려와의 전쟁이 어찌 순탄치 않으리오.”
이연이 웃는 낯으로 제갈여 일행의 공을 치하한 후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잡은 이 고구려의 간자들과 팽가장의 간적들은 내가 압송해 고신도록 하리다. 황후 마마께서도 이 간자들과 간적 무리를 우려하시어 특별히 나를 보내 조용히 잡으라 하셨으니, 이 어찌 그대들의 뜻이 빛나지 않을 수 있겠소. 하하하.”
“황, 황후 마마께서요?”
송현이 놀라 더듬거리며 물었다.
“무엄하다! 어찌 간자들과 내통한 네년 따위가 우리 이연님께 말을 올릴 수 있는 것이냐?”
배적이 송현에게 호통을 치고는 말 위에서 뛰어내려 그녀의 머리를 걷어찼다.
“컥!”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송현이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무예가 높고 내공이 아무리 깊어도 이미 중독된 지 오래된 상태였기에, 고작 발길질 한 번에 혼절한 것이다.
제갈여는 내심 껄끄러웠던 송현마저 간자들과 내통한 혐의를 받자, 안심하여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저년이 황후의 시녀라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스럽게도 이연은 저년이 간자들과 내통했다고 믿는 것 같구나.’
제갈여가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단목순과 진숙, 조피골에게 차례로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이연 대인께 모두 예를 올리시오.”
제갈여의 표정에서 경계가 보이지 않자, 단목순이 그제야 안심하며 이연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진숙과 조피골도 차례대로 예를 올렸다.
어느새 팽가장의 값진 물건들을 잔뜩 챙긴 금화법왕의 제자들은 이연을 껄끄럽게 여겨 대충 예를 표한 후 팽가장을 빠져나갔다.
“저들은 그대로 두셔도 되시겠습니까?”
말에서 내린 선우천이 나지막이 배적에게 물었다.
“그대로 둬야지요.”
배적이 심드렁이 답하자, 선우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물었다.
“도적질을 한 듯합니다. 정녕 그대로 두실 셈이시오?”
소리 죽여 묻는 선우천의 음성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와 싸울 순 없지 않습니까?”
선우천이 배적의 말을 듣고 보니, 금화법왕의 제자들과 다툼을 벌일 경우, 제갈여 일행이 그들을 돕는다면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울 듯했다.
“우린, 황후 마마의 명을 따라… 저 독고 씨 오누이만 구하면 되오. 불필요한 싸움으로 일을 크게 벌리면 괜히 소란스러워지니 이해하시구려.”
배적이 나지막이 속삭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독고선으로 짐작할 만한 사내들은 남궁민을 제외하곤 모두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저자는 아닌 것 같고… 이런, 이런. 우리가 조금 늦었나 보구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독고영에게로 옮긴 배적이 선우천에게 눈짓을 보냈다.
선우천이 앞으로 나와 엄히 명했다.
“이 아이들은 고구려 장수 온달의 인척이다. 묶어라!”
선우천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온동과 독고영의 조그만 몸을 포승줄로 꽁꽁 포박했다.
온동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더는 저항도 못한 채 체념하였다.
그런 온동에게 독고영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온동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죽으시면 아니 되세요. 꼭이에요.”
독고영의 당부에 겨우 청력이 돌아온 온동이 굳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걱정 말어. 오라버니 안 죽는구먼. 어찌 살아온 인생인데 말이여.”
어린 온동의 입에서 노인 같은 답이 나오자, 그제야 독고영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선우천의 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년도 묶어라!”
선우천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송현의 가녀린 몸도 포박하기 시작했다.
팽가사협 중, 소향을 제외한 삼협은 이미 절명하였고, 팽무성과 독고선, 해진 역시 생을 달리하였기에 군사들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수레에 실었다.
“이자는 어찌하오리까?”
선우천이 배적을 돌아보며 물었다.
선우천의 손끝은 아직도 바닥에 누워 코까지 골고 있는 남궁민에게 향해 있었다.
“꽁꽁 묶어 압송해야지요.”
배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자, 선우천이 직접 포승줄을 들고 가 남궁민의 목을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황후 마마께서 직접 한왕 전하께 명하시어 그대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라 권하실 것이오.”
이연이 웃는 낯으로 제갈여에게 말하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뭔가 떠올랐는지, 제갈여가 공손히 읍을 하며 떠나가는 이연에게 물었다.
“이연 대인, 행군원수부로 가시나이까?”
“아니오.”
이연이 단호히 답하자, 제갈여가 당황해 다시 물었다.
“하오면?”
이연을 대신하여 배적이 히죽히죽 웃으며 답했다.
“이곳 탁현은 고구려와 가깝고 간자들 또한 많소. 온달의 인척을 이곳에서 고신할 수는 없는 법. 안타깝게도 듣는 귀가 많아 이들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려드릴 수는 없소이다.”
배적의 말에 제갈여가 수긍하며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예를 올리며 떠나는 이연을 배웅하였다.
이연 일행이 팽가장을 떠난 뒤 잠시 후, 노진평을 쫓아갔던 하오문의 졸개들이 돌아왔다.
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소득은 없어 보였다.
조피골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명했다.
“여자와 아이가 살아남은들 뭐 그리 대수롭겠는가? 서둘러 챙겨 떠나도록 하자.”
조피골이 팽가장의 재물을 탐내 명을 내리자, 진숙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십팔숙을 이끌고 인사도 없이 떠났다.
제갈여와 단목순은 장원 한가운데 서서 하오문의 졸개들이 벌이는 약탈을 지켜보았다.
“조 장문인, 취할 것을 다 취하면 장원 곳곳에 불을 놓으라 하시구려.”
제갈여가 방화를 권하자, 조피골이 빙그레 웃었다.
“방화와 약탈은 우리 하오문의 장기라오. 염려마시구려.”
명무세가와 도적 떼의 호흡이 실로 잘 맞았다.
하북의 검술명가 팽가장은 이내 곧 화염에 휩싸였고, 제갈여 일행은 한왕 양양이 있는 행군원수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