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33화 (133/328)

133화 팽가장의 비극 (12)

해진이 고작 나뭇가지로 파산귀검을 펼쳤으나, 그 위력은 대단하여 조피골의 발밑까지 땅이 파이고 흙과 돌이 날렸다.

조피골은 황망히 해진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조피골의 소매가 살짝 펄럭이더니 조그만 병이 쏘아지듯 나왔다.

쨍!

해진이 파산귀검의 초식을 미처 거두지 못해 병을 깨뜨리자, 여지없이 깨진 병에서 독무가 뿜어져 앞을 가렸다.

“커헉!”

독무에 시야가 흐려지고 호흡마저 흐트러진 해진이 신음을 토했다.

이미 중독된 상태였기에, 가까운 거리에서 뿜어진 독무를 피하지 못하고 또다시 들이킨 것이다.

해진의 발끝이 흔들리고 나뭇가지의 위세도 꺾였다.

그 틈에 조피골이 급히 뒤로 물러났고, 제갈여가 그를 비웃으며 앞으로 나와 소매를 흔들었다.

“독에 취하셨소? 독은 독으로 다스리는 법! 내 은하침통으로 낫게 해드리지요. 하하하.”

제갈여의 웃음과 함께 소매에서 쏘아져 나온 은빛 섬광들이 해진의 몸에 박혔다.

해진이 비틀거리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피골이 다시 앞으로 나오며 해진의 목을 노렸다.

“감히 어딜!”

독고선이 벼락같이 소리치며 조피골의 가슴팍을 발로 걷어차고는 맨손으로 창을 든 자세를 취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그였지만, 마치 긴 창으로 조피골을 겨눈 듯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독고선 역시 해진과 마찬가지로 중독된 상태였기에,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기개는 가상하오만, 독에 중독된 그 몸으로 무엇을 하오리까? 하하하.”

제갈여가 독고선을 비웃으며 소리비도를 빼어 들었다.

그러나 독고선은 두려운 기색 없이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아가 해진의 앞을 지키며 제갈여를 노려보았다.

“이미 죽기로 각오한 몸. 나를 지킬 필요는 없구려.”

해진이 인자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독고선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때, 단목순의 검을 맨손으로 쥔 팽무성이 힘차게 외치며 제갈여의 시선을 붙잡았다.

“제갈여! 너의 벗 단목순이 위급할 것 같구나!”

검날을 쥔 팽무성의 손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땅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

단목순은 팽무성의 강한 악력에 질려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는 검을 비틀어 간신히 팽무성의 손에서 검을 빼내었다.

검날이 손바닥을 온통 헤집었음에도 팽무성은 전혀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단목순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중독된 상태에서도 발끝이 흐트러지지 않아 더욱 단목순의 기를 질리게 했다.

단목순이 간신히 무한보를 펼쳐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팽무성의 커다란 손이 어느새 바짝 다가와 마침내 단목순의 목까지 닿았다.

“공자! 우리가 돕겠소!”

금화법왕의 제자 이십여 명이 일시에 환과 철편을 날리며 단목순을 돕자, 팽무성은 급히 뒤로 물러나야 했다.

“너희도 당장 저 팽가놈을 잡거라!”

조피골이 아직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팽무성을 잡으라 명하자, 하오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들고 팽무성의 뒤를 공격했다.

앞에선 금화법왕의 제자들이 공격해 오고, 뒤에선 하오문의 졸개들이 공격해 오자 팽무성이 두 다리를 단단히 땅에 박듯이 힘주어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어 자세가 아닌, 언제든 몸을 날려 일격에 적의 머리를 부술 공격 자세였다.

이십팔숙과 함께 뒤에 서 있던 진숙은 팽무성과 해진, 독고선이 중독된 상태에서도 오직 공격 일변도를 취하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다지도? 중독된 상태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는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무거워질 터인데… 설마?’

뭔가를 깨달은 진숙이 급히 시선을 서고로 돌렸다.

‘아직 저곳에서 나오지 않은 자들이 있다.’

진숙이 뚫어져라 응시하던 서고에서 마침내 인영이 튀어 나왔다.

“내가 길을 열겠소!”

남궁민이 비호처럼 튀어 나오며 소리치자, 진숙의 뒤에 서 있던 이십팔숙이 일시에 몸을 날렸다.

“불살인가? 그렇다면?”

진숙이 이십팔숙을 상대로 검광을 펼치는 남궁민을 흘깃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숙의 시선은 다시 서고로 향했고, 이제 곧 튀어 나올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내가 비록 잘못 판단해 저들과 어울렸지만, 결코 가문의 명예까지 더럽힐 수는 없다.’

입술을 깨물고 응시한 서고에서 한대웅을 선두로 팽가사협이 뛰어나왔고, 온동과 독고영, 송현도 뒤따랐다.

소향은 팽가장의 공녀를 안고 있었고, 국서진이 채 부인을 업고 있었다.

‘저들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비적 떼보다 못한 짓을 한 나로 인해 우리 진가장의 명예가 땅에 처박힐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모두 죽여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바로 잡기는커녕 그 과오가 세인들에게 전해질 것이 두려워 살육을 펼칠 결심을 한 진숙이었다.

진숙이 채 부인을 업은 국서진을 향해 내달리며 소리쳤다.

“안타깝지만, 모두 죽어야 하오!”

“안타까운데 왜 죽어야 하나?”

이십팔숙에게 둘러싸인 남궁민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진숙을 비웃고는 검기를 날렸다.

휭!

살을 가를 듯한 한줄기 바람이 진숙의 어깨를 스쳤다.

“컥!”

진숙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니, 어찌?”

남궁민과 거리가 상당하여 검날이 닿을 리 없었기에, 진숙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내 앞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나는 불살! 불살 협객이다!”

남궁민이 허공을 날듯 달려오며 진숙을 향해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검날이 바람을 가르자, 또다시 검기가 일며 진숙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무슨…….”

진숙이 당황해 급히 월도를 휘둘렀다.

창창창!

고작 바람이 불어와 월도에 부딪쳤음에도 쇠와 쇠가 맞부딪치듯 파열음이 일며 섬광마저 튀었다.

남궁민이 날린 검기를 모두 쳐낸 진숙이 계속 내달렸고 채 부인을 업은 국서진을 향해 월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십팔숙! 결코 놈들이 살아나가선 안 되오!”

“명을 받습니다!”

이십팔숙이 일제히 소리쳐 답하며 허공에 뜬 남궁민을 향해 검과 도를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허공에 몸이 뜬 남궁민은 아래에서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병장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다시 진숙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내 앞에선 아무도 죽지 않는다!’

진숙은 자신의 등 뒤에서 밀려드는 검기를 느끼면서도 국서진을 향해 내리치는 월도를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월도의 시퍼런 날이 국서진과 등에 업힌 채 부인을 동시에 베어 버릴 듯 험악했다.

“이 빌어먹을 녀석!”

한대웅이 진숙을 막기 위해 달려들며 소리쳤고, 가림도 뒤따라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독에 취한 한대웅과 가림의 발끝은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 한 번에 베어 버릴 것이다.”

진숙은 자신의 등을 노린 남궁민의 검기와 옆에서 달려드는 한대웅과 가림의 공격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월도를 내리쳤다.

채 부인을 등에 업은 국서진이 급히 몸을 피해 보려 했지만, 진숙의 월도는 너무도 빨랐다.

“채 부인!”

공녀를 안은 소향이 애타게 소리치던 순간.

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월도에서 일었다.

그리고 온동의 외침이 뒤 따랐다.

“등에 사람 업었구먼! 왜 자꾸 괴롭히는 겨!”

온동이 돌을 주워 비검술을 펼쳐 날린 것이다.

온동이 날린 돌에 맞은 월도의 도신이 파르르 떨며 묘한 파장을 공기 중에 퍼뜨렸다.

“이, 이 아이…….”

진숙이 놀라 온동을 빤히 쳐다보는 사이 남궁민이 날린 검기가 그의 등까지 닿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대웅과 가림의 주먹도 어느새 그의 얼굴까지 닿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진숙이 여전히 온동을 빤히 쳐다보며 벼락같이 소리쳤다.

“아무도 살아 나가지 못한다고 했느니라!”

진숙의 외침은 곧 사자후가 되어 천지를 뒤흔들었다.

등에 닿던 검기 역시 사자후에 의해 산산이 흩어졌다.

“으아악!”

이미 독에 중독된 한대웅과 가림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이들의 귀에선 고막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진숙의 정면에 있던 국서진의 귀에서도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며 채 부인을 업은 채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채 부인은 사자후에 이미 절명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

영리한 온동은 진숙의 외침이 성난 파도와 같이 덮쳐 오자, 독고영의 귀를 자신의 손으로 막으며 엎드렸다.

거리가 떨어진 송현과 소향의 귀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 쓰러졌다.

“부인!”

단목순과 접전을 벌이던 팽무성이 채 부인을 향해 눈길을 돌리며 소리쳤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 모두 허망이 무너져 내리자, 팽무성의 발끝이 흐트러졌다.

팽무성이 빈틈을 보인 그 사이를 단목순의 검이 가르고 들어왔다.

“안 돼! 나는 불살이다! 내 앞에선 그 누구도 죽어선 안 된다!”

남궁민이 이십팔숙의 검과 칼을 몸으로 받으며 소리치다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이십팔숙의 공격에도 진숙을 향해 연거푸 검기를 날린 남궁민은 결국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고 피를 뿌려야 했다.

“어차피 중독되어 곧 죽을 놈들이다. 편히 죽게 숨통을 끊어 줘라. 팽가장 놈들과 고구려 놈들의 머리는 우리 하오문이 따야 한다.”

한왕 양양에게 공적을 올릴 목적으로 조피골이 히죽 웃으며 하오문의 제자들에게 명했다.

이에 금화법왕의 제자들도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우리가 한 놈이라도 더 많이 목을 취해야 한다!”

이미 다리의 힘이 풀린 해진과 독고선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온동과 독고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동아, 영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러나 온동은 사자후에 청력이 마비된 듯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목소리를 낸 독고선의 등 뒤로 하오문의 졸개들이 달려들었다.

“악! 오라버니!”

독고영이 오라버니의 몸에 병장기들이 박히는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독고선의 몸이 꺾임과 동시에 해진의 앙상한 몸뚱이에도 금화법왕의 제자들이 병장기를 내리쳤다.

한없이 인자하기만 했던 해진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온동을 향해 미소를 지었고, 그 선한 눈이 온동의 작은 가슴에 각인되었다.

쿵!

단목순의 검에 몸이 뚫린 팽무성의 몸이 고목 쓰러지듯 뒤로 넘어가며 땅을 울렸다.

“이 목은 내가 자르겠다.”

팽무성의 목을 취하기 위해 몰려든 하오문의 졸개들을 노려보며 단목순이 말했다.

“팽가장의 무공은 천하제일이고, 장주 팽무성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무공을 지녔었소. 그런 그를 이렇게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의 독무 덕분이오.”

하오문의 조피골이 단목순의 앞으로 나아가며 차분히 말했다.

조피골의 소매가 불룩해지자, 단목순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입꼬리를 실룩였다.

“조 대인의 독무가 대단하오만, 우리 제갈세가 역시 침통을 잘 다룬답니다. 나의 침통도 한몫했으니, 팽무성의 목은 제가 취해야겠소이다.”

제갈여도 팽무성의 머리를 탐내며 다가왔다.

“무례하고 치졸하며 어찌 이다지도 경우가 없단 말인가!”

진숙이 버럭 소리 지르며 팽무성의 수급을 탐내며 달려들자, 그 뒤를 이십팔숙이 따랐다.

진숙의 사자후가 두려운 단목순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앞을 막아섰다.

“그대가 한 것이라곤 소리 지르기뿐 아니오? 이 팽 장주의 몸에 칼을 박은 것은 나 단목순이오. 경우가 없는 것은 바로 그대 올시다!”

진숙의 사자후만큼은 아니었지만, 단목순이 내공을 끌어올려 외치자, 사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력이 약한 하오문의 졸개들은 몸을 휘청였고, 온동은 또다시 독고영의 귀를 손으로 막아주었다.

온동의 귀는 또다시 무방비로 단목순의 내력을 받아야 했다.

“듣고 보니, 우리 단목 공자의 말이 옳소. 고구려 놈들의 목은 이 제갈여가 취하고, 팽 장주의 목은 우리 단목 공자가 취하는 거로 합시다. 그대들은 나머지 저것들의 머리를 취하면 되겠소.”

제갈여가 벗인 단목순의 말을 거들며 옆에 섰다.

“무엇이라? 인의를 저버리고 파렴치한 비적질 같은 행위를 한 대가로 내가 고작 이런 떨거지들의 목이나 취할 것 같으냐?”

진숙이 노해 소리치자, 이십팔숙이 공격 대형을 취하며 제갈여와 단목순을 노려보았다.

“이보시오, 진 공자. 황후 마마 암습 혐의로 팽가장을 지목한 것은 바로 나 제갈여요. 한왕 전하께도 이곳의 일 역시 이 제갈여가 아뢸 것이란 말이요. 그대가 팽 장주의 목을 취한들, 한왕 전하를 뵈어 뭐라 말 할 것이오? 계획은 있는 것이오? 모든 계획은 이 제갈여에게 있으니, 조금 큰 공을 우리가 가져야 하지 않소?”

제갈여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진숙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말이 옳다. 내겐 팽 장주에게 황후 마마 암습 혐의를 덮어씌울 계책이 없다. 잘못했다간 공연히 팽가장만 도륙 낸 오명만 덮어쓰고 말 것이다.’

진숙의 눈빛이 흔들리자, 제갈여가 눈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왕 전하께 우리 모두의 공이라 아뢸 것이니, 누가 누구의 머리를 취하든 너무 마음에 담지 마시구려.”

제갈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목순의 검이 팽무성의 목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