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팽가장의 비극 (11)
팽무성이 애써 팽가사협을 진정시켰건만, 남궁민이 불필요한 참견을 하며 다시 불을 지폈다.
“이 칼이 그 유명한 금강대도로군요. 헌데 이 칼이 있고 없고에 따라 밖에 있는 자들이 팽가장을 공격하고 안 하고를 정할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소만.”
“뭐라? 이 자가. 정녕.”
소향이 노해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궁민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 칼이 있다 하여 저들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이 따로 더 생기기는 것도 아닐 듯하고, 어쨌든 탐내어 취하지 않고 먼 길을 와서 전하였으니, 고마운 일 아니오?”
“이자가… 정녕 죽고자 하는가?”
한대웅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남궁민에게 달려드니, 팽무성이 손을 뻗어 한대웅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진정시켰다.
“남궁 장주는 우리 팽가장을 돕느라 위험을 마다하지 않은 분이오. 제발 고정하시구려.”
운기조식하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송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만들 하세요! 밖에 대악인들이 우리 목숨을 노리고, 이 서고는 벗어날 곳 하나 없는데 서로 다투기만 하여 어찌 이 난국을 돌파한단 말이에요? 다들 싸울 시간에 운기조식하여 독이나 몰아낼 생각들 하세요!”
송현의 이 외침에 팽가사협은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운기조식에 들어갔고 팽무성은 의심 없는 채 부인을 품에 안고 고심에 잠겼다.
“팽 장주, 나와 독고선님이 길을 열도록 노력할 터이니, 길이 뚫리면 채 부인과 아이를 안고 이곳을 벗어나시구려.”
해진이 팽무성에게 다가가 차분히 말하자, 팽무성이 해진의 진실된 눈을 들여다보며 답하였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두 분으로는 길을 뚫기 어렵습니다.”
* * *
하오문의 졸개들이 팽가장 곳곳을 뒤지며 약탈을 하니, 미처 피하지 못한 하인들만 헛되이 죽임을 당하였다.
“저것들의 목적은 약탈이었나?”
눈살을 찌푸리며 단목순이 중얼거리자, 제갈여가 심드렁히 답하였다.
“황후가 건들지 말라 한 곳을 건드리고, 시녀에게 들킨 이상 아무도 살아선 안 되겠지. 잘 되었네. 차라리 도적 떼의 소행처럼 보이게 약탈하는 것도 좋겠어.”
“저 서고는 어쩌면 좋겠나? 들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황후의 귀에 들어가면 난처해질 터인데…….”
“저기 저 하오문의 인간들이 알아서 하고 있지 않은가. 기다려 보세.”
제갈여가 빙그레 웃으며 조피골을 가리켰다.
마침 조피골이 졸개들에게 기름 항아리를 내어 오라 시키니, 진숙이 물었다.
“조 장문인 기름 항아리는 왜?”
“서고를 홀라당 태우려는 게요. 몰라서 묻소?”
“아니, 고구려의 간자인지 확인을 해야지 불태워 죽이면 어떡하오? 안 될 말이오.”
“허허, 순진한 소리. 이 마당에 고구려 간자가 뭣이 중요하오? 저들 중에 황후의 시녀가 있고 우리가 그녀를 공격하였는데, 살려서 뭔 좋은 일이 있다고. 깔끔히 불태워 죽이고 속히 여기를 떠나야 하니, 저리 비키시오.”
제갈여는 조피골의 이 행동을 미리 예상했던 듯 무척 여유로웠다.
“보시게, 단목순. 내 말대로 하오문이 깔끔히 해결하지 않는가? 우린 여기서 저 서고가 불타는 것을 지켜본 후 한왕에게 돌아가면 되네.”
“한왕이 뭐라 하지 않을까?”
“아닐세. 오히려 이번 연회장 호위 소홀과 휘하 무림 고수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을 벗을 수 있어서 속으로 좋아할 걸세. 한왕이 우리에게 빚을 진 셈이니, 그가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운다면 태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여러모로 우리에게 좋은 일만 있을 걸세.”
살수인 줄도 모른 채 당진평을 휘하에 두었고, 언지창이 연회장을 급습까지 하였으니, 한왕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제갈여는 황후 시해 모의를 고구려 간자가 관여해 벌어진 일로 몰고 가 팽가장을 도륙 내는 선에서 수습하여 한왕의 곤경을 해결해 주고 그를 자신의 배경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어쨌든 준비하세. 불지르면 나오지 않겠나?”
제갈여와 조피골은 팽가장의 모든 이를 죽이는 것에 생각이 일치해 머뭇거림이 없었다.
* * *
“내가 길을 열 터이니, 두 분께서 도와주십시오. 사형들께는 내 처와 아이를 맡깁니다. 그리고 여기 이 두 아이도 부탁드립니다.”
팽무성이 독고선과 해진에게 함께 길을 뚫자고 부탁한 후, 팽가사협에게 자신의 처와 아이는 물론이요, 온동과 독고영까지 부탁하니, 소향이 차갑게 거절하였다.
“지금까지 장주의 명을 따르지 않은 적 없었으나, 저 두 아이는 지키지 않을 것이오. 채 부인과 공녀는 목숨을 걸고 지키겠소.”
소향이 이렇듯 단호히 말하니, 팽무성도 더는 말하지 못하였다.
독고선은 어린 누이와 온동이 마음에 걸렸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고 팽무성에게 말하였다.
“우린 괜찮소. 심려치 마시오.”
독고선과 팽무성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말이 없자, 남궁민이 나서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
“내가 안 괜찮으니, 저 두 아이는 내가 지키겠소. 세 분은 길이나 여시구려. 공녀님도 제 곁에 딱 붙으십시오. 안전한 곳까지 모시리다.”
팽무성과 독고선의 표정이 동시에 환해지며 남궁민의 손을 덥석 쥐었다.
“남 장주, 고맙습니다.”
“이 은혜 죽어서도 갚으리다.”
비장한 분위기에 세상을 떠돌며 독고선만 의지해 커 온 독고영이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 저도 남을래요. 곁에 남게 해주세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영아, 이 오라바니가 무능하여 너를 지키기 어렵구나. 용서해다오.”
독고선이 달래보아도 독고영은 오라버니와 헤어지기 싫어 매달렸으나, 송현이 품에 안으며 달랬다.
“우리가 안전해져야 세 분도 따라 오실 수 있단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며 온동이 풀이 죽어 있으니, 해진이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동아, 너는 영민하여 모든 것을 기억하니, 내가 아직 가르쳐주지 못한 우리 조의선인의 백두검법의 초식을 마저 알려주마. 외워서 잘 익히거라.”
다른 이들이 듣는 것쯤은 개의치 않고 심결을 불러주니, 온동이 단번에 외워 따라하였다.
이에, 모두가 놀라 경탄하였다.
독고선도 온동에게 다가가 품에 안으며 말하였다.
“내가 의부가 되고도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구나. 이제 영이마저 부탁하니 미안하구나. 동아, 구전으로만 전해 온 독고창법의 초식을 알려줄 터이니, 부디 외우고 익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다오.”
독고선에게 온동이 눈물을 글썽이며 답하였고, 독고선은 희미하게 웃으며 가전무술의 초식을 설명하였다.
이번에도 온동이 모든 심결을 단번에 외우니, 신묘한 재능에 팽무성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다.
“소영웅의 재주가 놀랍소. 과연 천하제일의 기재요. 외운 것을 익힐지는 모르나, 훗날 책으로 남길 수 있으니 얼마나 좋소. 나도 부탁 좀 하리다.”
팽가장의 오의는 정주에게만 전해져 책으로 남지 않은 상태였다.
팽무성은 자신이 이곳을 살아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팽가도법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온동의 뛰어난 암기력에 한숨 돌린 것이다.
“온동은 팽가장 인물이 아닌데 어찌? 팽가사협께 전수하심이…….”
독고선이 당황하여 말하였으나, 팽가사협은 부끄러운 표정이 되어 말이 없었다.
그들에겐 온동과 같은 암기력이 없었다.
팽무성이 사형들을 바라보고는 머리 숙여 동의를 구한 뒤, 독고선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짧은 시간 입으로 전하여, 사형들께서 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영웅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부디, 외우고 또 외워 모두 기억한 후 내 아이에게 전해주시오. 내 아이의 이름은 팽운이오.”
팽무성의 말대로 누구나 온동처럼 암기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팽가사협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이레, 독고선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였다.
팽무성은 온동에게 빠르게 심결을 전하였는데, 온동이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모두 외워 팽무성을 흡족케 하였다.
“심법으로 건곤미허신공(乾坤彌虛神功)과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전하였고, 장법으로 건곤신장(乾坤神掌)과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을 전하였네. 권법으로 파갑추(破甲錘)와 퇴법의 철혈백사십팔퇴(鐵血百四十八腿), 신법의 어기신풍(御氣神風)과 보법의 미허신보(彌虛神步), 혼원보(混元步) 등도 전하였고, 도법으로 건곤연환탈백도(乾坤連環奪魄刀),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철혈적성도(鐵血摘星刀), 왕자사도(王字四刀),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까지 전하였으니, 팽가장의 모든 무공을 전한 것이네. 여기에 진법으로 연환패왕진(連環覇王陣)를 전하니, 훗날 내 딸 팽운에게 전해 주시게. 소영웅 그대를 벗으로 믿네.”
팽가장의 모든 무공을 온동이 외우고 또 외우자, 팽무성은 한숨 돌리며 호탕히 웃었다.
“이제 이곳에서 죽는다 하여 두려울 것 없소이다. 내가 길을 뚫을 터이니, 준비들 하시지요.”
마음이 홀가분해진 팽무성이 소향에게 다가가 금강대도를 건네며 당부하였다.
“내 딸이 장주가 되면 전해주십시오. 사저, 부탁합니다.”
소향은 팽무성이 죽음을 각오하였다 생각하여 떨리는 손으로 금강대도를 받았다.
‘장주가 중독되어 이 금강대도를 들고도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운가 보구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내게 맡기는 것이니, 목숨으로 지키리라.’
금강대도를 소향이 받아 쥐자, 국서진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장주, 부디 살아서 뵙시다. 우리 팽가사협은 공녀와 부인을 지키며 장주를 기다리겠소.”
팽무성은 국서진의 이 다짐에 웃음으로만 답하였다.
* * *
“자 이제 불을 붙이거라!”
졸개들이 서고에 기름을 뿌리자, 조피골이 마저 명을 내렸다.
하오문의 졸개 이십여 명이 횃불을 들고 와 서고를 향해 일제히 던지니, 기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곧 튀어 나올 것이다. 준비하라!”
조피골의 외침에 하오문의 졸개들은 암기와 비도, 활 등을 쥐고 서고의 문을 노렸고 제갈여도 암기를 날릴 채비를 하였다.
금화법왕의 제자들도 금환과 철편을 쥐고 언제든 날릴 채피를 하였는데, 진숙의 휘하 이십팔숙이 그 뒤에서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경솔하여 승냥이 무리와 함께했구나. 이들은 심성이 올바르지 못한 자들인데, 어찌하여 내가 어울렸단 말인가? 고작 팽무성에 대한 시기심에 빠져 내가 강호의 도리를 버리게 됐구나.’
진숙이 마음으로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어 발을 빼기 어려웠다.
“팽 장주! 타 죽을 거면 그 안에 가만히 계시고, 살고 싶으면 나와 보시오! 하하하.”
단목순이 내력을 모아 소리치니, 팽가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 소리는 서고 안까지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였다.
“마치, 곰 사냥하는 기분이야. 묘하게 흥분되는군. 하하하.”
제갈여가 단목순의 곁에 바짝 붙어 낄낄거릴 때.
천둥 치는 소리가 서고에서 울리며 문이 아닌 벽이 박살 나 돌과 흙을 날리고는 그 사이로 팽무성이 혼원보를 펼치며 장원 한복판에 몸을 드러냈다.
“곰 사냥이라 했는가? 어디 한 번 나도 놀아보자! 덤비거라!”
예상과 달리 벽을 박살내고 팽무성이 나타나자, 하오문의 졸개들이 놀라 뒤로 도망쳤고, 그 틈에 해진과 독고선도 밖으로 뛰어나왔다.
“걸리적거린다. 막지 말거라!”
해진이 나뭇가지를 휘둘러 파산귀검을 펼치자, 검기가 쭉 뻗어 조피골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