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팽가장의 비극 (7)
황후와 한왕도 자신의 혈자리를 짚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의 말과 달리, 황후와 한왕도 중독된 것이다.
“이 독은 그대가 준비한 것인가?”
독고황후가 비쩍 마른 사내를 향해 냉랭히 물으니,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옵니다. 어찌 소인이 감히…….”
“그럼 너는 어찌 내가 이 독을 풀었다고 외친 것이냐? 그리고 네 몸의 그 독은 또 무엇이더냐?”
“소인은 하오문(下午門)의 문주 조피골이라 하옵니다. 만독을 다스릴 수 있어 세인들이 만독지왕이라 부르지요. 하여 이 몸에 함부로 손대면 극독에 중독되어 절명할 수도 있습니다.”
“뭐라?”
“오늘 우리가 마신 술에는 독이 들었는데, 이 독은 무색, 무취, 무미하고 급격히 단전에 내력을 모우면 토혈과 무기력을 동반하여 깊은 내력을 쌓은 무림 고수들의 무공을 폐하는 금기시 된 신선폐(神仙廢)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뭣이라… 신선패?”
“이 독을 든 술은 모두가 마셨으나, 내력이 없는 이에겐 전혀 무해하기에, 황후 마마와 한왕 전하를 의심한 것입니다.”
하오문은 소매치기, 도둑질, 매춘업 등을 업으로 하는 최하류 인생들이 만든 강호에서 가장 오래된 문파였다.
독과 암기는 물론이요.
투술, 도박술, 방중술과 추적, 잠행술, 경신술에 능하였다.
또한 이들의 정보력은 황실 못지않았다.
“조 대협이시구려. 듣고 보니, 내가 독을 풀었다고 의심할 만하오. 허나, 본 황후 역시 무공을 익혀 내력을 지니고 있기에, 이 독을 풀고 술을 마실 만큼 어리석지는 않소이다. 내가 직접 혈자리를 살펴보니, 나 역시도 중독되었구려. 그러하니, 더는 다른 말 마시오.”
독고황후가 단호히 말하니, 그녀가 의심된다하여 감히 혈자리를 살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모두 아무 소리 못하였다.
그러나, 조피골은 여전히 바락바락 외쳤다.
“황후의 술잔에는 독이 안 들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중독시켜 마음대로 부리려는 계책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 독을 풀겠소? 마마, 어서 해독제를 내어 주시옵소서.”
만독지왕이라 자처하는 조피골조차 신선폐(神仙廢)에는 무력한지 독고황후에게 사정을 하였다.
말을 하여도 못 알아듣고 계속하여 엉뚱한 소리를 하니.
독고황후가 한숨을 내쉬는데, 폐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내력이 흩어짐이 느껴졌다.
“황후 마마께서도 중독되셨다 친히 말씀하지 않았느냐? 어찌 이리 무엄하느냐? 정녕 사지가 찢어져 죽고 싶은 것이더냐?”
황후의 시녀 최희가 앞으로 나와 버럭 소리를 지르니, 그녀의 웅후한 내력에 독에 중독된 연회장 내의 무림 고수들이 모두 휘청였다.
그 중 팽무성과 술을 마시지 않은 황후의 시녀 셋, 호위시랑 선우천과 호위교위 둘.
그리고 온동과 독고영만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다.
내력이 흐트러진 독고황후와 한왕도 최희의 일갈에 미간을 찌푸리며 한 모금 선혈을 토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는 최희의 표정은 냉랭하였다.
“마마!”
송현과 수련이 놀라 황후와 한왕을 살피며 최희를 올려다보니,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보아라! 이래도 못 믿겠느냐?”
자신이 모시는 황후가 피를 토하는데도 최희의 이 물음은 너무도 냉정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다.
“아무래도 황후 마마와 한왕 전하도 중독되심이 분명하오. 이 자리에서 중독되지 않은 이는 팽 장주와 호위시랑 선우천, 호위교위 둘과 그대들뿐이니, 이 중에 공적이 있을 듯합니다.”
남궁민이 검을 빼어들며 차분히 말하는데, 올라오는 선혈을 손으로 입을 막아 되삼키니, 그의 입가에 혈흔이 번졌다.
“아쉽지만, 나 역시도 중독된 상태올시다.”
팽무성이 남궁민에게 담담히 말하였으나, 그의 모습 어디에도 고통스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는 내력을 실어 우리 스승님을 가격하지 않았소?”
금화법왕의 제자들이 항의하자, 팽무성이 손을 내저으며 답하였다.
“나도 내력이 흐트러지고 폐에 통증이 밀려와 장법을 거두고, 권으로 내지른 것이오. 물론 내력이 실리긴 하였으나, 그만큼 나도 고통을 받았소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말을 하면 믿겠소. 신선패는 고통을 참으며 주먹에 내력을 실을 수 있는 독이 아니오. 그대는 공적의 한패가 분명하오!”
이번엔 조피골이 팽무성을 의심하여 물고 늘어졌으나, 팽무성의 표정은 담담하였다.
“믿기 싫다면 믿지 마시오. 이 자리에 공적이 있다면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호위시랑께선 서둘러 호위교위와 군사들을 불러들이셔야 하오.”
팽무성이 선우천에게 교위와 군사를 부르라 말하니, 독고황후도 피를 토하며 명하였다.
“서둘러 군사를 불러 이곳을 봉쇄하고 모두를 포박하여 다른 수를 부리지 못하게 하라!”
“명을 받습니다!”
선우천이 문을 지키는 호위교위 하나에게 급히 군사들을 부르라 시켰다.
서둘러 연회장 밖으로 나가던 호위교위가 비명과 함께 몸을 튕겨 날아와 연회장 바닥에 쳐 박혔다.
남은 호위교위가 칼을 빼어들고 문 밖으로 달려 나가니, 또다시 비명과 함께 날아와 쳐 박혔는데, 일격에 목이 부러진 듯 일어서지 못하고 절명했다.
“누구냐!”
선우천이 놀라 호통을 지르니, 연회장으로 중년의 사내가 들어오며 화답하였다.
“언지창이오. 어찌 나는 초대하지 않은 것이오?”
언지창의 등 뒤로 커다란 향로를 사내 넷이 들고 섰으며 그 뒤로도 오십여 명의 흑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지니고 섰다.
향로에선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이 향로에서도 독을 피움이 분명하였다.
“산공독(散功毒)이오! 저 향로에서 산공독을 태우고 있소. 모두 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주위 하시오!”
조피골이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정체를 깨닫고 부르짖자, 연회장의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향로의 연기는 넓게 퍼지지 않아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중독될 우려는 없어 보였다.
“하하하, 이미 신선패에 중독돼 놓고도 이 산공독이 두렵소? 남은 내력이 있는 게요?”
언지창이 비웃으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니, 향로를 든 사내들도 뒤를 따랐다.
향로를 중심으로 모두가 멀리 떨어지자, 길이 쉽게 열리며 언지창이 연회장 중심까지 걸어왔다.
향로도 연회장 중심에 내려졌고, 오십여 명의 흑의 사내들은 누구도 나가지 못하게 연회장 문 앞을 막아섰다.
팽무성도 독고선 일행이 다칠까 우려되어 뒤로 물러서며 말하였다.
“결코 나서지 마십시오. 이곳은 제가 어찌 해 보겠습니다.”
팽무성의 말 속에 진정성이 느껴진 독고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동과 독고영을 등 뒤로 숨겼다.
“네놈이 흉수더냐? 황후 마마 앞이다.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거라!”
최희가 단상을 내려와 황후의 앞을 지키며 외치니, 언지창이 코웃음 쳤다.
“그대가 대살성 백면수라 최희요? 과연 세월이 흘러도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구려. 그래 이제 사람은 안 죽이는 것이오? 난 그대와 볼 일은 없으니 비키시구려.”
백면수라(白面修羅)라는 말에 연회장의 모두가 놀라 최희를 다시 보니, 그 시선에 최희의 눈매가 싸늘해지며 살기마저 띄었다.
백면수라는 이십여 년 전 강호에 나타나 이유 불문하고 싸움을 일삼은 미모의 여인으로 한 치의 사정도 보지 않아 그녀와 대적한 이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정파와 사파 무림 모두의 공적으로 몰리며 여러 문파의 장문인들이 함께 공격하여 죽었으리라 추측만 무성하였다.
언지창이 황후의 시중을 드는 최희를 백면수라라 지칭하니, 호위시랑 선우천마저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백면수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냐? 살고 싶으면 해독약을 내어놓고 썩 물러가거라.”
최희가 한 걸음 앞으로 옮기자, 선우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는데, 선우천은 곁에서 한기가 뿜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황후께서는 최희의 정체를 아시면서 시녀로 삼으셨을 것이다. 그녀가 흉악한 백면수라라면 차라리 이 위기 극복에 오히려 좋다.’
선우천이 최희를 의지해 검을 단단히 쥐고 정면을 노려보니, 그가 일전을 준비한다 생각한 최희가 단호히 말하였다.
“시랑은 이 자리를 지키며 앞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가차 없이 목을 베시오.”
오히려 선우천에게 자리를 지키라 명하고 최희가 앞으로 발을 옮기자, 주위 사람들의 얼굴로 한기가 밀려왔다.
“상당한 내력이오.”
언지창이 칭찬을 하니, 최희가 입꼬리를 실룩 올리며 물었다.
“대 수나라의 황후 앞이다. 네놈이 이런 망동을 저지르고 살 성 싶으냐? 여기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황후의 목 말고 내가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없지 않소. 하하하.”
최희의 물음에 답하는 언지창의 말투에 무척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자하는구나. 고작 얼치기 졸개 몇 데리고 감히 나와 맞서려하다니. 내 일장이나 받아 보거라!”
최희가 몸을 날리며 왼손을 뻗어 장을 펼치니, 웅후한 내력이 쏟아지며 언지창의 뒤 향로가 흔들려 흑의 사내들이 매달려 붙들고 그 뒤의 흑의 사내들은 두어 걸음씩 밀려났다.
언지창도 최희의 내력에 놀러 급히 두 발에 힘을 줘 버티며 주먹을 내질러 맞서는데, 최희의 내력이 그보다 위라 가슴을 얻어맞고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언가장의 무공이 고작 그 정도구나. 이번엔 네놈의 두개골을 가르겠노라!”
언지창의 허점을 노려 최희가 몸을 솟구쳐 손날로 모리를 노리니, 이때 하늘에서 예상치 못한 꽃비가 쏟아졌다.
“만천화우(滿天花雨)?”
두 다리가 허공에 뜬 최희가 놀라 부르짖을 때, 언지창이 뒤로 물러나며 웃었다.
“하하하, 백면수라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펼칠 줄 알았소?”
온 하늘에 꽃비가 가득하여 피할 곳 없이 보이지 않았다.
몸이 공중에 뜬 최희는 내력을 실은 장법으로 암기를 쳐내며 허공을 밟고 몸을 돌리고자 했으나, 순간 향로의 연기와 꽃비가 내뿜는 그윽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만천화우란, 암기가 온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붙은 이름이다.
모든 방위에 시간차를 두며 때로는 직선으로, 때로는 선회하며 공격하기에,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어 암기술 중 가장 뛰어난 극강의 초식이다.
이 암기술은 암기와 독의 명문인 사천당문의 비기로 오직 장문인에게만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지. 하하하.”
당진평이 큰소리로 웃으며 최희를 조롱하니 그제야 모든 이가 당진평도 언지창과 한 패로 흉수임을 깨달았다.
암기가 독향마저 품고 쏟아지니, 최희도 중독되어 바닥에 털썩 쓰러지며 자신을 덮쳐오는 암기들을 향해 애써 장을 펼치며 버텨보았다.
‘내가 이대로…….’
“내가 돕겠소!”
선우천이 급히 몸을 날리며 최희를 구하고자 하니, 이번에도 당진평이 허공에 만천화우를 펼쳤다.
“그 검으로 꽃비를 막을 수 있겠소? 하하하.”
선우천도 독향을 품은 암기가 하늘에서 비처럼 흩날리며 쏟아지자, 검망을 펼치며 막아보지만, 암기가 내뿜는 독향은 막지 못하고 이내 중독되어 갔다.
“누구도 만천화우를 피하지 못하느니라! 하하하.”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암기술과 독에 중독된 연회장의 무림 고수들은 넋이 나간 듯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막지도 피하지도 못한다면 내가 날려버리겠소!”
이때 팽무성이 몸을 솟구쳐 연회장 중앙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