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27화 (127/328)

127화 팽가장의 비극 (6)

단창을 쥔 사내가 무림 고수들 속에서 몸을 솟구쳐 사뿐히 내려앉으며 낭낭히 외쳤다.

“남궁세가의 위명은 역시 듣던 대로인 듯합니다. 허나 산동 악가(山東 岳家)도 남궁 씨 못지않게 창을 잘 다뤄 쉽게 모욕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황후 마마, 소인 악부동이라 하오며 별호는 불살이옵니다. 제 앞에선 그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니, 누가 떼를 지어 약한 이를 괴롭힌다면 소인이 나서 약한 이를 구하겠나이다.”

자신을 악부동이 소개한 사내가 단창을 들어 남궁민을 가리키고는 코웃음 치니, 상당히 무례한 도발이었으나 남궁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 독고창법과 비교해 우월하다는 악가창법의 악부동이구려. 그대의 앞에선 누구도 죽지 않는다니, 실로 듬직하오.”

독고황후가 일부러 악가창법을 독고창법보다 우월하다 칭찬하니, 여러 사내들의 표정에 불쾌감이 어렸는데, 그중 독고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긴 창을 꼬나 쥔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악부동을 노려보고는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소인 신창양가(神槍楊家)로 창술로는 조가창법만이 우리 양 씨 일족에게 대적할 수 있다 믿고 있사옵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적이 몇이든 백만 대군 속을 휘저어 반드시 목을 칠 것이며, 뜻을 거역하는 것들은 이 장창으로 볼기를 처 사람을 만들겠나이다.”

사내가 쥔 창은 방천화극으로 기병창 중에선 으뜸으로 꼽는 창인지라 독고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 창을 보니 실로 믿음직스럽구려. 필경 기마술도 대단할 터라 전장에서 단기접전을 기대하겠소. 그대의 이름은 어찌 되오?”

“양지라 하옵니다.”

양지의 양가창법 역시 꽤 유명하였고, 양 씨 일족은 조자룡의 후손 조가창법과 더불어 마상창법 중 으뜸이라 스스로 평하고 있었다.

“정말 좋은 창이고, 훌륭한 기개입니다. 하하하.”

연회장이 떠나갈 듯 웃어 젖히며 기골이 장대한 호남형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니.

연회장 그 어느 누구의 키도 이 사내의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였으며, 가슴팍 또한 담장보다 두터웠다.

호남형의 이 사내가 주위를 굽어보며 눈을 하나하나 맞추고는 독고황후에게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황보신유입니다.”

황보신유가 모운 두 손의 크기가 건장한 사내의 머리보다 크니, 그 위압감은 대단하였다.

“황보세가(皇甫世家)의 권은 바위도 부순다 들었소. 과연 명불허전이오.”

황후가 극찬하니 황보신유를 질시하는 시선들이 사방에서 일었다.

‘큰일이구먼. 이렇게 많은 무림 고수들이 고구려에 떼로 몰려가면 우리 온달님이 어찌 대적한단 말이여. 어쩌면 좋은 겨?’

온동이 수백여 명의 무림 고수들로 가득한 연회장을 둘러보며 이렇듯 걱정하다가 독고선과 해진을 바라보니, 그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고구려에 온달만 있는 것은 아니나.

온동이 다른 이까지 염려할 겨를은 없어 오직 온달만 근심한 것에 비해, 독고선과 해진은 오늘 이 자리가 결코 팽무성에게 좋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어두웠던 것이다.

‘모두가 황제와 황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한왕의 명을 받고 있다. 팽 장주도 뭔가를 보일 것인데…….’

독고선이 불안한 마음에 팽무성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였다.

제갈세가의 막내 공자인 제갈여가 황보신유를 시기하는 시선을 의식하여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벗인 단목세가의 단목순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넨 안 나서나? 이 무림에서 단목세가의 내력이 실린 웅후한 검법과 이십팔숙만큼 유명한 것도 없지 않은가?”

이에 차분한 단목순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월도를 쥔 젊은 사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나서면 저 광동 진가(廣東 陳家)가 내 뒤를 이어 한껏 뽐낼 것 아닌가? 난 저자가 나선 뒤에 나설 것이네.”

이 소리를 진가장의 젊은 장주 진숙이 들었는지 콧방귀를 뀌며 나서더니, 황후에게 아뢰었다.

“소인 진숙 한 자루 월도를 잘 다루어 두려운 것 없으나, 본디 예의 없는 무뢰배들을 혐오하여 목을 벰에 망설임이 없습니다. 언제든 필요한 곳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저기 제갈세가의 공자와 단목세가의 공자 역시 소인과 다름없으니, 똑같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진숙이 선수를 쳐 제갈여와 단목순을 함께 소개해 버리니, 때를 놓친 단목순과 제갈여가 앞으로 나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중원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세가들의 장주들이 차례로 나서며 이처럼 예를 올리니.

이제 연회장 모두의 시선은 팽가장의 젊은 장주 팽무성에게로 향하였다.

모두의 시선이 팽가장의 젊은 장주 팽무성에게로 향하자, 황금색과 붉은색이 섞인 가사를 걸친 서장승 십여 명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더니, 그 중심에서 금화법왕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독고황후에게 예를 올렸다.

“소승 금화법왕이라 하오며, 한왕 전하의 초대를 받고 토번에서 이곳까지 왔나이다. 비록 중원인은 아니오나, 무예를 겨루길 즐겨 이번 고구려 길을 함께하고자 하옵니다.”

“그러셨소?”

“불경스럽게도 일전에 팽가장을 찾아 겨루길 청한 바 있사온데, 그날 소승처럼 팽가장을 찾은 이들이 많아 본의 아니게 팽가장 분들을 핍박한 꼴이 되었습니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금화법왕이 머리 숙여 정성스레 용서를 구하니 독고황후가 머리를 끄덕여 이해함을 표시하였다.

이에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팽무성에게로 옮겨졌다.

이때 당진평이 연회장으로 들어오며 큰 소리로 예를 올렸다.

“사천당가(四川唐家) 진평이옵니다.”

당가장의 악랄함은 그가 형제단의 단주임을 모르는 이들에게까지 잘 알려져 있어 모든 이의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당진평 장주 잘 오셨소. 오랜만이오.”

독고황후가 별로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예를 갖춰 맞이했다.

당진평의 등장에 연회장 앞을 지키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호위시랑 선우천이 연회장 안으로 호위교위 넷을 이끌고 들어왔다.

선우천은 당진평을 노려보고는 호위교위들은 문 앞에 세우고 성큼성큼 걸어 황후의 앞에 섰다.

암기와 독에 능한 당진평을 믿지 못한 행동이 분명하였다.

“이 단진평,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충성을 맹세하고 한왕 전하를 따라 고구려에서 공을 세우겠나이다.”

“믿음직스럽소.”

독고황후가 짧게 답하니, 당진평이 허리 숙여 답하고는 물러났다.

한껏 위세를 드높이려던 금화법왕으로선 당진평의 등장으로 자신의 소개가 중단됨이 불쾌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였다.

“소승, 금화법왕 아직 황후 마마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였는데, 어찌 이리 무엄하시오!”

황후의 안전에서 소리 높여 호통을 치니, 불자를 섬기는 금화법왕이라 하여 예의가 바른 인물은 아님이 분명하였다.

“스님도 전장에 나가 살생을 하시려는 것이오?”

당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묻는데, 그의 주름진 눈꼬리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뭐라?”

금화법왕이 노해 소리를 지르니, 그의 중후한 내력에 연회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만하시오. 법왕께옵선 한왕이 특별히 토번에 사람을 보내어 초대하신 분으로 당장주도 예의를 갖추기 바라오.”

독고황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싸움을 말리고는 연회장을 살피며 물었다.

“법왕께서 언급한 팽가장 장주가 여기 있는가?”

이미 그녀는 온동과 독고영의 곁에 선 젊은 사내가 팽무성임을 알아보았음에도 일부러 소리 높여 물은 것이다.

“소인 팽무성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팽무성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자, 독고황후가 그에게 시선을 옮기다가 팽무성의 곁에 선 독고선의 얼굴이 낯익어 시선이 멈추었다.

‘어찌, 진이와 저리도 닮았는가?’

그녀가 떠올린 진이는 여섯째 남동생으로 독고선의 선친이었다.

독고선은 십오 년 전에 봤던 것이 마지막이라 알아볼 수 없었으나, 그의 얼굴 속에서 젊은 시절 남동생의 모습을 발견한 독고황후의 시선은 떠날 줄 몰랐다.

팽무성은 황후가 자신이 아닌 독고선을 응시함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녀가 인사를 받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독고황후가 팽무성에게로 시선을 옮겨 물었다.

“토번에서까지 초대에 응하였는데, 그대는 어찌 한왕의 초대를 거절한 것인가?”

그녀의 이 물음에 독고선과 해진은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깨닫고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소인의 재주가 보잘것없어, 팽가장을 웃음거리로 만들뿐더러, 폐하와 마마의 위명을 더럽힐 수 있기에 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당당히 답하는 팽무성의 태도에 오히려 위풍당당한 기개가 느껴지니, 누구도 감히 그를 웃음거리로 여길 수 없었다.

“그대의 재주가 형편없다 말하나, 먼 길 온 법왕께서 그대와 겨루길 원하니 손님을 맞는 심정으로 겨뤄보지 않겠는가?”

황후의 이 제안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만일 팽무성이 법왕을 상대로 이긴다면 그의 말이 허언이 되고.

그가 진다면 큰 상처를 입을 것이 당연하였다.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팽무성이 앞으로 나오며 황후의 명을 받았다.

“지닌 재주가 부족하나 손님을 맞는 심정으로 법왕의 가르침을 받겠나이다.”

드디어 팽무성과 겨룰 수 있게 된 법왕이 크게 기뻐 가사를 펄럭이며 날아오더니 손을 합장해 말하였다.

“소승 기다렸나이다. 먼저 오시구려.”

흰눈썹을 꿈틀거리며 법왕이 팽무성에게 먼저 초식을 펼치라 양보하니, 팽무성이 대답 없이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왼손을 쭉 펴 내질렀다.

웅후한 내력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금화법왕이 단전에 기를 모으는데, 팽무성이 펼쳤던 손바닥을 확 오므려 주먹을 쥐고는 허공에 권을 날렸다.

쨍!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닿지도 않은 주먹에 맞은 법왕의 복부가 볼록 들어갔다.

미쳐 피할 겨를도 없이 날아든 권기에 법왕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그만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는 붉은 피를 한모금 토하였다.

“스승님!”

법왕의 제자들이 놀라 달려왔을 땐 법왕은 이미 앉은 채로 호흡이 막혀 기절한 상태였다.

“연로하신 법왕께서 먼 길의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상태로 겨루신 탓에 패하신 듯합니다.”

팽무성이 이렇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니, 법왕의 제자들이 이를 바드득 갈면서도 두려워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법왕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시는 게요?”

독고황후가 너무도 빨리 끝난 탓에 둘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워 한왕에게 물으니, 법왕의 실력을 직접 본 적 없는 한왕으로선 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실 저도 잘은 모르옵니다.”

연회장 누구도 법왕의 무예가 어느 수준인지 모르기에 팽무성의 무예를 가늠할 수 없어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데, 키가 훌쩍 크고 깡마른 사내가 앞으로 나오며 외쳤다.

“독에 당한 것이오! 법왕은 독에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력을 돌리지 못해 당한 것이오!”

사내의 외침에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손에 쥔 술잔을 거꾸로 들어 바닥에 술을 쏟자 술이 닿은 자리의 풀들이 힘없이 스르르 누웠다.

“우리 모두는 독에 중독되었소! 이 술에 독이 든 것이오! 저 황후와 한왕이 우릴 독살하려고 술에 독울 풀었소! 모두 봉미혈(鳳尾穴)과 정촉혈(精促穴)을 확인해 보시오!”

봉미혈(鳳尾穴)은 겨드랑이 우묵한 곳에서 비스듬히 나오는 부분으로 그 앞에는 폐가 있어 점혈 당하면 기침이 나고 피를 토하며 경련을 일으키고 무력해지는 혈도였다.

정촉혈(精促穴)은 봉미혈 아래로 그 맞은편에 장문혈이 위치하는데, 점혈 되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봉미혈과 같은 증상을 보였다.

연회장의 무림 고수 중 일부는 사내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손을 혈 자리에 대보고는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하였다.

“이놈! 어디서 허튼소리를 하느냐? 무엄하다!”

이때 호위시랑 선우천이 호통을 지르자, 문을 지키고 선 호위교위 중 둘이 달려와 사내의 양팔을 붙잡았다.

“악!”

사내의 양팔을 쥔 호위교위 둘의 손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데, 그들의 얼굴이 검게 변해 이내 곧 즉사하고 말았다.

“내 몸을 잡지 마시오! 내 몸에도 만독이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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