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팽가장의 비극 (5)
북주와 수는 만리장성 너머 무천(武川, 현재의 내몽골 지역) 출신 여덟 가문들이 근간을 이룬 나라였다.
이들 가문을 팔위주국대장군(位柱國大將軍) 혹은 팔주국이라 불렀다.
이들 가문은 휘하 막하의 십이대장군통령(十二大將軍統領)을 따로 두었고 독립적으로 직위를 부여하며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니.
세인들은 이들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고도 불렀다.
북주의 황성 우문 씨와 수의 황제 양견과 독고황후 일가도 팔주국 대장군으로 휘하의 십이대장군을 거느린 관롱집단의 수장이었다.
하북 탁현에 한왕 양양이 행군원수가 되어 군을 집결시키고 무림 고수를 초청하며 독고황후마저 격려차 방문하니.
황제 양견이 호령하는 장안보다 이곳에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대 돌궐 사령관 공손성의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적 대 돌궐 사령부가 마련된 태원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는데,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과 그의 오랜 벗 배적이었다.
이연의 집안도 관롱집단의 수장으로 수 황제가 내린 직위 이외에 별도로 팔주국 대장군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연이 배적과 함께 소수의 수행인만 거느리고 탁현에 도착했을 땐.
각지에서 모인 무림 고수들을 위해 한왕의 행군원수 사령부에서 큰 연회를 준비하며, 독고황후까지 참석하여 격려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였다.
“이보게, 배적. 우리가 잔치는 잘 찾아온 것 같지 않나? 전쟁을 준비하는 이곳이 잔칫날처럼 떠들썩하니 보기 좋구먼. 허허허.”
“주군, 탁현에 뭔 기가 흐르기에 그 옛날 유비, 관우, 장비가 모이고. 지금은 각지의 군사들과 무림 고수들이 집결하는 것일까요?”
배적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둘러보며 물으니, 이연은 태연히 답하였다.
“그게 다 진시황 덕이지 않은가. 운하를 뚫어 이곳을 그 시작점으로 만들었으니, 황제가 물자와 군사를 집결시킴이 당연하지. 황제 폐하도 운하를 마저 다듬으시지 중단하고 고구려와 전쟁이라니, 아마도 후대에서 고생 좀 하겠어.”
이연의 말대로 진시황이 시작한 운하 건설은 물자 수송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양견이 중단한 이 공사는 후대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는 수나라의 전체 병력은 육십여만 명으로 이 중 삼십칠만 명을 집결시키니, 온 국력을 모두 쏟아붓는 실정이었다.
이연도 태원의 정병 일부를 끌고 서쪽 끝에서 달려와 한왕 양양에게 인계한 후 여유를 즐기던 중이라 중국 대륙 각지에서 수많은 군사와 물자가 탁현으로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 임무는 이제 끝났으니,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이모님께 인사나 드려야겠소. 더불어 연회도 즐기고 말이오.”
이연이 말한 이모는 독고황후로 이연의 모친은 황후의 넷째 언니였다.
“삼 일 뒤인가요? 고구려의 장수와 겨루도록 황제가 모운 무림 고수들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저도 궁금합니다만, 그 자리는 무림인들만 참석 가능하여 행군원수 사령부의 군관들도 참석하지 못한다 합니다."
“그렇소?”
“그렇기에 호위도 호위시랑 선우천이 맡는다 하니, 우린 그곳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 무림 고수들이 전장을 누빈 장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에 은자를 걸 것입니다. 하하하.”
“허허, 무림인만 참석 가능한가! 그럼 나는 이곳에 잠시 머물다가 황후 마마를 따로 찾아뵈어야겠군.”
“…….”
“헌데, 이 사람 배적, 불충한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군.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하하.”
“나 역시 평생토록 무예를 익혔다는 무림 고수보다 전장을 누빈 고구려 장수에게 은자를 걸고 싶네만, 수나라 태원유수로서 그리는 못하겠고, 어쩌면 좋을까? 하하하. 아무튼 연회에 참석하여 광대놀이나 구경하려했건만, 아쉽게 됐어.”
무림 고수를 광대에 비유하며 웃는 이연의 마음 깊은 곳엔 황제를 조롱하는 심사가 들어 있었다.
마침 이들의 대화를 길가에 서서 들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인물이 있었으니,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었다.
“전쟁은 장수가 하고 무림인은 무예나 연마하는 것이 옳지. 역시 무림인이 전장에 나서는 것은 광대놀음인 게야.”
이렇듯 중얼거리며 온동과 독고영의 손을 쥐고 탁현 거리를 구경시켜 주기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리 가면 큰 도화 나무가 있는데 아주 멋지단다. 가보자꾸나.”
“우와! 좋아요! 그런데 도화 나무가 뭐예요?”
독고영이 좋아서 깡총 뛰다가 물으니 팽무성이 껄껄 웃으며 자상히 설명하였다.
온동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독고선님이 팽 장주님을 못 믿으셔서 아직 금강대도를 전하지 않으셨지만, 내 보기에 이분은 결코 온달님과 고구려에 위해를 가할 분은 아니구먼.’
온동이 천진난만한 독고영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팽무성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팽가장에 남은 해진이 독고선에게 넌지시 물었다.
“금강대도를 언제 전할 생각이시오?”
“팽 장주가 온달님과 고구려에 위해를 가할 인물이 아니란 확신이 설 때 전할 것입니다.”
“확신이 안 생기면 어쩔 생각이시오?”
“그땐 임유관을 지나 대해까지 간 후 바다에 떨굴 생각입니다.”
독고선의 단호한 태도에 해진도 더는 금강대도를 건네주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팽 장주와 겨루자고 찾아오는 이들이 없군요.”
매일 시끄럽던 장원이 소란스럽지 않아 독고선이 의아해 하니, 해진도 그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팽무성이 온동과 독고영을 데리고 나들이에서 돌아왔다.
장원으로 들어서는 그를 한왕의 휘하 군관을 대동한 송현이 불러 세웠다.
“팽 장주,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시온지요?”
그녀가 며칠 전 찾아온 황후의 시녀임을 알아 본 팽무성이 예를 표하며 인사를 건넸다.
“항아님이시군요. 어인 일이신지요?”
팽무성이 황후의 시녀를 월궁 항아에 비유해 부르니, 송현이 얼굴이 발그레지며 웃었다.
“항아라니요. 호호호, 실은 황후께서 행군원수의 연회에 팽 장주를 모시라 하였습니다. 이 아이들의 가족들도 함께와 즐기라 하셨으니, 잊지 않고 찾아 주십시오.”
독고황후가 독고선 일행까지 초청하지 않았으나, 송현이 팽 장주와 아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의로 초청한 것이다.
“애들아, 그 연회에는 각 지의 무림 고수들이 모여 볼 것이 참 많을 게야. 떡과 과자도 많고 연회 중에 칼춤도 출 것이란다. 재밌겠지?”
온동과 독고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송현의 눈빛이 해맑았다.
* * *
황후의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독고선 일행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을 복색을 하고 팽무성과 함께 행군원수 사령부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향했다.
금강대도는 여전히 헝겁에 둘둘 말아 팽가장에 남겨둔 채 연회장에 발을 들여놓은 독고선의 마음 한켠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하였다.
행군원수 관저 호위 무관들은 관리들을 꺼려하는 무림 고수들을 배려하여 일부러 자리하지 않았다.
이에, 호위시랑 선우천이 휘하 호위교위 오십 명을 관저 앞과 담의 경비를 서게 하고 자신은 연회가 열리는 연무장 앞을 지키고 섰다.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황후가 참석하는 연회의 경비가 이토록 빈약하다니…….”
연회장으로 들어서며 해진이 나지막이 말을 건네니, 독고선도 조용히 속삭였다.
“황후를 지키는 시녀들의 무공과 입구를 지키는 선우천의 무공이 막강함을 과시하는 행위지요. 어쨌든 한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무림 고수 수백여 명이 자리한 연회라 허튼 짓을 할 자는 없을 듯합니다.”
독고선의 말대로 연회장엔 무림 고수 사백여 명이 자리했는데, 이들은 모두 한왕의 초대에 응하여 휘하에 든 자들이기에,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만일 누군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공명심 가득한 이들이 떼를 지어 공격할 터라, 군사 수천 명의 호위보다 안전함은 틀림없었다.
넓은 연무장에 마련된 연회장은 한왕에게 충성을 다짐한 무림 고수들이 병장기를 지닌 채 벌써부터 시끌벅적하였다.
한왕과 황후의 자리로 짐작되는 상석은 아직 비어 있었다.
많은 무림 고수들 중 이미 팽가장을 찾아왔던 인물들이 상당수라 팽무성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자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표출하는 이들로 나뉘어 있었다.
“올 자리가 아닌 곳에 온 것 같습니다.”
팽무성이 나지막이 말을 건네오니 독고선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였다.
잠시 뒤, 한왕이 독고황후를 모시고 등장하며 연회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술잔에 술을 따르며 황후께 예를 올렸고, 이 광경에 독고영과 온동도 덩달아 빈손을 들어 예를 올렸다.
따르는 시녀 셋이 독을 감지하는 은잔을 준비하여 황후와 한왕에게 바치는데, 송현이 황후에게 잔을 올리고 수련이 한왕에게 잔을 올리자, 최희가 술병을 들어 따랐다.
무림 고수를 초대한 자리라 독고황후는 황실의 예법이 아닌 팔주국 대장군의 일원인 독고 씨 일족의 마음으로 돌아가 크게 격식을 따지지 않고 호방히 술잔을 쥐었다.
독고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어 올려 예를 표한 후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는 당당히 소리 높여 말하였다.
“황제 폐하께서 한왕에게 각지의 무림 고수들을 초청게 한 것은 고구려를 정벌함에 그대들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오. 모두가 충성스럽게 초대에 응하여 실로 감동스럽소.”
황후의 눈빛이 매우 근엄했다.
“헌데, 한왕 휘하의 무림 고수들 중 떼로 몰려가 약한 이를 괴롭힌다 들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바요.”
황후가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대들이 그간 어떤 죄를 지었든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면 사면하고 직위와 후한 포상을 내리실 것이나, 그전에 약한 이를 떼로 몰려가 괴롭힌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엄히 죄를 물을 것이니, 부디 폐하와 한왕을 도적 떼의 괴수로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바요.”
부드럽게 말하였으나 황후의 이 말은 곧 지엄한 경고로 듣는 이 모두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소인, 남궁민이라 합니다. 황후 마마를 심려케 한 자들이 있다면, 비록 이 남궁민 재주가 부족하나, 이 검으로 본을 세워 폐하와 마마의 근심을 제거하겠나이다.”
자신을 남궁민이라 지칭한 사내는 제법 체격이 크고 눈매가 형형한 것이 꽤 기개가 넘쳐 보였다.
그러나 그가 방금 한 말은 연회장에 모인 수백의 무림 고수들을 모두 제 발 밑으로 여겨 자신의 검으로 모두 벌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
이 오만한 사내를 모두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젋은 장주 남궁민이시구려. 그 패기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독고황후가 남궁세가의 명성을 기억해 이렇듯 칭찬하니, 참을성 부족한 이들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