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팽가장의 비극 (4)
양광이 자신의 지위에 불안해 할 때.
상서우복야 월국공(越國公) 양소가 들어오며 물었다.
“전하, 안색이 좋지 않사옵니다.”
“월국공, 어서 오시오.”
양광이 일어나 예의를 갖춰 양소를 반갑게 맞으니, 이 둘의 사이가 주군과 신하 이상으로 돈독해 보였다.
양소는 북주의 재장 양부의 아들로 북주의 황제 우문옹이 자신의 부친을 숙청하자.
“폐하께옵서는 저의 부친을 주살한 폭군이시옵니다!” 라고 꾸짖을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이었다.
우문옹의 노여움을 사 그 역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이후 양견의 북주 황위 찬탈을 도와, 수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양광이 개봉자사겸 대장군이 되어 진을 정벌할 때 양광을 도와 진을 멸하고.
양광이 진의 황제 진숙보의 딸 선화부인을 부친 양견에게 바친 것과 달리.
낙창공주를 자신의 측실로 삼는 대담함도 지닌 인물이었다.
이후, 서돌궐도 정벌하며 수나라 조정에서 제일 높은 벼슬인 상서우복야의 벼슬과 월국공(越國公)의 작위까지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양광이 황태자에 오를 수 있도록 양견에게 압박을 넣은 것은 독고황후였으나, 독고황후가 장남 양용을 태자에서 폐하고 양광을 태자로 책봉하도록 결심하게 계책을 낸 이가 바로 양소였다.
이에, 양광의 신뢰가 컸음은 당연했다.
비록 훗날이 되겠으나, 양광이 황제에 오른 후 양소를 죽이고,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지금의 이 두 양 씨는 수나라에서 가장 돈독한 사이임은 분명하였다.
“황후께서 한왕을 총애하시어 한왕 휘하 무림 고수들에게 연회를 베푸신다 합니다.”
양광이 양소에게 공손히 자신의 근심을 털어놓았다.
수염을 매만지며 가만히 듣던 양소가 허허 웃으며 말하였다.
“황후께서 또다시 황태자를 변경할까 두려우신 게로군요. 허허.”
“월국공,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한 번 바꾼 태자, 두 번 못 바꾸란 법이 어딨습니까? 더구나 형님이 살아계신데, 만약 제가 폐위된다면 저는 형님과 동생을 동시에 적으로 두기에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월국공, 남의 일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어쩌면 좋을지 생각 좀 해주시오.”
양광이 애걸하니, 양소가 웃음기를 지우며 말하였다.
“전하, 이 양소가 전하를 도와 진을 멸한 뒤로 늘 전하와 함께하며 최측근임을 세상 모두가 아는데, 어찌 전하가 태자에서 폐위되면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남의 일이라 웃는 것이 아니옵니다. 제게 전하의 근심을 제거할 계책이 있사온데, 따르시겠습니까?”
귀가 솔깃해진 양광이 양소의 손을 덥석 쥐고는 재촉하였다.
“어서 속 시원히 그 계책을 알려주시구려. 내 월국공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르겠소이다.”
양광의 눈빛에서 다급함을 읽은 양소가 차분히 말하였다.
“산동의 형제단이란 살수 조직이 있사온데, 돈을 주면 염라대왕 목이라도 따오려 할 정도로 과격하고 무모한 것들이지요. 마침 형제단의 단주가 탁현에 왔다 하옵니다.”
“헌데 그것들은 왜?”
양소가 뜬금없이 형제단을 언급하니 양광이 의아해 물었다.
“들어보소서. 현재 태자는 누가 뭐라 하여도 전하이십니다.”
“그렇긴 하오. 헌데?”
“하여, 세인들이 생각하건대, 수왕 양용은 폐세자로 모후인 독고황후 마마에게 앙심을 품었을 터이고. 한왕 양양은 왕세적과 함께 행군원수로 탁현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무림 고수를 초청하며 일대의 군권을 쥔 상태입니다. 그렇지요?”
“그러하오만? 그것과 형제단이 무슨 관계인지요?”
양광이 아직도 양소의 의중을 몰라 답답해하였다.
“독고황후 마마께서 한왕 휘하 무림 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베푼 연회에 형제단을 난입시켜 황후 마마를 시해하려는 척만 한다면, 과연 누가 의심받고 누가 문책 받겠습니까?”
“…….”
“황후 마마 시해는 결단코 진행하지 않아도, 수왕과 한왕은 자연히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심중에서 멀어질 것이옵니다.”
지극히 위험한 책략을 양소가 말하니, 양광이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았다.
양소는 양광이 모후의 안위를 염려해 망설인다 생각하여 부드러이 다독였다.
“황후 마마의 옥체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해가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줄 터이니 심려치 마소서.”
이에 양광이 정색하며 잘라 말하였다.
“아니오.”
“무엇이 아니신지?”
이번엔 양소가 당황하여 물으니, 양광이 차갑게 안색을 굳히며 냉랭히 말하였다.
“폐하와 황후께선 다섯 아들을 두셨소. 고작 형님과 다섯째 아우만 우려해선 안 되오. 셋째, 넷째도 황후께서 태자로 올리실 수 있지 않소? 후환은 남겨선 아니 되오.”
“후한이라… 그러하시다면?”
양소가 불길한 기운에 싸여 물으니, 양광이 단호히 답하였다.
“그 형제단에게 황후를 시해하는 척만 하지 말고, 후환을 없애라 하시구려.”
셋째, 넷째 황자도 제거하란 말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양소가 더욱 크게 놀라 양광을 바라보았다.
‘제 어미를 죽이고 태자 자리를 지키겠다니, 살모사 같은 놈이로구나.’
“어찌 그리 보시오?”
양광이 할 말 잃어 가만히 바라만 보는 양소에게 물으니, 그제야 양소가 정신을 차려 답하였다.
“아니옵니다. 과연 이 일을 형제단만으로 가능한지 잠시 고심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이 일은 형제단과 함께, 또 한 인물도 필요할 듯하옵니다.”
“그게 누구요?”
“하북에서 무예로 가장 유명한 이는 팽가장의 팽무성이나, 그는 결코 우리와 함께할 만큼 야심이 크지 않은 인물로, 팽무성 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진주 언가(晋州 彦家)입니다.”
하북에서 팽가장과 쌍벽을 이루던 언가장은 북주에 충성한 것을 문제 삼아 양견이 황위에 오른 후 멸문지화를 당해 사라진지 몇 해 되었다.
“아니, 언가장은 북주 황제 우문옹에 충성한 죄로 불타 없어지지 않았소?”
“언가장은 사라졌으나, 언가권을 이어받은 이가 남아 있습지요.”
“그렇소? 누구요?”
“언지창이라는 인물로 가전무공인 권법에 능하고, 언가장에서 내려오는 비기인 강령술(降霊術)로 시체를 일으켜 부린다 합니다. 만일 황후를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이자를 이용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나이다.”
“언지창이라… 언지창, 그자가 나를 따르겠소?”
“수 황실과 원한이 깊어 따르진 않을 것이나, 황후 시해는 적극 동조할 것입니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결코 잡혀 자복하지 않을 것이니, 그 입 또한 무겁다 자신합니다.”
양소가 이렇듯 자신하며 추천하니, 양광도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월국공께서 부디 잘 처리해주시오.”
자신의 어미를 시해하란 명을 거침없이 내리고도 양광의 표정엔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었다.
* * *
양광의 명을 받은 양소는 바로 사람을 보내 형제단 단주 당진평을 비밀리에 수소문하였다.
당진평은 사천 당가(四川 唐家) 일족으로 독과 암기에 능하고 의리보다 이익을 따지는 인물이었다.
의뢰 받은 일만큼은 비밀을 엄수하기로 유명하였는데, 그가 형제단의 단주라는 사실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양소와는 선대부터 연이 닿았기에 서로 믿고 중대사를 논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월국공 양소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당진평이 늦은 밤 양소의 침소로 살며시 찾아 왔다.
“월국공 주무시는 게요?”
어둠에 의지해 누구도 모르게 창으로 들어온 당진평을 침상에 누운 양소가 올려보며 말하였다.
“소리 없이 드나드니, 내 목숨은 그대 것이나 마찬가지구려. 살려줘 고맙소. 하하하.”
“아직 월국공의 목을 원하는 의뢰가 없으니, 내게 고마워 할 것은 없지요. 그런데 나를 어찌 찾으신 것이오?”
살수 집단인 형제단의 단주란 사실을 숨기고, 한왕 양양의 초청을 받아 사천 당가장 장주의 신분으로 당당히 탁현에 온 당진평이었다.
이에, 양소가 자신을 비밀리에 찾음이 살인 청부임을 의미해 그 대상이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모시는 태자께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도록 그대가 노력해 줘야겠소.”
양소의 이 말에 당진평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가 평온해졌다.
“그래, 대상이 누구요?”
“독고 부인 올시다.”
“독고 씨라… 월국공, 나는 황실의 황위 계승 따위에 관여하고 싶지 않소이다. 이는 내가 감당키 어려운 일로 황실과 적을 두는 것이라…….”
양소가 말한 독고 부인이 즉, 독고황후임을 눈치 챈 당진평이 난색을 표하자, 양소가 웃으며 말하였다.
“비밀을 공유하면 벗이 되는 법. 그대와 내가 비밀을 공유해 벗이 되면, 나와 비밀을 공유한 태자가 내 벗이 되는 것이고, 이는 곧 그대와 태자도 벗이 될 터라, 그대는 훗날 황제를 벗으로 두게 되니, 이 일을 어찌 마다 하시오?”
교묘한 논법으로 영리하면서도 욕심 많은 당진평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하였다.
“음, 독살이 좋소? 암살이 좋소?”
당진평이 조심스레 물으니, 양소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이번 한왕이 개최할 연회에서 그대의 형제단이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살수를 펼치시구려.”
“아니, 몰래 하여도 어려운 일을 어찌 많은 이가 지키고 보는 연회에서 벌이란 말이오? 내 신분이 노출되지는 않겠으나,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오.”
당진평이 난색을 표하자, 양소가 웃으며 안심시켰다.
“그대의 형제단은 그저 시끄럽게 보조 장단만 맞추면 되고 실상 황후 시해는 언지창, 그자가 할 것이오. 내 연통을 넣었소이다.”
그제야 당진평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였다.
“역시, 천하제일의 지략가시오. 내 월국공을 벗이라 여기고 따르겠소이다.”
황후 시해의 수괴는 언지창이 지고, 배후로 양용이 지목될 터이며.
호위 소홀로 양양이 문책 받을 이 계책에 당진평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가지 더, 언지창에겐 말하지 않았으니, 당 장주만 아시구려. 그날 누구든 다 죽여도 되나 황후는 죽이지 마시오.”
“아니? 황후 시해에 황후를 안 죽이면 왜 하는 게요?”
“황후는 죽지 않고, 누군가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오. 실상 황후가 죽으면 나와 당 장주는 필요 없는 인물이 되어 토사구팽 될 것이오. 적당히 실패하고 슬쩍 당 장주도 시해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준 후 아주 잘 숨으시구려. 그래야 우리가 패를 쥐고 오래 살 수 있다오.”
당진평은 양소의 말을 알 듯하여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 * *
송현이 떠난 후 팽무성이 다시 독고선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며 탁현까지 온 연유를 물었다.
“이곳은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하느라 매우 시끄럽고 위험한데 적지에 어찌 오셨습니까?”
“실은 말이오.”
팽무성의 물음에 해진이 답하려 하니, 독고선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제가 고향이 낙양이라, 오랜만에 고향을 둘러보러 왔더니, 전쟁 준비 중이라 놀라 팽 장주께 잠시 몸을 의탁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우리 팽가장에 오늘처럼 여러 무림인들이 찾아와 시비를 걸지만, 그래도 이 하북에선 우리 팽가장이 가장 안전할 것입니다. 소나기는 피하라 했으니, 전쟁이 끝나 조용해지면 그때 돌아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팽무성이 사람 좋게 안위를 걱정하며 머물라 말하니, 해진이 고맙고도 미안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의아해 하였다.
‘금강대도를 전하러 왔다 말하면 팽 장주가 더 좋아할 것인데, 독고선님은 어찌 숨기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해진의 이런 생각을 모르는지 독고선이 시치미름 뚝 떼고 팽무성에게 물었다.
“그래 오늘처럼 실력을 겨루자 찾는 이들이 매일 있으신가요?”
“이 팽가장의 재주가 하북 제일이라 소문이 나서 매일 같이 실력을 겨루자 찾아들 오더군요. 제 사형들께서 잘 돌려보내신 덕에 큰 소란은 없었습니다.”
별일 아니라며 팽무성이 답하자, 온동이 불쑥 껴들었다.
“팽가장은 도법이 유명하다 들었구먼유. 헌디, 어째 맨손으로 대적하시남유?”
“하하하, 소영웅에게도 우리 팽가도법이 알려진 것인가? 하하하, 이 팽무성이 모자라 장주의 신물을 잃은 뒤로 우리 팽가장 인물들은 누구도 다른 이외 도법을 사용해 대적하지 않는다네. 부끄러운 일이지… 허허.”
팽무성의 자조 섞인 한숨에 온동이 독고선을 빤히 올려다보니, 독고선이 온동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호를 보냈다.
‘독고선님이 뭔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때까지 나도 모른 척 해야겠구먼.’
어린아이답지 않게 눈치 빠른 온동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에, 독고영이 눈을 똘망똘망 뜨고 팽무성과 온동을 바라보다가, 독고선이 헝겁에 둘둘 말아 손에 쥔 금강대도로 시선을 옮겼다.
“영아, 이것 좀 먹어 봐. 맛있구먼.”
온동이 급히, 독고영에게 떡을 건네며 시선을 돌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