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팽가장의 비극 (3)
“어찌, 팽 장주를 찾으시는지요?”
소향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나긋나긋 물으니, 눈에 들어간 피를 닦느라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가 된 사내가 대범한 척 여유를 부리며 답하였다.
“본인은 강동십호의 맏형 성우용이라 하오.”
“강동십호라…….”
“그렇소. 한왕 전하께서 무림 고수를 초청하고 휘하에 거두신다 하여 아우 셋과 이 탁현에 왔는데, 한왕 전하께서 수차례 초청을 하여도 거절한 대영웅이 있다하여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겨뤄보고자 왔소이다. 무뢰배는 아니니 소저는 두려워 마시구려.”
강동십호는 강동 지역에서 우는 아이도 놀라 울음을 그친다는 열 명의 도적들로 살인 방화는 물론이요.
부녀자 겁탈도 일삼는 흉악한 자들이었다.
사내가 신분을 밝히니, 함께 섰던 다른 사내들의 표정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대협께선 양상군자(梁上君子)시로군요. 우리 팽가장은 사람을 함부로 안에 들여 큰 낭패를 보았기에, 강호이 위명이 자자하신 강동십호의 성우용 군자를 모시기 어렵사옵니다.”
소향이 정중히 성우용에게 말하였으나, 실상은 도적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니, 주위 사내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이 망할 년이! 애들아, 저년을 잡아 오늘 밤 즐겨보자꾸나!”
성우용이 분을 못 참고 험한 말을 하며 동생들에게 명하니, 뒤에 서 있던 사내 셋이 소향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년이 반반한 게, 쓸 만하겠습니다.”
침까지 흘리며 달려드는 꼴이 너무도 추해 소향이 미간을 찌푸린 채 제자리에서 가볍게 발을 굴러 몸을 솟구쳤다.
그리고 연속해, 발끝을 쭉 펴고 휘둘렀다.
그녀가 허공에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에 설 때 달려들던 사내 셋은 차례대로 날아가 장원 밖에 쳐 박혔다.
실로 깔끔하고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이년도 보통은 아니구나! 그래 나도 한번 걷어차 보거라!”
“죽은 사람 부탁도 들어주는데 어려울 것이야 없지.”
성우용이 제법 호기롭게 소리치며 허리춤에 찬 칼을 빼어 들고 달려왔으나, 원하던 대로 소향이 발로 걷어차 장원 밖에 쳐 박았다.
성우용의 이 모습에 다른 사내들이 박수를 치며 감탄하였다.
그중 머리를 길러 백발과 길고 흰 수염이 돋보이는 파계승이 앞으로 나오며 합장을 하고는 장황히 떠벌였다.
“시주님의 발재간이 여간 아니십니다. 강동십호는 온갖 악행만 일삼는 도적으로 소승이 혼을 내주려던 참이었는데, 함께 한왕 전하의 휘하에 들어간 처지라 애써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러하지요. 오늘 시주님께서 소승을 대신하여 강호의 도리를 보여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소향이 파계승의 행색을 살피니, 손에 쥔 길고 두툼한 철선장의 무게가 육십 근은 족히 넘을 듯하여 외공의 깊이가 상당해 보였다.
“대사께선 법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소승은 한 때 소림사에 머물렀으나, 지금은 그저 파계승일 뿐이라, 세인들은 소성을 대력거사라 부른답니다.”
대력거사는 소림사의 방장과 같은 형자 항렬로 경쟁심이 깊고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심도 많은 인물이었다.
서고에서 달마가 남긴 역근경을 훔치다 걸려 소림사에서 도망친 후, 강호를 떠돌며 온갖 잡다한 청부를 맡아 재물을 취하여 첩을 셋이나 거느린 인물이었다.
부녀자 겁탈만 하지 않았을 뿐, 강동십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위인이었다.
“대력거사시군요. 철선장이 남달라 짐작은 했으나, 우리 팽가장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으나, 우리 팽가장은 사람을 잘못 들여 귀한 것을 도둑맞은 전례가 있기에, 모시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도적놈은 나가란 뜻이니, 대력거사 주위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중이 시주 받아 끼니나 채우면 되지, 도적질에 첩까지 거느리고 이젠 전쟁까지 참여하려는 게요? 에라이!”
곁에 바짝 붙은 사내 중 하나가 손가락질까지 하며 조롱하니, 대력거사의 눈빛에 살기가 돌고는 철선장이 매섭게 바람을 가르었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며 강한 파열음이 일었다.
비웃던 사내가 자신의 검과 함께 날아가 땅에 거꾸로 쳐 박히는데, 가림이 흰 도포를 펄럭이며 날아가 가볍게 받아 세워주고는 한 걸음에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대형 감읍하오! 이 노진평 반드시 대형에게 보답하리다. 이 말코 같은 땡중놈아! 급습을 하라고 부처가 가르치더냐?”
대력거사에게 혼쭐이 난 사내가 자신을 노진평이라 말하며 가림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대력거사를 향해 욕울 퍼부었다.
노진평은 서촉 사람으로 본래 군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치던 교두였다.
그러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때려치고 한왕이 무림 고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달려와 휘하에 들어간 것이다.
노진평에게 손을 모아 가림에게 예를 표했다.
가림이 조금 전에 펼친 절정의 경공술에 모두가 경탄하여 박수를 치는데, 대력거사만이 경쟁심이 끓어 철선장을 쥐고 나오며 물었다.
“시주께서 팽 장주시오?”
“전혀 아니올시다만, 거사께선 내가 팽 장주면 좋겠소? 아니면 좋겠소?”
가림이 놀리듯 말하니, 대력거사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소림사를 나온 이유가 그런 선문답이 싫어서인데, 시주께서 본 거사를 공연히 자극하시는구려.”
“야 이 땡중아! 네놈이 도둑질하다가 소림사에서 도망친 것은 세상이 다 아는데 뭔 개소리냐!”
노진평이 다가가지 않고 버럭버럭 욕을 퍼부으니, 대력거사가 콧방귀를 뀌며 발로 땅을 툭 찼다.
이에, 조그만 조약돌이 노진평의 이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어이쿠!”
노진평이 비명을 지르며 크게 당황한 순간.
서진도 땅을 툭 차 조그만 돌멩이를 날리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정확하여 노진평의 이마를 노리던 돌멩이를 쳐내 버렸다.
“정말 멋진 솜씨오!”
노진평이 고맙고 놀라워 또 손을 모아 예를 취하였다.
대력거사는 가림의 경공술과 서진의 발재간이 자신보다 위임을 단번에 깨닫고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모두가 가림과 서진의 무공에 감탄하였으나, 송현만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그다지 무공이 높지 않구나. 사형들이 저 정도면 팽 장주도 대단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가 한왕의 초청을 거부한 것도 일리가 있다.’
팽가장 인물들의 진정한 실력은 도검을 들었을 때 나오고, 황궁에서 최희에게 무예를 배운 자신의 무공 또한 지나칠 정도로 높아 다른 이의 무예가 낮게 보임을 모른 것이다.
이렇듯 단정할 때 중후하면서도 내력이 깊은 목소리가 팽가장을 울렸다.
“실로 팽가장의 인물들은 모두가 비범하구려. 대단합니다. 소승은 한왕 전하의 초청으로 토번에서 온 금화법왕이라 하오며 탁현을 방문한 차에 하북 제일의 무학명가 팽가장의 가르침을 받고자 오게 되었소이다.”
팔다리가 길고 황색과 적색의 가사를 걸친 서장 승려가 자신을 금화법왕이라 칭하니,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토번은 왕보다 승려 중 으뜸인 법왕의 힘이 막강하였다.
그런, 금화법왕이 아무런 수행원도 없이 팽가장의 무예를 살피고자 왔으니 모두가 놀람은 당연하였다.
“법왕께서도 장주와 겨루고자 하시옵니까?”
소향이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물으니, 금화법왕이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화답하였다.
“소승이 금빛 화염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다 사람들이 칭송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겨루기를 좋아합니다. 몸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 장주께서 상대하여 주신다면 성심껏 대적하리다.”
결코 겸손하지 않은 오만한 언사인지라, 소향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송현이 팽 장주를 올려다보니, 당장 팽가사협과 금화법왕이 일전을 벌이려 하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는 게 전혀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 팽 장주의 실력이 분명 저 법왕만 못할 것이야. 내가 나서 더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게 말려야겠구나.’
이럴 듯 생각하며 송현이 가볍게 몸을 날려 금화법왕과 팽가사협 사이로 뛰어들고는 낭랑히 외쳤다.
“나는 황후 마마를 모시는 송현이라 하오. 오늘 이곳에 황후 마마의 뜻을 받들어 살림을 살피고자 온 터, 내가 보는 앞에서 더는 싸움이 용납될 수 없소.”
송현의 이 말은 팽가장을 황후가 살피라 했으니, 더는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으로 곧 황후의 명이기도 하였다.
호위교위도 성큼성큼 걸어 송현의 뒤에 서는데, 금빛 찬란한 수행복이 어가를 호위하는 교위의 복장이 분명하였다.
기세 좋던 금화법왕도 오만한 태도를 감추며 송현에게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팽가장을 나섰다.
금화법왕이 물러나니, 다른 사내들도 뒤따라 팽가장을 나섰고 노진평이 끝으로 나가며 연신 가림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공녀님께, 이 팽무성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팽무성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는데, 진심이 보여 송현의 마음이 매우 흡족하였다.
“나는 돌아가 황후 마마께 팽가장의 일을 아뢰고 사람들이 괴롭히지 못하도록 청을 올리겠습니다. 무례한 이들 때문에 너무 두려워 마십시오.”
송현이 이토록 자상히 말하니, 팽무성이 연신 허리 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황후에게 돌아가며 송현은 팽무성이 사형들보다 무예가 낮고 며칠 전 아내가 해산까지 한 터라 한왕의 초청을 거절했으리라 지레짐작하였다.
하여, 그의 곤란한 사정을 황후에게 아뢰면 반드시 현명한 황후가 헤아려 한왕에게 팽무성을 괴롭히지 말게 엄히 주의 줄 것이라 생각하였다.
황궁에서 독고황후만 모신 송현은 세상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혔음을 몰랐던 것이다.
한왕 양양이 병영 내에 마련한 처소에 머문 독고황후는 송현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팽가장이라면 우리 독고 씨와 더불어 하북 일대에서 당할 자 없는 무학명가였는데, 어찌 무뢰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단 말인가? 아마도 후대에서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구나. 한왕을 불러 오너라.”
황후의 명에 한왕 양양이 단숨에 달려오니, 독고황후가 노기서린 표정으로 엄히 꾸짖었다.
“무림 고수를 초청하여 휘하에 두고 고구려 정벌에 이용하라 명하신 황제의 뜻을 한왕은 헤아리지 못한 것인가?”
“어찌… 감히 잊겠사옵니까.”
“하면, 어찌 도적질이나 일삼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시종잡배들을 휘하에 거둔 것이더냐? 더구나 휘하 수족들이 호승심을 일으켜 떼로 몰려가 약한 자를 괴롭히고 겨루자 겁박한다니, 어찌 관리를 하는 것인가? 한왕은 정녕 도적 떼의 괴수가 되고 싶은 것인가?”
어미의 꾸중임에도 독고황후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아는 한왕인지라, 두려워 벌벌 떨며 용서를 구하였다.
“소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엄히 단속하겠나이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한왕이 구차히 변명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니, 독고황후도 노기를 가라앉히며 말하였다.
“팽가장 장주가 많은 괴롭힘을 당한 듯하니,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시오. 그 자리에 한왕 휘하의 무림 고수들도 모두 불러내시구려. 한왕 휘하 고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내가 친히 살펴보겠소.”
한왕 양양은 두 말 없이 독고황후의 명을 받았다.
이 소식을 접한 태자 양광은 독고황후가 다섯째 아우 양양을 총애하여 휘하 무림 고수들마저 살피고자 연회를 베푼다 오해하였다.
이에,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불순한 생각을 품게 된다.
‘황후께서 형님을 태자에서 내치고 나를 태자에 올리셨듯. 나를 내치고 양양을 태자에 올리시려 함이 분명하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