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팽가장의 비극 (2)
“멈춰라!”
체격이 건장한 사내가 불쑥 나타나니, 독고황후의 시녀 송현이 의아해 바라보았다.
호위교위도 말에서 내려 팽무성의 앞을 막았다.
“이 아이들과 아는 분 같으니 두세요.”
조그만 여인이 호위교위에게 자신의 앞을 열어주라 명하는 모습에 팽무성이 웃으며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공녀님, 고맙습니다.”
팽무성의 순박한 웃음에 송현도 미소 지으며 답하였다.
“공녀처럼 높은 신분이 아니에요. 헌데 장사께선 뉘시고? 이 아이들을 아시는지요?”
“저는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란 자로, 이 아이들은 저 멀리 산동에 사는 제 오랜 벗의 자녀들입지요. 오늘 황후 마마의 행차를 뵈러 나왔다가 만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세인들에게 속기로 유명한 어수룩한 팽가장의 장주가 거짓을 술술 말하니, 온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분이 원래 거짓말장이였던가? 왜 이리 자연스럽지?’
“팽가장? 장주님이시군요. 그래, 너희는 산동에서 왔구나. 부모님들은 어디 계시느냐?”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지낸 송현인지라 팽가장을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웃음이 순박한 팽무성의 말을 단번에 믿고 온동에게 물었다.
“객잔에 계셔요. 객잔이요.”
온동이 급히 달할 때, 팽무성이 조금 떨어져 서 있는 해진과 독고선을 알아보며 반갑게 소리쳤다.
“저기 있구만, 여기요! 여기!”
이제 해진과 독고선도 떨어져 있을 수 없어 다가오니, 팽무성이 반가워 독고선의 손을 잡고 해진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께서도 오셨군요. 이 사람 해선! 왔으면 내 집에 올 것이지 객잔이 웬 말인가? 아무튼 반갑네. 하하하.”
눈이 밝고 귀가 좋은 팽무성이 독고황후와 아이들이 나누던 대화를 듣고 눈치 좋게 이렇듯 말한 것이다.
송현이 해 씨 일가를 살펴보니 사람들은 선해 보이나 닮은 구석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묘하게 가족 같은 조합이었고, 반가워하는 팽무성의 태도와 달리 상당히 어색해 하며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였다.
‘내가 곁에 있어서 눈치를 보는 건가?’
송현은 어색한 해후를 지켜보며 황후가 내린 명을 완수하고자 말하였다.
“해후를 방해하여 죄송하오만, 황궁에 허언은 없는 법. 나는 황후 마마의 뜻을 따라 아이들의 집안 살림을 살펴야 하오.”
“송구하오나, 소인들의 집이 산동인지라…….”
자신들이 산동에 산다는 팽무성의 말을 기억하여 독고선이 사양의 뜻을 밝히나, 송현의 표정은 단호하였다.
“황후 마마를 모셔야 하니, 산동까지 갈 수는 없소. 허나 팽가장이 이 근처 같은데 그곳에 들려 아이들의 여정에 어려움은 없는지 살펴주고 가야겠소.”
황후의 명이라 하니, 마다할 수도 없어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데, 팽무성이 호기롭게 말하였다.
“귀빈들이 팽가장을 찾음이 얼마나 오랜만이지 모릅니다. 모시겠습니다.”
팽가장은 큰 길에서 그리 멀지 않아 바로 도착하였다.
객잔 점소이가 말한 대로 과연 장원의 규모가 상당하여 탁현의 누구나 알 듯하였다.
독고선 일행이 촌뜨기마냥 장원 규모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반면 황궁에서 지낸 송현은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장원 문 앞에 곰만 한 사내가 서 있다가 팽무성이 손님을 이끌고 오니 달려와 인사를 하였다.
“사형, 이분들은 내 손님들이오. 황궁의 공녀님과 교위님이시고, 여긴 산동에서 온 귀빈들이오.”
팽무성이 여전히 자신을 공녀라 불러주니, 송현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한낱 시녀를 귀공녀로 대하니 팽 장주의 사람됨이 지극히 겸손하구나.’
칭찬은 커다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라 의도하지 않았으나 팽무성의 이런 배려는 좋은 인상을 심기에 충분하였다.
“소인 한대웅이라 하며 팽가장 식솔입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한대웅의 모습엔 어찌 황궁의 사람을 모셔온 것인지, 궁금한 기색조차 없었다.
팽무성이 사형이라 칭한 거한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문을 여는데, 허리를 펴니 그의 머리가 대문보다 위에 있을 만큼 거한이었다.
‘문밖을 지키고 선 것인가?’
팽무성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며 독고선은 한대웅이란 팽무성의 사형이 여전히 문밖을 지키고 서니 내심 의아해 하였다.
장원 안에 들어서자 흰 도포를 입은 서생이 낙엽을 쓸다 멈추고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서생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워 독고선은 그가 상당한 경공을 지녔다 생각하였다.
“장주 손님을 모셨습니까?”
서생이 차분히 물으니, 팽무성이 소개를 하였다.
“저의 사형입니다. 사형, 이분들은 황궁에서 오신 공녀님과 교위님이고 이분들은 산동에서 오신 귀빈들이오.”
“귀한 분들이 오셨군요. 소생, 가림이라 하옵니다. 귀빈을 대접할 상을 보라 알리겠습니다.”
가림도 어찌 온 손님인지 묻지도 않고 반기고는 하인들에게 상을 준비시키러 갔다.
팽가장 중심에 자리한 넓은 정원을 지나 작은 담이 나오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이층으로 된 큰 별채가 나왔다.
그 앞에 아름다운 여인과 날렵한 체형의 사내가 목검으로 대련을 하다가 팽무성이 손님을 데리고 들어오니 급히 달려와 인사를 하였다.
“귀빈들이 오신 줄도 모르고 경망을 부렸습니다.”
날렵한 체형의 사내가 공손히 말하자, 팽무성이 웃으며 소개하였다.
“이 분은 저의 큰 사저(師姐)이시고, 이분은 둘째 사형이십니다.”
팽무성이 큰 사저라 부른 여인은 이십 대로밖에 보이지 않은 앳된 모습의 미인이었으나, 실상은 마흔이 넘은 중년 여인이었다.
“소향이라 합니다. 귀빈을 뵙습니다.”
소향은 음색조차 청아하고 맑아 누구도 그녀를 중년 여인으로 여기기 어려웠다.
“국서진이라 합니다. 귀빈께 인사 올립니다.”
날렵한 체형에 목소리마저 시원시원한 서진은 상당히 준수한 외모에 쾌남이었다.
팽무성이 사형이라 말한 이들 네 남녀는 팽무성의 부친 밑에서 무예를 수련한 이들로 모두 팽무성은 물론이요.
팽무성의 형 팽무일보다 항렬이 높았다.
이들은 팽무성이 새로 장주가 된 이후 성심껏 예를 갖춰 그를 보필하였다.
탁현 일대에선 이들의 무예가 고강하다 하여 팽가사협이라 불렀다.
팽무성은 자신이 나이도 어리고 장주의 신물인 금강대도도 찾지 못하여 따로 제자를 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채 부인께서는 남당에서 아기를 돌보고 계십니다.”
소향이 이렇듯 미리 말하여 채 부인이 나와 인사 못함을 넌지시 말하였다.
“제 처가 며칠 전 해산하여 움직임이 불편합니다. 부디 양해하십시오.”
팽무성이 이렇듯 말하며 별채 안으로 들어가니, 긴 탁자에 하인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송현이 보기에, 팽가장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는 형편으로 팽무성의 사람됨이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할 위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여, 이만하면 황후에게 돌아가도 문제없음이 느껴졌다.
‘이왕 차려진 상, 맛이나 보고 가야겠다.’
황궁을 벗어나 시녀로서 억눌렸던 감정 역시 털어버리니, 송현은 급히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차려진 상이니 맛이나 보자 생각하였다.
팽무성의 권유로 송현이 상석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드는데, 문밖이 꽤 소란했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가?”
팽무성이 시중드는 늙은 하인에게 물으니, 하인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무례한 자들이 장주님을 뵙고 무예를 겨루고자 찾아와 한대웅님께서 내쫓으셨더니, 그 수를 늘려왔습니다.”
“허허, 사람들 참… 허허.”
팽무성이 난감해 하며 허허 웃으니, 송현이 재미난 구경이라도 생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누가 팽 장주를 괴롭히나요? 괴롭히는 거죠? 그렇죠? 괴롭히죠?”
그녀의 이 물음은 마치 누가 괴롭혔으면 좋겠다는 듯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팽 장주를 공연히 괴롭히는 이가 있으면 혼을 내주고 돌아가 독고황후에게 칭찬을 받을 요령인 모양이었다.
‘잘 되었다. 이 집 살림살이가 괜찮아, 해 씨 아이들을 잘 돌볼 것 같아 내 할 일이 없어 곤란했는데. 내가 괴롭히는 자들을 대신 혼내주고 돌아가야겠구나.’
송현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재촉하니, 팽무성이 멋쩍게 웃으며 답하였다.
“실은 한왕 전하께서 무림고수를 초청한다 하시며 사람을 보내셨는데, 소인이 장주에 오른지도 몇 해되지 않았고 장주의 신물도 도둑맞아 찾아야 하는 형편에다가 대를 이러 내려온 팽가장의 명성과 달리 제가 배움이 부족하여 내세울 무예가 난잡하니…….”
“그래서요?”
송현은 팽 장주의 장황한 설명이 지루해 재촉했다.
“허허허, 본의 아니게 한왕 전하의 초청을 사양했습니다. 그 후로 한왕 전하의 초청을 받거나 직접 찾아 휘하에 들고자 한 위인들이 저를 업신여기고 겨뤄보고자 매일 같이 찾아와 장원 밖이 항상 소란스럽습니다. 송구하옵니다.”
어리숙하기로 소문난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 차분하면서도 진중히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니, 듣고 앉아 있던 온동이 머리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팽 장주님이 어리숙하기로 유명하시더니, 바보가 아니라 그냥 착한 사람이셨구먼. 저리 말 잘 하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속이려 드는 사람들이 바보지. 그런데 장주의 신물은 우리가 가져왔는데…….’
온동이 이렇듯 생각할 때, 독고선이 일부러 낡은 헝겁에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손에 쥔 금강대도를 바라보며 팽무성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장주의 신물이 있으면 한왕 전하의 초청을 수락할 생각인가?”
나이 대가 비슷하나 낙랑 사냥대회 전에 만나 아직 말을 놓아보지 않았던 팽무성에게 독고선이 어색해 하며 더듬더듬 물었다.
“하하하, 이 사람. 해선,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오죽 변변치 않아야 장주의 신물을 빼앗기겠나. 내 무예가 졸렬해 한왕 전하께 폐만 될 것이라, 장주의 신물이 있다하여도 초청을 사양할 수밖에 없네.”
“허허.”
“입신양명도 좋고 공을 세움도 좋으나, 제 분에 맞게 행동해야지 논두렁에 앉은 두꺼비가 욕심을 부린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못 잡는 법을 아니, 나는 안분지족하려네. 하하하.”
한왕 양양이 삼십만 정병 이외에 별도로 무림 고수를 초청하고 그의 휘하로 무예가 출중한 이들이 모임은 고구려에 위협이 되었다.
그렇기에, 독고선이 넌지시 팽무성의 의중을 떠 본 것이었다.
‘황후의 시녀가 곁에 있는데도 단호히 말하니, 허언은 아니겠구나.’
팽무성이 고구려에 위협이 된다면 독고선은 금강대도를 그에게 건네지 않고 고구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팽 장주가 곤혹스러운 형편이신 듯하니, 내가 나가 좋은 말로 타일러 돌려보내겠습니다.”
팽무성의 이야기가 진실돼 보인 송현이 대뜸 일어나 무례한 이들을 타일러 보내겠다며 밖으로 나가니.
팽무성과 독고선이 놀라 서러 마주 보았다.
“아니, 어찌?”
호위교위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송현의 뒤를 따르니, 팽무성과 독고선 일행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의 시녀가 우리 팽가장에 도움을 준다니, 이게 뭔 일인가?’
팽무성이 머리를 갸웃하며 송현의 뒤를 따르니, 마치 송현이 팽가장의 안주인 같았다.
좁은 문을 지나, 넓은 정원에 나오니, 넓은 장원 문이 박살 나 열렸고 이십여 명이 넘는 사내들이 다채로운 행색으로 제각각 병장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이들 중 대여섯은 머리가 깨지고 이가 부러져 피를 흘리며 한대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들의 앞을 막아 선 팽가사협은 병장기도 없이 맨손으로 섰는데, 한대웅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이 아마도 장원 밖을 지키다가 입은 상처 같았다.
“팽가장의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구려. 그래 네 분 중 누가 팽 장주요?”
이마가 깨진 사내가 애써 여유를 부리며 말하였다.
그러나, 말하는 동안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눈으로 들어가 닦느라 무척 궁색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