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팽가장의 비극 (1)
장안으로 천도한 양견은 정치적 동반자 독고황후(독고가라)와 상의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과도한 공사를 중단 시켰다.
또한 세금을 내리며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균등제를 실시하였다.
여기에, 과거제를 실시하여 귀족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어, 개황율령을 선포하여 제도와 관제를 정비하는 성군으로 이때를 중국인들은 ‘개황의치’라 칭송하게 된다.
양견 스스로도 근검절약하여 모범을 보였는데.
양견이 친히 행차하여 민생을 돌아보던 중.
백성들이 굶주리고 매우 고달프게 사는 모습에 양견이 눈물을 흘리며 환궁하니, 놀란 독고황후가 신하에게 백성들이 먹는 것과 같은 떡을 가져오게 하였다.
쌀은 거의 없고 겨와 풀뿌리를 섞어 만든 떡이 수라상에 오르니, 독고황후가 눈물 흘리며 그 맛을 보았다 한다.
또한 형리가 죄수들을 장안으로 압송하던 중.
죄수들의 목과 발의 칼과 족쇄를 풀어준 일이 있었는데, 양견이 이 일을 전해 듣고 향리를 칭찬하니.
독고황후가 죄수들을 풀어줘 가족에게 돌려보내었다.
이런 일화들은 백성들에게 큰 울림이 되어 모두 양견을 진심으로 따르며 독고황후를 칭송하니, 중원을 통일한 양견과 독고황후가 백성들의 마음마저 얻은 것이다.
하지만, 양견이 차남 진왕 양광에게 진을 멸하라 명한 후.
양광이 진의 공주 선화부인 진씨(宣華夫人 陳氏)를 데려오면서부터 수나라에 불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하의 절색 선화부인을 후궁으로 들인 양견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고황후 몰래 후궁을 더 들였다.
그러나, 독고황후가 이를 두고 보지 않고 칼을 차고 후궁에게 가서 후궁의 목을 친다.
독고황후 몰래 들였다 하여도 후궁을 죽인 죄를 독고황후에게 한 마디도 묻지 못한 채 양견이 풀죽어 사냥을 나가니, 보다 못한 신하 고경이 직언을 고하였다.
“폐하, 일개 여자 하나 때문에 나라를 망쳐선 안됩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독고황후는 고경을 눈여겨보게 된다.
‘고경은 나를 일개 여자로 업신여기나, 황제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충신이다.’
독고황후는 과격한 성격이지만,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여장부였다.
양견의 여자 문제로 황궁이 시끄러운 중에도 방릉왕(房陵王)이자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된 장남 양용(楊勇)은 여색을 밝히며 행실이 문란하였다.
이를 두고 볼 독고황후가 아니었기에 양견에게 황태자를 바꾸라 요청하여 양용은 폐위되고, 차남 양광이 황태자에 책봉된다.
양광도 형인 양용 못지않게 행실이 바른 인물이 아님에도 독고황후의 눈에 들고자, 금욕적인 생활을 한 덕에 황태자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에서 폐위되었다 하여 가만히 물러날 양용이 아니었기에, 독고황후의 눈치를 살피며 때를 기다리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 태왕이 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국서를 보냈고.
독고황후는 양견에게 다섯째 아들 한왕 양양에게 고구려 정벌 행군원수를 맡기라 권하였다.
양양은 다른 형제들보다 지혜롭지도 학문의 깊이가 높지도 않았으나, 검소하고 여색을 탐하지 않는 행실이 독고황후의 눈에 들어와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양양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왕세적도 행군원수로 삼고 직언을 고할 줄 아는 고경에게 양양을 보필게 하니, 오히려 태자 양광이 두려워하여 딴 마음을 먹게 된다.
‘나를 폐하고 양양을 황태자로 앉히시려는구나.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느니라.’
장남 양용도 다시 황태자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상황에 차남 양광마더 모후와 다섯째 남동생을 상대로 위험한 마음을 품으니.
수나라 황실은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다.
* * *
탁현에 정병이 속속 모이고 양양이 이를 지휘하니, 독고황후가 격려하기 위해 탁현으로 향하였다.
양견의 명으로 무림 고수들을 양양이 모우던 중이라 탁현의 모든 거리와 객잔은 병장기를 지닌 인물들로 인해 무척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황태자 양광은 오히려 이때를 기회라 여기고 있었다.
한편, 성군으로 추앙받던 양견은 독고황후가 인수궁을 비우니, 궁 안에 몽둥이를 마련하여 자신이 제정한 개황율령을 어기며 황제 스스로 형벌을 가하는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인수궁에서는 사소한 죄명으로 하루에 맞아 죽는 이가 수십 명에 달하였다.
어쩌면 성군으로서의 양견은 과격한 독고황후가 통제하여 만든 모습이었고, 몽둥이로 형벌을 가하는 푹군의 모습이 양견의 본 모습일 듯하다.
양견은 독고황후가 태자로 앉힌 차남 양광을 꼴도 보기 싫어하여 영주총관에 앉히고 위충을 요서총관에 앉히니.
이는 곧 최전선에서 고구려군을 맞아 싸우란 의미였다.
“어찌! 어찌 태자인 내가 영주총관을 맡아 고구려를 대적하란 것이오. 어찌 다섯째 아우가 행군원수로 나보다 그 지위가 높단 말이오!”
양광이 분을 참지 못하여 양소를 붙잡고 울분을 토로하였으나, 독고황후가 없는 인수궁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을 때려죽이는 양견의 명을 거역할 용기도 없었다.
“차라리 잘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선 황태자 전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니, 일단 장안을 떠나 영주와 가까운 탁현에 머무르시며 대업을 도모하십시오.”
양소가 이렇듯 양광을 진정시킴은 독고황후와 양양을 노림과 황제 양견 몰래 힘을 키우고자 함이었다.
탁현이 비록 넓다 하나, 이토록 많은 이들이 일시에 모이니, 이곳은 고구려를 상대로 전란을 벌이기 전부터 치열한 암투의 중심이 되었다.
* * *
검소한 독고황후의 행차는 황제 양견과 달리 화려하지도 수행 인원이 많지도 않았다.
북주 황실의 호위를 담당했던 선우천이 수에 투항하여, 금의위(錦衣衛)의 호위시랑(護衛侍郞)이 되어 황제 양견이 아닌 독고황후의 친위 조직인 숙위(宿衛)로서 호위를 맡았다.
그가 이번에도 황실 호위교위(護衛校尉) 오십 명만 이끌고 행차를 수행하였다.
독고황후는 평소 대동하는 시녀들과 황관들의 수가 적었는데, 이번엔 무예가 뛰어난 시녀 셋만 따르게 하였다.
금칠한 수레에 올라 당당히 휘장을 걷어 올린 채 탁현에 들어선 천하제일의 여걸 독고황후의 모습에 백성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양양과 왕세적이 황후를 맞기 위해 군사를 풀어 미리 길을 닦고 행차를 호위하려 했다.
그러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싫어하는 독고황후의 엄명에 황제 양견조차 꼼짝 못하는 그녀의 행차는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와 이를 호위하는 오십여 기가 전부였다.
“나의 백성들을 내가 두려워해서야 어찌 황후며 국모라 하겠느냐? 내 나라에서 내가 위협받지 않도록 그대가 애써라.”
호위시랑 선우천의 무용이 중원 제일이라 하여도 황제 양견이 행차 시 삼십만을 수행하게 한 것과 사뭇 대비되었다.
평소 독고황후는 낙양과 장안에서 이런 행차로 백성들을 살피며 길가에 아이들이 엎드려 있으면 수레로 불러 품에 안고 먹을 것을 내어주곤 하였다.
덕분에 황후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 백성들이 큰 길로 몰리곤 했었다.
아침 일찍 팽가장으로 향하기 위해 큰 길로 들어선 독고선 일행은 인파들에 떠밀려 길을 걷다 갑작스레 황후의 행차와 마주하게 되니 크게 당황하였다.
“일 났슈. 황후가 왔나봐유.”
온동이 사람들로 막힌 길을 가리키며 누구보다 빨리 넙죽 엎드렸으나, 독고영은 황후의 모습을 보고자 깡총깡총 뛰었다.
이 모습에 온동이 기겁하여 급히 독고영의 손을 잡아 엎드리게 하였다.
“영아, 머리 들면 큰 일 나는구먼.”
온동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속삭이니 독고영도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물럿거라! 황후의 행차시다. 모두 엎드려 맞으라!”
이때, 황후의 행차 호위 선두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리니, 모두가 엎드려 황후의 행차를 맞이했다.
급히 길에서 떨어진 독고선과 해진도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행차가 멀리 떠나길 바랐다.
“아무래도 우리가 때를 잘못 택한 것 같습니다.”
독고선이 소리 죽여 말하니, 해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였다.
휘장을 올린 채 수레에 앉은 독고황후는 누군가 자신을 시해할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조금의 두려움 없이 엎드려 자신의 행차를 맞는 백성들을 하나하나 굽어 살피며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시야에 오라버니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여동생 곁에 엎드린 모습이 어릴 적 자신을 돌보던 오라버니와 막내 남동생이 떠오른 것이다.
“우리 남매 참 의가 좋았건만.”
독고신은 일곱 딸과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독고가라가 일곱째 딸이었다.
북주 황실의 노여움을 산 독고신이 자결하고 양견이 북주의 황위를 찬탈하며 의좋았던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며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였다.
“멈춰라.”
독고황후가 낮고 위엄있게 행렬을 멈추라 명하니, 곁에 선 시녀 최희가 말에 올라 수레를 따르는 시녀 수련에게 눈짓을 보냈다.
“멈추어라!”
수련의 작고 고운 입에서 낭랑히 외치자,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와 행차를 호위하는 오십여 필의 말들이 일제히 발을 멈추었다.
수련의 뒤에서 따르던 시녀 송현이 최희의 시선을 따라 온동과 독고영을 바라보고는 말에서 내려 두 아이 앞에 섰다.
“머리를 숙인 채 일어나거라.”
송현의 목소리에 위엄이 서려 감히 거역하지 못한 온동이 먼저 일어나, 독고영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나를 따르거라. 입을 열지도 말고, 고개를 들지도 마라.”
계속하여 송현이 낮고 차분히 말한 뒤 앞장서니, 온동이 독고영의 손을 쥐고 따랐다.
“동이와 영이가…….”
독고선이 놀라 고개를 들려하니, 해진이 제지했다.
“머리를 숙이시오.”
금칠한 수레 곁에 온동과 독고영이 서니, 독고황후가 웃으며 말하였다.
“아침 일찍 밖에 나온 것이냐?”
부드럽고 자상한 목소리였으나, 과격하기로 유명한 독고황후였기에, 혹여 어린 독고영이 실수할까 염려된 온동이 먼저 답하였다.
“황후 마마의 행차를 보고자 왔습니다.”
온동이 정확한 발음으로 답하니, 독고영이 놀라 온동을 빤히 바라보았다.
“허허, 나를 말이더냐? 그래 보니 어떠하냐?”
독고황후가 온동과 독고영의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워 재차 물은 것이다.
“제가 지금껏 봤던 사람 중 두 번째로 아름다우십니다.”
고작 많아봐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이런 소리를 하니, 독고황후가 깔깔깔 웃었고 시녀들도 얼굴을 돌려 미소 지었다.
“내가 둘째더냐? 그래 첫째는 누구더냐? 한번 들어나 보자.”
독고황후가 이렇게 물으니, 온동이 천연덕스럽게 답하였다.
“꿈에서 본 옥황상제님의 따님이 첫 번째였습니다.”
“뭣이라? 옥황상제의 딸이라 하였느냐? 하하하. 그건 나도 못 당하겠구나. 하하하.”
독고황후가 흡족해 웃고는 독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순간 거리를 두고 엎드린 독고선의 등에서 땀이 흘러 흠뻑 등을 적셨다.
“저는 영이고요. 이 오빠는 동이에요.”
독고영이 앙증맞은 입으로 잘도 말하니, 독고황후가 또다시 물었다.
“그래 영이와 동이구나. 성은 어찌되느냐?”
이 물음에 독고영의 곁에 선 온동의 눈이 당황하여 커졌다.
하지만 독고영은 요 며칠 온동이 “우린 이제 해 씨여. 해진님이 할아버지고, 독고선님이 아버지여. 해진! 해선! 영이는 해영이고 난 해동이여.”라고 신신당부했던 말을 기억해 야무지게 잘도 답하였다.
“우리는 해 씨예요. 오빠는 해동이고, 저는 해영이에요. 할아버지는 해진이고 아버지는 해선이에요. 우리는 한가족이에요!”
묻지도 않은 말까지 줄줄 말하니, 귀엽고 기특하여 독고황후가 최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송현은 이 아이들의 집에 들려 살림을 보살펴 주고 오너라.”
최희가 독고황후를 대신하여 명을 내리니, 송현이 머리 숙여 명을 받았고, 송현과 호위교위 한 명만 남긴 채 황후의 행차는 다시 움직였다.
‘아, 이거 정말 큰 일 났구먼. 우린 집이 없는데, 어디로 데려가야 하남?’
온동이 이런 근심을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웅! 여긴 어쩐 일인가? 꼬마 아가씨도 같이 있네? 하하하.”
팽가장의 장주 팽무성이 황후의 행차가 지나 앞이 트인 길 건너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웃고 있었다.
‘야단났구먼. 저 순박한 분이 단번에 우리가 고구려에서 온 것을 말하면 어쩐다?’
갈수록 큰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