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온달, 또다시 적봉진으로 향하다. (1)
끝내 거리를 벌리지 못한 경우의 검 끝이 석보의 가윗날에 잘라져 위기에 처하자, 온달로 가장한 막바우가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경우!”
막바우의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함을 단번에 눈치챈 석보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경우란 놈이 내 적수가 못되어 곧 목이 날아갈 처지인데도 온달 저놈은 구하러 못 오는구나.’
온달이 가짜라 단정 내리며 경우를 철저히 농락하다 고구려군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잘라야겠다 생각한 석보가 가윗등으로 경우의 가슴팍을 후려치고, 곧바로 어깨를 찌르며 여유를 부렸다.
“경우 장군! 명성과 달리 용력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니오? 하하하.”
자신의 가위를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는 경우를 조롱하며 석보가 또다시 크게 외쳤다.
“온달은 죽었다! 저놈은 가짜다! 내 고구려놈들이 보는 앞에서 이 경우란 놈의 목을 잘라 보이겠노라! 어디 가짜 온달이 구할 수 있는지 다들 보아라!”
이 소리에 막바우가 놀라 급히 경우를 구하고자 말을 몰아 나가려 할 때, 뒤에서부터 매의 울음이 길게 울더니 멀리 신라군의 뒤까지 날아갔다.
온달의 철궁이 날린 효시였다.
“자, 장군님?”
막바우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고구려군이 고개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철궁을 어깨에 멘 온달이 누렁이에 올라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힘찬 함성에 당장 경우의 목을 자를 듯 험악했던 석보의 가윗날도 멈추었다.
‘저 흰 천으로 둘둘 감은 놈이 온달인가?’
범상치 않을 정도로 큰 체격에, 가벼이 철궁을 당겨 천 보 밖까지 효시를 날릴 수 있는 신력을 보았으니, 석보가 이렇듯 생각함은 당연하였다.
격한 함성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온 온달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막바우에게 검을 달라 손을 내밀자 막바우가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막바우, 애썼네. 검을 주시게.”
“장군님, 이왕이면 철궁으로 저놈 대가리를 맞추시지… 왜 멀리 날리신 것인지…….”
“그건… 음, 나도 경황이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참고하겠네. 민망하니, 검이나 어서 주게. 허허허.”
온달의 이 말에 바로 막바우가 운철 대검을 건네니, 갑주도 걸치지 않은 온달이 운철 대검을 높이 치켜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몰아 나오며 소리쳤다.
“이 온달과 겨루기 위해 오신 손님이신가? 여기 나왔으니, 어디 일 합만 겨뤄 봅시다!”
온달이 경우를 대신해 단 일 합만 겨루자 말하며 달려오니, 위기를 모면한 경우가 말을 돌려 오는데, 온달이 스쳐 지나가며 다정히 말하였다.
“애쓰셨소.”
온달의 등장으로 고구려군의 사기가 드높아져 가니, 석보도 물러설 수 없어 말을 달려 맞섰다.
“왜 일 합이요? 어쨌든 소문으로만 듣던 운철 대검이 얼마나 단단한지 봅시다!”
경우의 검끝을 자르듯 가윗날을 벌려 운철 대검도 자르고자 석보가 덤비는데, 온달은 이를 알고도 피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운철 대검을 가윗날에 밀어 넣으며 외쳤다.
“그래 나도 얼마나 단단한지 궁금하오! 어디 봅시다!”
운철 대검을 석보의 가윗날이 꽉 물고 자르려 하나, 온달은 파산귀검의 호흡법으로 흉곽에 바람을 넣고 계속 힘을 주어 밀어붙였다.
오히려 가윗날이 으깨지고 날과 날을 이은 쇠마저 부서뜨린 운철 대검이 그대로 석보의 머리를 향했다.
“으악!”
석보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머리가 터져 그대로 절명하자, 고구려군이 기뻐 더욱 크게 함성을 지르며 누구의 명도 없음에도 고개 아래 신라군을 향해 돌진을 하였다.
“소성주의 시신을 수습하라!”
너무도 허무하게 석보가 단 일격에 즉사하자 도주하기 바쁜 신라군 속에서 장솔이 외치며 석보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밀어닥친 고구려군의 맹렬한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말 머리를 돌려 내빼야 했다.
* * *
석보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제 한 목숨 살고자 한참을 달린 장솔의 앞에 한 무리의 군사가 나타나는데, 석보의 아우 석진이 당항성의 군사 오천을 이끌고 온 것이다.
“형님은 어찌 안 보이시오?”
올해 열여덟 석진이 나이와 달리 침착히 물으니, 장솔은 답하지 못하고 울 뿐이었다.
그간의 자초지종을 한참 뒤에 들은 석진이 평정을 유지하며 장솔에게 말하였다.
“애썼소. 지금부터 형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온달의 뒤를 쫓을 터이니, 장솔 책사도 나를 따르시오.”
장솔이 석진을 안내해 석보가 전사한 고개에 당도하니, 그 자리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부서진 가위 조각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온달이 명하여 고구려군이 석보의 시신을 수습해 준 듯하였다.
석진이 급히 내려 돌무더기를 치우려 하자, 장솔도 함께 거들었고, 군사들마저 도와 돌을 거둬낸 그 자리에 깊게 땅을 파고 큰 관이 묻혀 있었다.
온달이 산 채로 누워 있던 바로 그 관으로 이제는 죽은 석보가 들어 있었다.
석진은 형의 시신을 수습한 관이 제법 훌륭하니, 그대로 담아 당항성으로 옮기라 명하고는 장솔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난 더 이상 온달의 뒤를 쫓지 않을 것이오. 누가 위례성을 찾든, 고악 일대를 되찾든, 관여치 않고 당항성으로 돌아갈 것이오. 장솔 책사도 나를 따르시구려.”
나이 어리지만 석진의 행동이 무척 차분하여 장솔은 따르겠다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장솔은 석진을 섬기고, 몇 해 뒤 석진은 당항성의 성주가 되어, 훗날 연개소문의 여동생 연수영과 당항성을 놓고 일전을 벌인다.
당항성의 군사들이 회군한 후 며칠 지나 각간 김서현이 상주정의 군사 이만을 이끌고 고구려군의 뒤를 쫓으며 잃었던 성을 되 찼는데, 위례성 근처에 다다르자 정찰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아뢰었다.
“고구려군이 회군하며 곳곳에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위례성 근처에도 쌓고 한수 너머 아차산에도 쌓았는데, 인근 주민 말로는 온달의 무덤이라 합니다.”
이미 석보가 돌무더기를 보고도 쫓아가 온달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잘 아는 김서현인지라 이 보고에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찬이 말하길, 장군성이 빛을 잃어 온달이 죽고, 내가 빼앗긴 성을 찾을 거라 하였다. 하지만 석보가 온달이 죽었으리라 확신하여 고구려군의 뒤를 쫓다 오히려 주었으니, 내가 석보의 뒤를 따라 그놈이 정녕 죽었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위례성까지만 취하고 멈출 것이다.”
김서현이 한수를 넘지 않고 위례성에서 멈추니, 온달의 고구려군들도 신라의 진격을 막지 않고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 * *
한수를 넘어 진격해 오는 신라군을 물리치고 죽령까지 진군해 고토를 수복했던 온달은 결국 아차산성까지만 수복한 채 돌아왔다.
오부의 귀족들은 온달이 더 큰 공을 세우지 못한 채 중상을 입은 것에 크게 기뻐하였다.
“신라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으로 그쳐 다행이오.”
“그러게 말이오. 온달은 물론이요, 휘하 장수들조차 평민 출신의 군대 아니었소. 그들이 공을 세우면 태왕이 우리 귀족들을 대신하여 평민들을 계속 중용할 단초가 될 뻔했으니, 얼마나 다행이오.”
귀족들의 이런 웅성거림이 태왕을 알현키 위해 입궐한 연태조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였다.
‘천하의 쓸모없는 것들이 대를 이어 권세만 생각하는구나. 내 언젠가 힘을 길러 저놈들의 쓸데없는 머리통을 잘라 돼지우리에 처넣을 것이다.’
연태조가 이런 다짐을 하듯, 사지에서 온달을 구해 평양성에 돌아온 그를 반기는 오부의 귀족은 고작 몇 사람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힘이 더욱 강해짐을 두려워하는 귀족들의 수만 더 늘어 있었다.
연태조도 이 사실을 잘 알기에, 태왕을 알현한 후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의 일행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늙은 탁발승이 목탁을 두드리다가 연태조를 보고 다가와 물었다.
“쉰에 첫아들을 보셨습니까?”
“아니오만?”
이미 모용설에게, 연개소문이 너무 빨리 태어나 귀살이 붙었다고 들었기에, 연태조가 심드렁히 탁발승에게 답했다.
“후에 아들과 딸을 더 보셨지요?"
“그러하오.”
“그렇다면 이 아이는 평양성에 두지 마시옵소서.”
“어찌 그리 말하는 게요?”
연태조가 탁발승의 뜬금없는 소리에 되물으니, 탁발승이 하얀 눈썹을 일으켜 세우며 엄히 말하였다.
“이 아이가 평양성에 있으면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뿐더러 많은 이들이 천수를 못 누릴 것입니다.”
“뭐라? 이 노망난 땡중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모용상이 버럭 소리 지르며 당장 말에서 뛰어내리고는 곧장 손을 뻗어 탁발승의 머리를 후려치니, 비쩍 마른 탁발승은 맥없이 나뒹굴었다.
“멈춰라!”
연태조가 모용상이 탁발승을 해치지 못하게 막은 후 말에서 내려 탁발승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빛이 탁하지 않고 진정성이 보여 미친 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어디로 가고, 언제 평양성에 올 수 있는가?”
“삼한이 아닌 곳이면 좋을 듯하며, 아이가 어떤 일에도 분을 이길 힘을 지닌 다음에 돌아오면 될 듯합니다.”
“분을 이긴다라…….”
근래 들어 오부 귀족들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연태조는 매 순간 나라를 좀먹는 오부 귀족들을 도륙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에, 탁발승의 이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나를 견제하듯 내 아들도 견제할 것이고, 이를 참지 못한 아이가 일을 낼 수도 있다. 혹은 오부 귀족 중 누군가가 노릴 수도 있다.’
이렇듯 생각이 이르렀으나, 내색하지 않고 탁발승을 일으켜 세우며 말하였다.
“시주나 받아 가시구려. 내 아이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아이의 안녕을 위해 목탁을 두드리는 탁발승을 뒤로하며 안으로 들어온 연태조가 자신을 따르는 모용설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네가 보기에 개금(蓋金, 연개소문 淵蓋蘇文의 아호)이는 어떨 것 같더냐?”
연태조를 따라 궁에 들어갔던 모용설이 곁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공자께서는 무병장수하실 것이오나, 오늘 제가 궁에서 본 바로는 오부의 귀족 중 공자께 죽임당할 자들이 수두룩하였습니다.”
* * *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평양성에 들어와 수와의 일전을 대비하고자 태왕을 알현한 서부총관 을지문덕이 주위 시선을 피해 온달의 집을 방문하였다.
“총관,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나, 그래도 많이 호전된 온달이 을지문덕을 반갑게 맞으니, 을지문덕이 미안해하며 말하였다.
“위장군, 부탁이 있어 왔소이다.”
“소장에게 하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온달이 망설임 없이 물으니, 을지문덕이 오히려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곧 수와의 일전이 예상되어 어렵게 부탁하는 것인데, 위장군이 적봉진에 한 번 더 가셔야겠구려.”
을지문덕의 이 말에 온달이 웃으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하였다.
“제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인들 못 가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온달과 을지문덕이 적봉진에 관해 논의하고 있을 때, 하인이 방문 밖에서 고하였다.
“장군님, 막리지 합하께서 뵙고자 오셨습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준 연태조가 방문했다는 말에 온달이 나가 맞으니, 을지문덕도 그 뒤를 따라 나와 연태조에게 인사를 하였다.
“합하께서 위장군의 쾌차를 기원하고자 오셨나봅니다.”
“쾌차는 공주께서 기원하실 것이고, 나는 위장군과 총관에게 부탁이 있어 왔소이다.”
연태조는 을지문덕이 함께 있음을 미리 알았던 듯 답하였다.
“내게도 말입니까? 제가 이곳에 있음을 아셨습니까?”
언제나 여유로운 표정의 을지문덕이 당황하여 물으니, 연태조가 냉정히 답하였다.
“오부 귀족은 물론이요. 대형 이상 관리는 따로 사람을 붙여두었소. 그게 요동성이라도 말이오.”
지극히 위험한 발언이었으나, 연태조의 표정은 무척 차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