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온달의 무덤 (9)
다음 날 새벽, 동이 트지 않은 어둠 속을 횃불도 들지 않은 채 고구려군이 성산산성을 몰래 떠나기 시작하였다.
어둠에 의지한 탈출로 신라군이 두려워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모두의 표정은 침통함이 가득해 어둠에 눈물을 흘리며 걷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는 경우가 맡았고 행렬의 끝은 기 씨 사 형제가 지키며 따르었는데, 모두 흰 천을 이마에 두르고 있었다.
이 행렬 중간에 관을 실은 수레가 섞여 있었다.
수레의 곁을 평강이 눈물 흘리며 따르는데, 소리 내지 않고 울다가 주저앉고, 따르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니, 모용설이 다가와 부축해 함께 걸었고, 연태조가 그 뒤를 분노가 사무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따랐다.
단 사부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용상을 부축해 걸으며 이를 꽉 깨물은 채 걸었다.
이렇듯 모든 이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둘러 성산산성을 내려왔다.
산 아래 서쪽 방면으로 관을 실은 수레가 내려오니, 무엇이라도 걸린 듯 수레가 멈추어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였다.
언제 신라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수레가 멈춰 행렬의 발도 덩달아 멈추니, 연태조가 당황하여 소리 낮춰 명하였다.
“어찌,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서둘러라! 신라 놈들이 급습해 올 것이다.”
엄히 명을 내리니, 군사들이 달라붙어 수레를 밀어보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소란이 신라군에게 알려질까 두려운 연태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처럼 흘렀다.
“어서 밀어라. 결코 지체해서도, 두고 가서도 안 된다.”
절대로 신라군에게 넘길 수 없는 관이 분명하였다.
고구려군 모두가 이 움직이지 않는 수레를 지키고 함께할 결연한 의지를 지녀, 누구도 먼저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이 하나 없었다.
주인 잃은 누렁이가 수레의 곁으로 다가와 제 머리로 수레를 밀어보았으나, 성산산성에 미련이 남은 듯 관을 실은 수레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어느덧 동이 터오며 점점 더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길 위에 행렬은 고스란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곧 신라군에게 좋은 사냥감이 될 것임이 분명하였다.
상황이 위급함을 평강이 깨닫고 희고 고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관을 바라보더니, 마치 산 사람에게 전하듯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롭고 처연하였다.
“장군, 생과 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인제 그만 집으로 가 편안히 쉬시옵소서.”
그녀의 애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제야 수레가 땅에서 떨어져 움직였다.
이 광경을 숨어서 모두 지켜보던 신라의 정찰병이 급히 돌아와 고하니, 석보가 기뻐 장솔의 손을 덥석 쥐며 말하였다.
“내 뭐라 했는가. 죽었지 않은가. 하하하. 내 직접 군을 몰아 고구려 놈들의 배후를 공격하며 서쪽으로 몰아가겠네. 하하하.”
“소성주, 뭔가 이상합니다. 온달을 소인이 분명 며칠 전 보았는데 무척 강건하였습니다.”
장솔은 여전히 자신이 만난 사내가 막바우인줄 모르고 계속 석보를 만류하였으나, 석보는 전혀 장솔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바로 군을 몰아 회군하는 고구려군의 배후를 노렸다.
“대력부에게 적성산성이 비었으니 올라가 성주 노릇 열심히 하라 전하게나. 아! 우물은 사용하지 말라 내 당부도 전하고. 자넨 천천히 군을 이끌고 따라오시게나. 하하하.”
한참 신바람을 내며 석보가 오천 군사를 이끌고 먼저 떠나니, 장솔이 나머지 군사 일천과 보급 부대를 지휘하여 진영을 추스르며 뒤따를 준비를 하였다.
* * *
급히 성산을 돌아가니 정찰병의 보고대로 이제 막 성산을 내려와 행군하는 고구려의 회군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관을 끌고 어디로 장사지내러 가는 것이오? 두고 가면 내가 예를 갖춰 장사 치르겠소! 그 관을 나에게 주시오! 하하하.”
석보가 큰 소리로 조롱하며 군을 몰아 달려드니, 기 씨 사 형제가 행렬 뒤에 서서 파천진을 펼치며 지켰다.
“부월수들은 나와 진을 펼쳐라!”
기악의 명에 부월수들도 일제히 달려 나와 파천진을 펼치는데, 제법 훈련이 잘되어 보였다.
“온달의 시신만 내어주면 하루 정도 추격을 하지 않겠노라! 어찌하겠느냐? 그 관 버리고 갈 터이냐? 하하하.”
세상 모든 것이 즐거운 듯 석보가 크게 웃으며 묻는데, 신라군의 배후 성산에서 이에 화답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지도 않은 내 시신을 어찌 달라 하느냐? 신라에는 산 사람을 장사 지내는 풍습이라도 있는 것이냐?”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이 목소리에 놀라 석보가 돌아보았다.
시커멓고 거대한 운철 대검을 가벼이 한 손에 쥔 장수가 말에 올라 고개를 내달려 왔고, 그 뒤에 고구려 기병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따랐다.
그제야 장솔의 우려가 바로 떠올랐다.
“아차! 속았구나! 장솔의 말대로 온달이 살아 있었다. 모두 퇴각하라!”
석보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신라군은 도주하던 중으로 기 씨 사 형제와 고구려 기병들이 패주하는 신라군의 양옆을 공격하며 짚단 베듯 마구 눕히며 달려들었다.
이미 신라군은 겁에 질려 명을 듣지 않는 터라, 석보도 줄행랑 놓기 바빴다.
배후를 급습해 토끼 몰듯 서쪽으로 쫓으려 했던 석보가 도리어 쫓겨 오니, 장솔이 황망히 달려와 물었다.
“적의 매복이 있었습니까?”
“온달이 살아 있었다. 어지간한 매복 따위에 놀라고 당황할 내가 아닌데도 이번만큼은 놀랐네.”
아직도 놀랐는지 석보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다리를 휘청거리더니, 장솔에게 물었다.
“내 아우 석진이가 당항성에서 군사를 끌고 오며 고구려 놈들을 노릴 것인데, 온달이 살아 있으니 이를 알리고 대비해야 하지 않은가?”
“전령을 보내 조심하라 당부를 전하겠습니다.”
석보도 진정하고 다시 군을 몰아 고구려군의 뒤를 쫓을 궁리를 하는데, 정찰병이 돌아와 놀라운 사실을 고하였다.
“고구려 놈들이 북으로 방향을 틀어 가다가 수풀이 우거진 구릉에 돌무더기를 쌓고 떠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마치 커다란 무덤 같았습니다.”
“뭐라? 설마?”
장솔이 놀라 당황하자, 석보가 뭔가를 깨닫고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온달이 죽은 것이다! 내가 본 놈은 가짜야! 온달이 죽었다. 당장 추격해야겠구나.”
“이번에도 술책일지 모릅니다. 온달은 분명 멀쩡해 보였습니다.”
자신이 온달과 대화를 나누었다 믿는 장솔인지라 이렇듯 만류하니, 석보가 단호히 잘라 말하였다.
“아닐세. 분명 죽었네. 운철 대검을 든 놈이 진정 온달인지 혹은 가짜인지는 내가 겨뤄보면 알겠지. 이번엔 결코 당하지 않을 것일세.”
석보가 다시 군을 끌고 출발하려 하니, 장솔도 말에 오르며 말하였다.
“소성주, 저도 따르겠습니다.”
* * *
정찰병이 언급한 구릉에 가보니 수풀이 우거진 곳에 돌무더기가 거대히 쌓여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의 무덤처럼 보였다.
“파볼까요?”
장솔이 물으니, 석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시간 없네. 놈들을 쫓아가 두 눈으로 보면 알 것이니 서두르세.”
석보가 재촉해 행군 속도를 높여 달리니, 고악으로 향하는 고구려군의 긴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놈들을 쫓아라!”
석보의 명에 신라군이 함성을 지르며 맹렬히 쫓는데, 고구려 행렬에서 운철 대검을 한 손에 쥐여 어깨에 들어 멘 장수가 말을 타고 나오며 소리쳐 꾸짖었다.
“내 너희의 목숨을 가련히 여겨 뒤를 쫓지 않고 살려 보냈거늘, 어찌 이리 계속 망령되이 행동하느냐? 불과 방책으로도 나를 막지 못한 것들이 뒤쫓아와 뭘 할 수 있을 성 싶으냐?”
낮은 고개에 천둥 치듯 호통이 메아리쳐 울리니, 신라군의 발이 땅에 붙은 듯 몸이 얼어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였다.
이에 석보가 버럭 화를 내며 가위를 들고 앞으로 나가려 하자, 장솔이 운철 대검을 든 사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자! 제가 저자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온달이라 했습니다.”
장솔이 만난 인물은 온달로 가장한 막바우였으나,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래, 알고 있네. 나도 저자를 봤지. 저놈이 정녕 온달이 맞는지 아니면 온달이 죽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 보겠노라!”
온달의 등장만으로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지니, 아무리 고구려군이 지치고 굶주려도 이대로 군과 군이 맞부딪쳐 정면 승부를 벌임은 승산이 없다 여긴 석보가 장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을 달려 나갔다.
“그대가 위장군 온달이시오? 나는 당항성의 석보라 하오. 그대의 위명이 삼한 전역을 덮으니, 어찌 이 석보가 흠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오늘 그대를 가까이서 만나니 이는 하늘이 내린 복이라 여기는 바요. 부디 모자르다 내치지 마시고, 내게 백 수만 가르침을 주시구려!”
석보가 정중히 단기접전을 청하자, 온달로 가장한 막바우가 당황하여 답하지 못하였다.
운철 대검을 한 손에 쥐고 가벼이 들어 올릴 완력은 있으나, 온달이 지닌 무예를 펼칠 재간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경우가 대신 나서며 상황을 수습하였다.
“나는 고구려의 말객 경우다! 대모달께서 너를 상대하심은 그 격이 맞지 않으니, 내가 너를 상대하겠노라!”
“만부적 슬호화 장군을 꺾은 경우 장군이시구려. 좋소! 내 장군을 꺾어 슬호화 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온달 장군께도 가르침을 받겠소!”
석보가 사양하지 않고 말 달려와 가위를 휘두르니, 경우도 검을 빼어 들고 맞서는데, 경우의 검이 자신을 향하면 석보가 가윗날을 벌려 검을 물려고 하였다.
경우는 석보의 기괴한 가위를 꺼려하여 쉽게 석보의 몸에 검을 가까이 대지 못하였다.
모용상이 석보에게 당한 일을 군사들에게 전해 들은 경우가 극도로 경계를 한 것이다.
경우가 자신의 가위를 두려워하자, 기세 오른 석보가 더욱 거칠게 그녀를 공격했고, 경우는 가윗날에 검이 물려 잘리지 않도록 피하기 급급했다.
하지만 마냥 수비에 전념한다면 석보가 자신의 말 머리를 노릴 것을 경우도 알기에, 마음 한켠이 불안했다.
‘이대로 수비만 해서는 필경 모용상이 당하듯 나도 당할 것인데… 기회를 봐 살을 날려야겠구나.’
그러나 석보의 공격이 점점 더 거세져 좀처럼 경우의 뜻대로 거리를 벌릴 수가 없었다.
* * *
막바우가 온달로 가장하여 장솔을 속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평강이 한 번 더 막바우를 온달로 가장하여 뒤쫓는 신라군을 물리치자는 계책을 내었다.
이 계책으로 고구려군은 성산 아래에서 큰 효과를 보며 무사히 북으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이에 평강이 하나 더 계책을 내어 돌무더기를 쌓아 빈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뒤쫓는 신라군이 이 무덤을 파헤쳐 비었음을 깨닫고 온달이 살아 있다 여겨 추격을 포기하게 하려던 수였다.
그러나 석보가 무덤을 파헤치지 않고 바로 쫓아오니, 이번에도 막바우가 온달로 가장하여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석보의 추격으로 행렬이 멈춘 중심에 자리한 수레에는 여전히 커다란 관이 실려 있었다.
연태조와 모용상, 단 사부도 신라군과 맞서기 위해 뒤로 향하여, 군사 십여 명이 수레를 지키고 모용설이 평강을 부축해 남아 있었다.
온달과 평강이 아끼던 누렁이도 여전히 수레 곁에 남아 주인을 지켰는데, 누렁이의 눈에 관이 흔들리고 있음이 들어왔다.
누렁이가 모용설에게 몸을 기댄 평강의 머리에 콧김을 뿜으며 관을 가리키니, 평강이 반갑고 놀란 눈으로 관을 바라보았다.
“공주, 산 사람을 관에 이리 오래 담는 법이 어디 있소? 어쨌든 덕분에 편히 쉬며 왔구려. 허허허.”
수십 대의 화살에 상한 상반신을 하얀 천으로 둘둘 감은 온달이 제 관 뚜껑을 스스로 열고 상체를 일으켜 앉아 평강을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장군, 깨어나신 것이옵니까? 장군… 일어나신 것이옵니까? 의식을 차리신 것이옵니까?”
“그렇소. 공주, 배고프오. 그만 물으시구려. 허허허.”
온달이 의식을 되찾아 저승길에서 돌아오니, 평강이 너무도 기뻐 수차례 되물었다.
온달은 그 대답에 꼬박꼬박 답하고는 관 밖으로 나와 평강을 끌어 품에 안으며 말하였다.
“나를 지키느라 고생 많은 공주에게 죄스러운 일이나, 뒤가 시끄러우니, 잠시 살피고 와야겠구려.”
온달을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평강이 눈물 담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온달이 철궁을 둘러메고 누렁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