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온달의 무덤 (8)
온달의 중상이 심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성산산성의 고구려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전투를 치를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서쪽 방면은 아직 길이 막히지 않았다 합니다.”
돌비수가 정찰병의 보고를 전하며 성을 버리고 회군을 청하였으나, 중상이 심한 온달을 호위하며 굶주린 고구려군이 얼마나 멀리 퇴각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여, 막바우와 경우는 쉽게 답을 내지 못하였다.
“놈들이 쫓아 올 터인데…….”
영리한 기훈도 힘없이 중얼거릴 때 기룡이 뛰어 들어와 정찰병의 보고를 급히 전하였다.
“원군을 이끌고 모용상 공자가 단 사부와 함께 산 아래에 왔습니다.”
“정말이더냐? 원군의 수는?”
경우가 기뻐 물으니, 기룡이 머뭇거리며 답하였다.
“그게… 기병 오백입니다.”
고작 기병 오백이란 소리에 막바우가 크게 낙담하여 한탄하였다.
“시체만 늘릴 뿐이야. 기병 오백으론 무엇도 할 수 없다고.”
그러자 기룡이 한 가지 더 고하는데 이번엔 꽤 기쁜 소식이었다.
“정찰병이 보고를 하나 더 올렸는데, 막리지 합하와 공주님께서 군사들에게 군량을 짊어지게 하여 서쪽 방면으로 오시는 중이라 합니다. 그 속엔 기악 형님도 계십니다.”
“아니! 너는 왜 그 좋은 소식을 이제야 말하느냐! 그래 막리지가 이끈 군사는 몇이더냐?”
막바우가 재촉하자 기룡이 또 머뭇거렸다.
“그게 보병 일천이고, 기악 형님이 이끈 위례성 군사도 보병 일천입니다.”
적지 않은 수였으나, 현재 성산을 포위한 신라군을 각기 흩어져 대적하기엔 작은 수였다.
“우리의 남은 군사가 기병 이천여 기에 장창병, 창보병, 환도수, 부월수, 궁노병 등이 사천여 명이니 도합 육천으로 막리지와 기악의 군 이천과 모용상 공자의 오백을 더하면 모두 팔천오백으로 적지 않은 수다. 헌데 신라 놈들이 길을 열어줘 합치도록 두지 않을 것인데…….”
경우가 이처럼 근심하니, 막바우가 불쑥 일어나 장담하였다.
“내가 서쪽 방면으로 군을 끌고 나가 공주님을 맞이할 테니, 염려 마시게.”
“막바우, 자네는 안 되네. 여기 남게.”
막바우가 온달로 가장했었음을 경우가 기억하여 자신이 가겠다 말한 것이다.
* * *
날이 밝아 모용상이 다시 성산 아래 신라군 진영으로 홀로 말을 몰아가니, 기다렸다는 듯 석보가 가위를 들고 말에 올라 나왔다.
“연나라 놈아! 조반은 처먹고 온 게냐?”
석보의 이 물음에 모용상이 발끈하여 답하였다.
“네놈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먹으려고 아직 조반 전이다. 어서 오너라!”
“허허, 맹랑한 놈이로세. 그래 오라 하니 내가 가마. 하하하.”
석보가 껄껄껄 웃으며 말을 몰아 돌진해 오자, 모용상도 검을 빼어 들고 말을 몰아 덤벼들었다.
애초에 자신의 무예로는 석보를 대적할 수 없음을 전날 대결로 모용상도 잘 알고 있기에,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방비를 철저히 하며 오래 버티기로 작심한 상태였다.
석보가 공격하며 피하고 석보가 물러나며 공격할 듯 위협하여 다시 공격을 유도하며 죽을 둥 살 둥 피하니 전날보다는 꽤 오래 석보와 싸움을 펼칠 수 있었다.
‘이놈이 일부러 시간을 끄는구나. 그래 원하는 대로 놀아주마.’
석보도 모용상의 의도를 간파했으니, 일부러 거세게 공격하지 않고 합을 맞춰주며 성산으로 고구려의 원군이 오르도록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백 합을 겨루고도 승부를 내지 못하니, 석보가 급히 가위를 거두고 모용상이 내지른 일장마저 가볍게 왼손으로 쳐낸 뒤 호탕히 권하였다.
“해가 중천이다. 한 끼 든든히 채우고 다시 겨름은 어떠하냐?”
시간을 벌 기회라 모용상이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단번에 수락하였다.
“좋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오너라!”
단기접전을 벌이다가 배 채우자는 보기 드문 광경에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가 놀라 석보를 붙잡고 연유를 물었다.
“아니, 싸우다 말고 식사하는 경우도 있소? 이럴 거면 차라리 군을 몰아 저것들을 쓸어버립시다.”
대력부의 말에 삶은 닭을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으며 석보가 답하였다.
“저것들 기병인데, 성주의 군사는 모두 보병 아니오? 대군으로 밀어붙이면 저것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도망갈 것 아니오? 보병이 기병을 달리기로 잡을 수 있소?”
석보의 이 물음에 대력부가 답을 못하니, 술 한잔 입에 털어놓으며 석보가 대력부를 다독였다.
“저 산성의 고구려 놈들이 목표지, 저런 조무래기는 냅둬도 상관없지 않소? 내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심려치 마시구려. 하하하.”
배를 채운 석보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니, 장솔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속삭였다.
“당항성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그래 준비는 되었다 하냐?”
석보가 짧게 물으니, 장솔이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다음 보고도 마저 전하였다.
“헌데, 왕이 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당항성으로 원군을 청했다 합니다.”
“뭐라? 우리 삼한의 일을 왜 수에게? 그것도 당항성과 상의도 없이 원군을?”
“필경 온달의 고구려군을 두려워해 원군을 청한 듯하온데, 왕께서 우리 당항성의 힘만으로도 능히 고구려를 물리칠 수 있음을 믿지 않거나, 중앙 귀족들이 우리 당항성의 힘을 빼고자 함이 분명합니다.”
“우리 석 씨 일족도 신라의 이사금을 지낸 왕족임에도 저들은 아직도 우리가 바다 건너온 이민족이라 여기고 견제를 하는구나. 우리 당항성의 힘만으로 온달을 물리치고 내 반드시 서라벌 중앙 귀족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어 김 씨의 신라 왕좌를 우리 석 씨가 다시 찾을 것이야.”
당항성의 성주 석원과 그의 일족들은 신라의 네 번째 이사금 석탈해의 후손이었다.
석탈해는 본시 신라인도 삼한인도 아닌 이민족 사람이었다.
왜(倭)보다 동남으로 천 리나 더 먼 섬나라 용성국(龍城國)의 왕 함달파와 적녀국(積女國)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으나, 알에서 태어난 탓에 왕에게 버림받아 궤짝에 실려 표류하다 삼한까지 왔던 것이다.
이민족인 석탈해가 이사금에 올랐으니 당연히 견제가 심하였고, 후손인 석 씨 일족들도 중앙에 오르기 힘들었다.
석보는 어려서부터 겪은 멸시와 견제를 끊어내고 중앙에 세를 과시하고자 노력했기에 진평왕의 이 처사가 못마땅함은 당연하였다.
“지금부터 우리 당항성의 군사를 아낀다. 고구려군을 격파하되 힘은 비축해야 하느니라.”
석보가 이렇듯 명하니, 장솔도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
* * *
모용상이 말에 오르며 석보와 다시 대결을 펼치러 나가는데, 단 사부가 다가와 말하였다.
“합하께서 서쪽 방면으로 성산을 오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음, 그럼 나는 저 석보와 마저 대결을 벌일 터이니, 단 사부는 기병을 모두 끌고 합하를 도와 오르시오.”
“공자께서 홀로 남으시오면…….”
홀로 두고 감은 석보에게 모용상이 패해 죽거나, 신라군에게 사로잡힐 것이 분명하여 단 사부가 말을 잇지 못하니, 모용상이 태평히 답하였다.
“어차피 내 재주로는 저 석보란 자를 못 이기오. 죽었어도 어제 죽었을 몸이 하루 더 산 것이라 여한은 없소. 그럼 나는 가겠소. 애쓰시오.”
고집 세고 성미 급한 철부지 어린 사내아이가 벌써 성장해 자신을 돌봐준 연태조에게 보답하고자 목숨을 거니, 단 사부가 목이 메여 그저 떠나는 모용상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연의 황손! 배는 잘 채운 것이오? 하하하.”
석보가 유쾌히 웃으며 가위를 들고 달려들자, 모용상도 검을 빼어 들고 맞섰다.
* * *
서쪽 방면으로 성산을 오르던 고구려군은 짊어진 짐의 무게로 걸음이 더디었고 이때를 노려 석보 휘하 장수 대감 수장손이 보병 이천을 이끌고 급습해 왔다.
“공주를 모시고 산을 오르라!”
연태조가 기악에게 급히 명을 내린 후 자신도 급히 도주를 하니, 수장손은 짐을 지고 오느라 지친 고구려군을 너무도 쉽게 베어나가며 뒤를 쫓았다.
“쌀은 가지고 가야지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조롱하며 쫓아오자 열 뻗은 기악이 되돌아 맞서려 했으나, 연태조가 엄히 명하였다.
“어서 공주님을 모셔라! 허투루 목숨을 낭비 말라!”
일단은 성산산성에 오름이 시급한 일이라 여긴 연태조가 더욱 재촉했다.
이때 산 위에서 함성이 들리고 산 아래에서도 함성이 들려왔다.
기악이 위와 아래를 살피니, 위에선 경우가 산 아래에선 단 사부가 군을 이끌고 와 수장손이 급히 신라군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좀 더 추격해 와 산 위에서 일전을 벌여도 될 듯하였으나, 장솔이 군을 아끼라 명하여 애써 치열히 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이다.
연태조와 평강이 어렵게 성산산성에 당도할 무렵, 모용상은 죽을힘을 다해 석보를 대적하느라 온몸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잘도 피하는구나! 이것도 막아 보거라!”
석보가 조롱하며 가위 등으로 모용상을 후려치니, 가위 날에 반쯤 잘린 검으로 모용상이 막아보는데, 이때 석보가 가위를 살짝 틀어 가위 날을 쫙 벌리고는 모용상이 탄 말의 목을 단숨에 잘랐다.
이 바람에 모용상이 말과 함께 쓰러지며 결국 말 등에 몸이 깔려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석보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땅에 가위를 박아 세우고 모용상의 상체를 깔고 앉아 맨손으로 모용상의 하얀 얼굴을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패망한 연나라 놈이 고구려에 와서 고생이 많구나. 본디 제 나라가 없고 민족이 다르면 고생하는 법이다.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실컷 처맞거라.”
때리면서 조롱까지 더하니 악에 박힌 모용상이 소리쳤다.
“죽여라 이놈아! 죽여라!”
“죽이지 않고 실컷 매질을 한 뒤 발가벗겨 인두를 불로 달궈 연의 황손이라 등에 새긴 후 놔줄 것이다. 죽는 것은 그때 네놈이 알아서 하거라. 하하하.”
* * *
성산산성을 둘러본 연태조는 며칠을 굶주린 군사들의 몰골에 한숨만 나왔고, 침상에 누워 의식조차 없는 온달의 모습에 기가 막혀 말문마저 막혔다.
‘온달을 구하러 왔건만, 부질없는 짓이었구나.’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하여 평강이 소리를 내지 않으니, 이 또한 연태조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해 질 무렵, 피투성이의 모용상이 발가벗은 채 말에 올라 성산산성에 당도하니, 이 역시도 모두가 참담하여 울분을 토하는 이 하나 없이 소리죽여 그를 맞이했다.
연태조에겐 이날 하루는 그 어떤 패배보다 처참한 심정이 되어 성벽에 올라 묵묵히 성산 아래 신라 진영만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이때 모용설이 조용히 다가와 차분히 말하였다.
“공주께서 합하를 찾으시옵니다.”
* * *
정찰 나갔던 군사가 바삐 돌아와 장솔에게 고하였다.
“적성산성 내에서 곡소리가 들리고 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뭐라? 설마…….”
이 보고에 장솔이 놀라 급히 석보를 찾아 전하니, 석보가 무릎을 탁 치며 벌떡 일어나 외쳤다.
“온달이! 온달이 죽은 것이오! 만부적 온달이 죽었으니, 고구려군의 사기가 바닥을 칠 것이오! 하하하.”
“하오나, 소인이 온달을 만났을 땐 무척 강건해 보였사온데… 어찌?”
“이보게 장솔! 자네가 속은 것일세. 하하하. 온달이! 온달이 죽은 거야. 하하하. 우리가 온달을 죽인 것이오. 장솔! 우리가!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