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온달의 무덤 (7)
모용상이 성산 아래에 도착하여 고작 오백 기병으로 일만에 달하는 신라군의 뒤에 진을 펼치니, 석보가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고작 오백 기병으로 뭘 하자는 것이지? 보통은 급습을 하거나, 막히지 않은 서쪽 방면 길로 산을 올라 적성산성의 고구려군과 합세함이 맞지 않는가? 고구려의 막리지와 공주가 식량을 수송해 온다 들었는데, 그들은 아직인가 보군.”
석보가 의아해 하니, 책사 장솔이 뭔가를 깨닫고 급히 말하였다.
“이는 필경 온달이 무사하단 뜻입니다. 저 오백 기병은 적성산성의 온달이 군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우리의 포위를 뚫을 때, 배후에서 호응하려는 의도입니다.”
“어허! 장솔, 이 사람! 온달은 죽었거나 중상일 것이란 말일세. 커다란 소도 화살 스무 대에 죽지 않던가? 사람은 결코 살 수 없네. 그만하시게. 저 적성산성의 고구려 놈들은 그저 잡동사니일 뿐이야.”
석보가 장솔과 의견을 일치하지 않고 말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휘하 장수들에게 명하였다.
“저것들이 무엇을 작심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의 목적은 적성산성 안의 고구려군이다. 저 떨거지는 눈여겨 지켜보데, 적성산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마라!”
석보가 장솔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마냥 무시할 수 없어 적성산성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모용상의 오백 기병과 애써 전투를 벌이지 않으니, 그나마 장솔이 안심하였다.
* * *
막상 오백 기병을 이끌고 쉼 없이 달려왔건만, 신라군들이 전혀 상대를 하지 않자, 모용상과 단 사부가 크게 당황하였다.
이들은 보병 위주의 신라군이 자신들을 공격하면 적산 일대를 누비며 신라군의 진영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그 틈에 연태조와 평강이 군을 이끌고 성산산성에 오를 수 있도록 할 요령이었다.
그러나, 전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다른 수를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아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단 사부 이제 뭘 하면 좋겠소?”
“글쎄요. 저도 전장에서 군을 이끈 적이 전무하여…….”
단 사부가 이처럼 말끝을 흐린 것은 평생 무예 수련만 하였지, 전장의 지휘는 처음이라 전술 자체가 부재하였기 때문이었다.
모용상 역시, 전장의 지휘는 처음이라 단 사부가 지니지 않은 대안이 있을 리 없었다.
“공자님, 보통은 적이 달려들지 않으면 우리가 공격함이 옳을 듯하나, 적의 수가 너무 많아 그것도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군을 물리기도 어렵고… 허허, 온달은 어찌 여기까지 전승으로 내려온 것인지.”
단 사부가 이렇듯 말하니, 혈기왕성한 모용상이 대뜸 앞으로 말을 몰며 말하였다.
“적이 안 오면 우리가 공격한다라… 그거 좋소! 내가 초패왕 항우와 미염공 관우처럼 단신으로 저 신라 놈들을 대적해 보겠소!”
단 사부가 이 말에 놀라 급히 만류하려 했으나 벌써 모용상은 말을 달려 신라군 앞에 당도하더니, 기세 좋게 소리쳐 말하였다.
“나는 위대한 후연의 황실 후손인 모용 씨 일족의 적자 모용상이다! 연의 부흥을 짊어진 나와 맞설 해동 변방의 오랑캐 신라 놈이 있는가?”
모용상의 이 외침에 석보가 기가 막혀 귀를 후비며 장솔에게 물었다.
“미친놈이요?”
“고구려와 신라의 전장에 나타나 먼 옛날 패망한 연의 부흥을 외치는 것으로 볼 때… 미친놈 맞사옵니다.”
또다시 석보와 장솔의 의견이 일치하였다.
곁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가 혀를 끌끌 차다가 휘하 장수 추사부를 불러 명하였다.
“오늘 내가 저 시골뜨기 당항성 놈들에게 망신을 당했으니, 자네가 대신 내 체면을 세워주시게.”
대력부의 분부에 추사부가 장창을 힘차게 쥐고 말에 올라 모용상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는 죽령인데, 네가 요동으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후연의 원수는 고구려의 광개토이거늘, 내가 정신을 차리게 해 줄 터이니, 이리 오너라!”
추사부의 빈정거림에도 모용상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하고 되받아 외쳤다.
“이곳이 죽령임은 나도 아니, 내 정신은 염려치 말아라!”
모용상이 소리치며 말을 몰아 내달려오는데, 검도 뽑지 않은 적수공권이었다.
“이놈이 맨손으로 오는 거로 봐선 역시 제정신이 아니구나!”
추사부가 그런 모용상을 만만히 보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드는데, 모용상이 말 위에 앉은 상태에서 허공에 몸을 붕 띄우고는 그대로 일장을 뻗어왔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모용상의 빈 손바닥에서 바람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광풍으로 변해 추사부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이에 놀란 추사부가 당황하여 부르짖었다.
“이놈이 요술을 쓰는구나!”
갑주를 걸쳐 큰 타격은 입지 않았으나, 모용상의 요술이 두려운 추사부가 말 머리를 급히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허공에 뜬 모용상이 평지를 달리듯 허공을 달려 추사부의 목덜미를 발끝으로 가격해 땅 위에 떨구고는 추사부의 말 등에 올라탔다.
제법 훌륭한 경공술이었으나, 절정의 수준은 아니었다.
요동 서부총관부의 창주나 팽무일만도 못한 수준이었지만, 이런 신기를 처음 겪는 신라군으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허, 허공을 달렸다.”
“천신, 대력신장인가? 하늘을 날았다.”
공포란 지렁이도 구렁이로 여기게 만드는 법.
신라군이 크게 술렁이자, 기가 오른 모용상이 껄껄껄 웃으며 더욱 신라군을 도발하였다.
“내가 오백 기병으로 네놈들 앞에 선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너희 중에 나를 대적할 장수 누가 있느냐?”
“저놈이… 정녕.”
모용상의 도발에 석보가 말에 오르며 장솔에게 여유롭게 말을 건네었다.
“온달과 대적하지 못해 아쉬웠던 참인데, 금방 다녀오겠네.”
“중원의 무술을 사용하는 자이옵니다. 경공술이 절정에 이르지 않고 내력 또한 크게 높지는 않으나, 호랑이는 토끼를 사냥해도 전력을 다하는 법! 결코 업신여기지 마시고 신중을 기해 잡아 오십시오.”
“염려 마시게. 그럼 나 가네!”
석보가 신바람을 내며 말 달리는데, 몹시 신기한 무기를 오른손에 지니고 있었다.
보기엔 커다란 가위처럼 생겼는데 끝이 뾰족하고 쇠도 자를 듯 날이 잘 갈려 있었다.
“연의 황손? 그래 황손 나리! 이런 병장기 보신 적 있소? 하하하!”
석보가 크게 웃으며 달려오니, 모용상도 상대를 만만히 보지 않고 허리춤에 검을 빼어 들고 맞섰다.
모용상이 내지른 검을 석보가 가위의 등으로 쳐내어 막고는 가위의 입을 벌려 자르려 하니, 그 모습이 매우 험악해 모용상이 놀라 급히 검을 물렸다.
그 틈에 석보가 말을 바짝 붙이며 가위 날을 더욱 벌려 모용상의 말 머리에 들이대고는 힘껏 쥐어 누르자, 모용상을 태운 말이 비명도 못 지르고 머리가 잘리며 피를 허공에 뿜었다.
추사부를 떨구고 올라탄 말이 뿜어낸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용상이 급히 정신을 가다듬어 몸을 날려 원래 자신이 타고 온 말을 향해 허공을 달렸다.
석보가 놀라지 않고 비웃으며 더욱 빨리 말을 몰아 뒤쫓았다,
“그깟 경공술보다 말이 더 빠르오! 말 타고 다니시오. 하하하.”
비웃든 말든 개의치 않고 말에 오른 모용상은 석보가 커다란 가위를 쫙 벌려 목을 노리고 들이대니, 쌍수를 펼쳐 앞으로 펼치며 소리쳤다.
“이거나 처먹거라!”
모용상이 뻗은 손바닥에서 강한 기운이 일고는 석보의 가위를 밀어내어 멀리 날려 버리고는 석보의 가슴팍마저 후려쳤다.
울컥 선혈이 목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기운에 석보가 급히 말을 돌렸다.
그 모습에 기세 오른 모용상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 위에서 몸을 튕겨 올려 허공에 솟구치고는 그대로 발끝을 창처럼 뻗어 석보의 뒷덜미를 노리며 외쳤다.
“어딜 가냐? 이거나 더 먹고 가라!”
“뭘 자꾸 주는 것 없이 먹으라 하느냐!”
도망치는 줄 알았던 석보가 몸을 획 돌리며 모용상이 날린 발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들어 올리면서 말 위에서 몸을 던져 뛰어내렸다.
석보에게 발을 잡힌 모용상은 중심을 잃어 땅에 처박혔다.
그 위에 석보가 올라타 주먹을 휘두르니 모용상도 지지 않고 몸이 깔린 상태에서 제법 열심히 맞섰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단 사부가 모용상을 구하고자 말을 몰아 달려왔다.
석보의 휘하 장수 셋도 창을 쥐고 말을 몰아오니, 모용상을 패 죽일 듯 후려치던 석보가 몸을 일으켜 서고는 히죽거리며 말하였다.
“아랫것들 보기에 꽤나 볼썽사납구나.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붙어보자.”
이렇듯 말을 남기고 수하 장수들이 끌고 온 말에 올라 먼저 진영으로 돌아가니, 단 사부도 모용상을 데리고 돌아갔다.
진영에 돌아온 모용상의 몰골은 참담하였다.
눈에 시커먼 멍이 들었고 입술은 터졌으며, 볼이 퉁퉁 부어 누가 봐도 모용상이 한참 얻어터진 상황이 분명했다.
“단 사부, 저놈이 내일 다시 붙자고 하던데, 왜 그런 것 같소?”
“아마도 오늘은 덜 팬 듯 성에 안 차, 내일마저 패 죽이려는 것 같군요. 공자님은 저 신라 놈의 상대가 못 됩니다. 피하십시오.”
단 사부가 이렇듯 직설적으로 사실을 적시하는데도 모용상은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아니요. 우린 시간을 벌고 길을 열려고 먼저 왔으니, 내일 놈이 다시 붙자 말하면 응해야 하오. 합하께 사람을 보내 내일 내가 저놈과 붙는 동안 서쪽 방면으로 성산산성에 오를 수 있도록 서두르라 전하시오.”
“공자께서 매 맞으며 시간을 버실 심산이십니까? 음, 보통은 이길 계획을 세우나 이번은 죽지 않을 방책이나 궁리해 봅시다.”
모용상이 매맞으며 시간을 벌려하니, 단 사부가 군량을 수송해 오는 연태조 일행에게 전령을 보내 속도를 내라 전하였다.
연태조는 평강과 상의해 수레는 버리고 군사들이 각기 식량을 짊어진 채 빠르게 내달려 성산산성을 오를 계획을 세웠다.
어쨌든, 모용상의 이 터무니없는 계책이 들어맞는 듯하였다.
* * *
“소성주, 오늘 패 죽이시지. 어찌 살려주고 내일 또 패실 생각이신지요?”
장솔이 피 묻은 가위를 닦는 석보에게 물으니, 껄껄껄 웃으며 석보가 오히려 되물었다.
“고구려의 막리지와 공주가 군량을 수송해 온다 하였는데, 어디까지 왔는가?”
“정찰병의 보고에는 수레를 버리고 짐을 군사들이 나눠 진 채 열심히 달려오고 있다 합니다. 우리가 막지 않으면 내일 오후쯤엔 적성산성에 당도할 듯합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 자체가 너무도 무모합니다. 군을 보내 싹을 자르십시오.”
장솔이 이렇듯 말하니, 석보가 웃으며 물었다.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
“정찰의 중요성을 모르는 인물이라 멀리까지 살피지 않고 손바닥만 한 주위만 보니 알 리가 만무하지요.”
“그럼 되었네. 지금은 우리도 일단 모른 척하세.”
“아니, 어찌? 혹여?”
장솔도 뭔가를 깨닫고 말꼬리를 흐려 물었다.
“그렇네. 나는 저들을 모른 척 올려 보내다가 산에 오를 때쯤 뒤를 칠 것일세. 그러기 위해 내일 또 싸우자 한 것이네. 지금 무턱대고 달려들면 북으로 도주할 것이니, 고구려의 막리지와 공주를 생포할 기회를 잃는 것일세."
“허허…….”
“내 언제 고구려의 막리지와 공주를 잡아보겠나. 우리가 저들이 산에 오를 때 공격하면 식량을 짊어진 고구려 군사들은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고 겨우 목숨 부지한 것들이 저 적성산성에 들어가겠지.”
석보의 설명에 장솔도 상황을 파악하여 말하였다.
“당항성에 전령을 보냈으니, 내일쯤 연통이 올 것입니다. 소성주께선 기존의 계책대로 고구려군을 서쪽으로 몰며 마무리하실 계책이시지요?”
“그렇네. 기존에 자네가 세운 계책 그대로에 그저 고구려의 막리지와 공주가 더해진 것뿐이네. 저놈들을 적성산성에 토끼 몰듯 몽땅 몰아넣고 서쪽 길을 열어주어 뒤를 쫓으며 공격할 걸세.”
“…….”
“죽기 살기로 덤비는 놈들보다 도망치는 적의 배후를 침이 수월하다 늘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그걸 따르는 게지. 하하하.”
석보가 대국을 넓게 보며 말하니, 장솔도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는 빙긋 웃었다.
“속도를 내어 적성산성에 오르기 위해 군량 대부분은 포기하고 당장 먹을 것만 가볍게 짊어진 채 달려오는 중이라 우리가 뒤를 치면 필경 그마저도 대부분 잃고, 수일 내로 적성산성을 나와 서쪽으로 도주하겠군요. 추격할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