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16화 (116/328)

116화 온달의 무덤 (6)

“장군, 신라 놈들이 우물에 시신을 버리고 독마저 풀었습니다.”

돌비수가 경우에게 보고하자, 황망한 경우가 우물을 메우라 명하였다.

“아니, 이런! 자신들의 식량 창고를 불태운 것도 모자라 우물에다가? 당장 우물을 흙으로 메꾸시오!”

성을 뺏고도 마실 물조차 얻지 못하였음에 고구려군의 사기는 급격히 하락하였다.

온달을 따라 평양성에서 출병한 후, 숱한 전투에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겪지 않고, 위기조차 온달의 무력으로 극복해 왔다.

하지만 고구려군에게 온달의 중상은 큰 충격으로 도저히 이 위기를 극복하리란 희망을 품지도 못하였다.

성산의 북쪽은 석보가 지키고.

동쪽으로는 영월 태화산성과 죽령 일대 산성들에서 신라군이 속속 도착하며 지키고.

남쪽으로는 상주정의 정예가 몰려와 지키니 어느덧 성산을 에워싼 신라군의 수가 삼만이 넘었다.

오직 성산의 서쪽으로 향한 길만 막히지 않았으나, 서쪽의 아래는 백제의 영토요.

서쪽의 위는 당항성이니, 실상 퇴로라 하기 어려웠다.

장솔은 온달의 고구려군이 이 방향으로 도주하길 바라며 애써 막지 않은 것이었다.

굶주린 고구려군이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도주하면 석보가 뒤를 쫓으며 사냥하다가 당항성의 군사들이 앞을 막아 끝을 볼 터이니, 다른 신라 장수들과 공을 나누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도망쳐야지. 그대로 적성산성에 눌러앉아 굶어 죽을 것인가? 어서 도망들 치시게나. 하하하.”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는 고구려군과 싸우지 않고, 도주하느라 진영을 갖추지 못한 고구려군의 뒤를 칠 계획을 장솔이 미리 세웠던 것이다.

석보가 성산을 올려다보며 히죽히죽 웃을 때, 고구려군에게 보낼 술을 수레에 싣고 장솔이 산을 오르며 말하였다.

“어찌들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맞아 죽지 말고 잘 돌아오시게.”

석보가 농담 반 섞어 말하였으나, 지금 장솔이 술을 싣고 적성산성에 오름은 고구려군의 심기를 건드려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 * *

중상을 입은 온달이 아직 의식이 없어 경우와 막바우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기룡이 들어와 고하였다.

“웬 신라 놈이 수레에 술을 싣고 와 온달 장군님 뵙기를 청합니다.”

“뭣이라? 이 미친!”

신라군이 수레에 술을 한가득 싣고 왔다는 소리에 격분한 막바우가 당장 때려죽일 듯 창을 쥐고 뛰어나가니, 경우가 그의 소매를 붙잡고 간신히 만류하였다.

“진정하시게. 필경 온달 장군의 상태를 살피고자 온 것일 터, 결코 흥분해선 안 되네.”

“진정이고 흥분이고 일단 신라 놈부터 때려죽이고 말하세. 이거 놓게, 경우.”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막바우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경우가 나가보았다.

그러자, 성문 앞에 신라군 한 무리가 수레에 술을 한가득 싣고 와 성벽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인데 술을 가져온 것이더냐?”

경우의 이 물음에 장솔이 나서며 공손히 답하였다.

“소인 당항성 성주의 장남, 소성주 석보님을 모시는 문객으로 장솔이라 하옵니다.”

“헌데?”

“소성주께서 평소 삼한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온달 장군님을 흠모하셨사온데, 오늘 위용을 가까이서 직접 보신 후 무척 감개무량하시어 온달 장군님께서 적성산성을 취하신 것을 축하드리고자 술을 보내셨습니다.”

“적성산성? 우린 성산산성을 취하였는데, 뭔 뜬금없는 소리더냐?”

경우가 알아듣고도 일부러 모른 척 딴지를 거니 장솔이 예의 바르게 설명하였다.

“진흥왕께서 이곳 성산을 점령하시고 적성이라 명하시며 비를 세우셨으니, 적성선성이옵지요.”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더냐? 이곳은 우리 고구려의 오백 년 고토로 적산에 자리한 성산이라 불리는 산이다.”

“…….”

“네놈들 신라가 비석을 세우고 적성이라 우김은 마치 도적놈이 쳐들어와 남의 아내를 빼앗고 제 멋대로 이마에 인두를 지져 낙인을 찍은 뒤, 그 낙인으로 새겨진 흉터를 이름으로 삼아 부름과 무엇이 다른가?”

경우가 목소리를 깔며 엄히 물으니, 장솔의 곁에 선 신라군들이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그러나 정작 장솔은 태연히 경우를 올려다보며 응대하였다.

“본디 땅이란 아름다운 여인과도 같아서 섬기는 주인이 바뀌어 북당(북쪽의 집)을 지어 주면 북당부인이 되고, 남당(남쪽의 집)을 지어 주면 남당부인으로 불리는 법인지라, 온달 장군께서 차지하고 계신 동안 원하시는 대로 불러드리겠습니다.”

“뭐라? 이 무엄한 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더냐?”

경우가 장솔의 말을 듣고 보니, 뭔지 모르게 심히 불쾌하여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 질렀다.

장솔은 총명한 자로 한눈에 경우가 사내가 아닌 여인임을 파악하고 이렇듯 떠본 것인데, 장솔의 이 말속엔 경우에게 주인을 바꿔 섬기란 뜻이 숨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장솔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진 못하였으나, 격분한 경우가 활을 들어 자신을 겨누는데도 장솔은 머리를 들어 꼿꼿이 선 채로 말하였다.

“건곤일척을 겨루는 전장에서도 결코 사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옵니다. 소인은 온달 장군님과 맞선 소성주 석보님을 대신하여 온 사람으로 죽더라도 온달 장군님을 뵙고 그분의 하명을 받아 죽음이 마땅한 줄로 아오니, 뵙게 하여 주시옵소서.”

석보의 말이 일견 타당하였으나,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는 온달의 상태를 알릴 수 없는 경우로서는 난감하여 더욱 화만 버럭 낼 뿐이었다.

“너 같은 졸개 놈 따위 뵐 분이 아니다! 당장 물러가거라!”

“경우, 그만하시게.”

이때 굵직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경우의 곁에서 들리더니.

거대한 운철 대검을 한 손에 가벼이 쥐어 어깨에 올린 장수가 투구를 푹 눌러쓰고 나타나 경우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리며 말하였다.

“애썼네. 경우 자네가 사자를 박대하면 저들이 나를 욕할 것일세. 그래 자네 이름이 장솔이라 하였는가?”

장솔이 올려다보니, 성벽 위로 불쑥 솟은 상체가 두툼하고 시커멓고 거대한 운철 대검을 한 손으로 가벼이 쥐며 어깨에 철궁을 메었기에 분명 온달이었다.

“소인 장솔, 장군님을 뵙습니다.”

장솔이 공손히 인사하면서도 무척 놀라 바삐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찌 된 일인가? 온달은 수십 대의 화살에 맞아 죽었거나 중상일 터인데, 어찌 저리 멀쩡하단 말인가? 정녕 온달은 검신이란 말인가?'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온달인지라, 장솔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그가 덕절산에서 방책을 부수고 포위를 풀듯, 사방 어디로도 길이 연결된 이 적성에서 나와 포위를 뚫고 군량을 얻는다면 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며, 필경 서라벌의 귀족들이 성을 내어준 죄를 소성주에게 물을 것이다. 심히 곤란해졌구나.’

이렇듯 장솔이 쉴 새 없이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을 떠올리는 동안 성벽 위 온달이 장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사자를 예의로 맞이해야 하지만, 이제 막 성을 취해 단속 중이라 그대를 안에 들이지 못함을 이해하기 바라네. 또한 그 술은 마신 것으로 할 것이니 가져가시게.”

“…….”

“우린 아직 술에 취할 여유가 없고 우물에 독약을 푼 그대들의 선물은 신용하기 어렵네. 이점도 이해하기 바라네.”

온달이 조목조목 말하니, 곁에선 경우도 고개를 푹 숙여 들지 못하였다.

장솔도 대꾸할 말이 없어 허리 숙여 예를 표한 뒤 군사들에게 명하여 다시 수레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

장솔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경우의 곁에 선 온달이 발밑에 깐 작은 나무 상자에서 내려오더니 투구를 벗고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훈이 불러준 말인데, 뭐가 이리 길더냐.”

온달의 행색을 한 이는 막바우로 온달보다 키가 작음을 해결하기 위해 나무 상자를 딛고 서서 기훈이 불러준 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나마 막바우의 상체가 울퉁불퉁 단단한 근육질에 운철 대검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를 완력까지 지녀 감쪽같이 장솔을 속일 수 있었다.

“장솔 저놈이 온달 장군님을 가까이서 뵌 적 없기에 속일 수 있던 것이지, 만일 온달 정군님과 일면식이 있었다면 그리 장황히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네. 게다가 막바우 자넨 온달 장군님과 전혀 안 닮았어.”

경우도 다리에 힘이 풀려 막바우 곁에 털썩 주저앉고는 공연히 지청구했다.

“알아. 그만하라고, 지친다.”

어쨌든 온달이 무사함을 과시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 * *

성산산성에서 온달을 만난 사실을 장솔이 전하니, 석보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참을 고심하다가 수하 장수를 불렀다.

“너는 노궁수 스무 명에게 소를 묶어 놓고 일제히 활을 쏘라 명한 후, 그 소가 사는지 죽는지 지켜보다가 죽으면 내게 알리거라.”

석보의 명을 받은 장수가 어리둥절해 나가더니, 일다경이 지나 돌아와 아뢰었다.

“소가 피를 흘리더니, 이내 곧 죽었습니다. 다른 소로 살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아니 되었다. 죽은 소는 노궁수들에게 주고, 오늘 수레에 싣고 산에 올랐던 술도 주거라. 애썼다.”

석보가 노궁수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고는 장솔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보게 장솔. 자네 같이 총명한 이가 이번엔 속은 듯하네. 필경 온달은 죽었거나 일어날 수 없는 상태일 걸세.”

장솔도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운철 대검을 한 손에 쥐고 가벼이 다루는 장수가 무척 신경 쓰였다.

“온달이 아니라면 누가 운철 대검을 한 손으로 다룰 수 있단 말입니까? 일단은 신중하셔야 합니다. 온달은 무용이 상당한 자로 그가 멀쩡하다면 대단한 전력이니, 항시 신경 써야 합니다.”

출병한 이후 처음으로 석보와 장솔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이때, 정찰병이 들어와 급히 아뢰어 둘의 논쟁이 일시 중단되었다.

“고악 방면 길에 고구려 기병 오백여 기가 보입니다. 거센 속도로 미뤄 볼 때 두 시진 안에 이곳 적성에 당도할 듯합니다.”

“기병 오백여 기라… 원군치곤 수가 적구나.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석보가 이렇듯 말하고는 장수들을 불러 대비를 시켰다.

이 와중에도 장솔은 아직도 적성산성의 장수가 온달인지 아닌지로 마음이 복잡하여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 * *

앞서 나갔던 정찰병이 돌아와 모용상과 단 사부에게 보고하는데, 기병 오백 기를 이끌고 쉼 없이 질주하던 모용상과 단 사부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는 마상에서 보고를 받았다.

“성산산성은 온달 장군께서 점령하셨으나, 산 아래를 신라 놈들이 에워싼 상태로 오직 서쪽 방면만 길이 열려 있습니다.”

이 보고에 모용상이 단 사부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하였다.

“애썼다. 다시 나가 서쪽 방면 길에 매복이 있는지 살피거라. 단 사부, 우리가 이대로 계속 속도를 높여 성산까지 감이 옳소?”

정찰병에게 명을 내린 후 바로 단 사부에게 의견을 물으니, 단 사부가 잠시 고심하다가 답하였다.

“우린 성산 아래를 포위한 신라 놈들 뒤까지 멈춤 없이 달려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찰병이 서쪽 방면을 살핀 후 돌아와 매복의 기미가 없다면 막리지 합하와 평강 공주가 그 방면으로 성산산성을 오를 수 있도록 우리는 그곳에서 미끼가 되는 것이지요.”

“미끼라… 뭐 신라 놈들 따위에게 당할 내가 아니니, 미끼가 되어봄도 괜찮소. 그리합시다.”

모용상도 몇 해 나이를 먹더니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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