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15화 (115/328)

115화 온달의 무덤 (5)

수의 황제 양견은 오백 년 고구려의 자존심을 전쟁으로 지키겠다는 영양 태왕의 회신과 함께 돌궐의 계민가한이 영주 일대의 거란을 급습하였다는 소식을 같은 날 접하며 차분히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고구려는 만리장성에 들어앉은 우리 수와는 상당한 거리를 지니고 있구나.”

전쟁은 현실인지라 냉정히 상황을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수의 문제 양견은 독고황후의 위세에 가려 있었지만, 현명하고 시야가 넓은 위인이었다.

“그래, 고구려의 대장군 강이식이 영주를 급습해 불태우겠다고 준비한다지? 요동성 자신의 처소에 글귀를 적어 깃발까지 세웠다던데, 뭐라 쓰여 있던가?”

요동에 따로 마련된 대장군 관저 사정마저 수의 간자들이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양견이 몸을 잔뜩 움츠린 신하들에게 물으니, 요서총관(遼西摠管) 위충이 나서 답하였다.

“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요하가 얼마나 넓은지 칼로 답하겠노라.] 무엄하게도 이런 글귀를 적었다 하옵니다.”

“무엇이라? 하하하. 그놈 참 딱 부러지게 답하였구나. 그래, 원하는 대로 요하가 얼마나 넓은지 어디 확인해 보도록 하자. 하하하, 위충 그대는 영주 방비에 항상 만전을 기하라.”

위충의 말에 양견이 크게 웃으며 이렇듯 말하니, 고구려 정벌은 이날부터 준비가 진행되었다.

양견은 결코 실언하지 않는 인물로 매사 허투루 하지 않기에, 강이식의 도발에 격분해 당장 군을 몰아 정벌에 나서지 않고 긴 원정을 대비하여 차분히 준비시켰다.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임명하며 정병 삼십만을 이끌게 하니, 요동으로 진군하라. 또한 수군 총관 주나후(周羅睺)에게 정병 칠만을 이끌게 하여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 건너 평양성(平壤城)을 공략도록 하라.”

수와 고구려의 전쟁은 이제 막 복속한 돌궐뿐만 아니라.

요서에 세력을 둔 거란,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신라와 백제.

그리고 멀리 바다 건너 왜와 수의 남방 여리 이민족들까지 지켜볼 일대의 대전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양견은 또 하나의 서신을 받게 되는데, 바로 신라 진평왕이 사신을 통해 급히 보낸 서신이었다.

“그래, 신라왕이 당항성으로 원군을 요청한 것이더냐?”

진평왕의 서신을 대충 읽고 접으며 양견이 물으니, 사신이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답하였다.

“폐하, 고구려의 장수 위장군 온달이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우리 신라는 숱한 성을 잃고, 고구려의 힘이 강성해지고 있사옵니다.”

“그러하냐?”

“대국을 섬기지 않는 저 오만한 고구려가 세를 불리고, 폐하를 섬기는 우리 신라가 힘을 잃는 것은 결코 수나라에도 득이 될 리 없사오니, 널리 살피시어 부디 원군을 당항성에 보내주시옵소서.”

“…….”

“우리 신라가 한수를 넘어 고구려를 압박한다면 이는 황제 폐하께서 고구려를 누르고 천하를 평정하심에 큰 도움이 될 줄로 아뢰나이다.”

장황히 말하였으나, 자신들 발등의 불을 끄고자 원군을 요청한 것임을 잘 아는 양견이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너희는 같은 삼한인들로 어찌 매번 다투느냐? 바다 건너 원군을 청하는 너희 왕의 궁박한 심정은 이해하나, 너희 힘으로 고작 장수 하나를 못 막는다면 우리의 군사가 바다를 넘기 전 서라벌마저 점령될 것 아니겠느냐?”

“…….”

“나는 고구려를 벌하기 위해 요동으로 군을 보낼 터이니, 너희의 이번 위기는 스스로의 힘으로 버텨 보기 바라며 설령 너희가 온달이란 장수에게 패망하더라도 훗날 내가 원한을 갚아 줄 것이니 너무 애통해하지 마라.”

말이야 좋은 말이지만, 반은 조롱을 담고 있어 진평왕의 사신은 얼굴을 붉히며 물러났다.

이후 이날의 망신을 기억한 진평왕은 수문제의 뒤를 이은 수양제에겐 원군 요청이 아닌, 고구려를 바치겠다며 전쟁을 구걸하는 구차한 걸사표를 보내게 된다.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 없는 신라의 원군 요청을 냉정히 거절한 양견이 위충에게 물었다.

“온달이란 놈이 그리 대단한 장수더냐?”

“고구려의 선대 왕이 검신이라 칭찬할 정도로 그 무용이 뛰어난 장수입니다. 소문으로는 파산귀검이란 초식으로 배찰산에서 사발략가한의 대군을 홀로 전멸시켰다 하옵니다.”

상당히 과장된 소문이었으나, 편전의 모두가 믿는 눈치였다.

“그래? 파산귀검이라… 그 이름 한 번 흉악하구나! 고구려엔 강이식과 고건무의 위용이 대단하다 들었건만, 또 하나 걸출한 무장이 있었구나.”

“네, 그렇습니다.”

“경들은 정벌을 준비하며, 무예가 특출 난 무림 고수들을 탁현에 소집토록 하라!”

문무백관이 이에 답하여 대군이 출병할 탁현은 이날부터 군사 기지와 병참 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또한, 을지문덕의 명을 받아 탁현에 미리 잠입한 고구려의 첩자들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탁현을 향해 독고선 남매와 해진, 온동이 금강대도를 지닌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 *

수의 대군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고 있음을 모르는 온달은 성산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날이 밝기 무섭게 산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성산산성 앞에 진을 치겠소. 모두 준비하시오.”

온달이 명을 내리니, 두 시진이 지나 성산산성 앞에 진이 세워지고 공성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기훈이 이끈 노궁수들의 사격을 시작으로 부월수와 환도수들이 성벽을 넘으려 시도하니, 신라군도 죽을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수성하였다.

군량이 바닥을 드러낸 고구려군의 입장에선 반드시 성산산성을 점령해 식량을 확보해야 했고, 이를 잘 아는 신라군은 버티며 고구려군이 지치길 기다렸다.

‘기악이 수레에 식량을 싣고 오는데 며칠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에 우리의 식량은 바닥날 터이니, 오늘 중으로 저 성을 넘어야 한다.’

온달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시간이 지나도록 고구려군이 성벽을 넘지 못함에 평소와 달리 조급해졌다.

“내가 직접 성을 넘어 문을 열겠소.”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 온달이 운철 대검을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니, 경우가 앞을 막으며 만류하였다.

“장군! 적이 치열히 막으며 화살을 날리고 있습니다. 만일 장군께서 친히 성벽을 넘고자 앞에 나서시면 적의 모든 화살은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입니다.”

경우의 이 말에 온달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항상 앞에 섰고, 적의 화살과 창은 늘 내게 집중되었으나, 아직까지 무탈하지 않소. 너무 심려치 마시오. 내게 공격이 집중된다면 그동안 우리 군사가 성을 넘기 쉬워질 터이니, 그 역시도 좋은 일이오.”

온달이 이렇듯 말하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벼락같이 외치며 성산산성을 향해 질주해 나갔다.

“오늘 이 성은 우리 고구려의 것이 되리라! 모두 나를 따라 성을 넘으라!”

온달의 외침에 막바우도 창을 쥐고 뒤를 따랐다.

성산산성 성벽 위에서 전장을 살피던 장솔이 시커멓고 거대한 운철 대검을 어깨에 멘 온달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하였다.

“궁수들은 모든 활을 저 온달에게로 집중하라! 고구려군이 성을 넘더라도 저 온달은 살려선 안 된다! 성을 넘겨주더라도 온달을 죽여라!”

장솔의 이 외침에 신라군의 활이 일제히 온달에게 집중되니, 대력부가 놀라 소리 질렀다.

“뭣이? 성을 넘겨줘도 된다고? 이 망할 놈이!”

당장 칼을 빼어 장솔의 목을 치려는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를 석보가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잡아 쥐고는 꾹 눌러 무릎을 꿇렸다.

“성주, 이 조그만 성 하나가 뭐 그리 중요하오? 온달이 점령한 성이 몇이고 그놈에게 죽임당한 군사가 몇인데, 이따위 산성 하나 애지중지하며 대국을 그르칠 셈이오? 전쟁은 이겨야 하는 것이오.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넘겨줄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요.”

자신들의 성주가 당항성의 소성주 석보에게 목덜미를 잡혀 무릎 꿇는 수모를 겪고 있음에도 적성산성 군사들은 석보의 위압감에 감히 나서는 이가 하나 없었다.

“장솔 책사의 명을 받아 열심히 화살을 날리거라! 하하하.”

석보가 통쾌히 웃으며 명을 내리니, 모든 활들이 일제히 온달을 향해 날아갔다.

이 틈에 고구려군들이 성벽에 달라붙어 넘기 시작했다.

성벽을 쉽게 내어주면서 신라군이 날린 화살 수천 대가 일시에 온달을 향해 쏟아지자, 온달도 당황하여 급히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쳤다.

운철 대검이 허공을 후려쳐 바람을 가르자, 정면에서 날아오던 화살들이 검기에 휘말려 날아갔다.

그러나 측면에서 날아온 화살이 온달의 옆구리에 박히고 연이어 온달의 두툼함 가슴팍에도 대여섯 대의 화살이 꽂혔다.

“장군!”

막바우가 놀라 소리치며 달려와 자신의 등으로 재차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으려 할 때.

경우가 급히 말을 몰아 달려와 몸을 날려 온달을 감싸고 바닥에 엎드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타고 온 말이 방패가 되어 화살을 막고 쓰러지니, 모달들과 당주들이 방패를 들고 와 온달을 에워싸며 진영으로 돌아갔다.

“멈추지 말고 성을 넘어라!”

온달이 붉은 선혈을 한 모금 토하면서도 크게 외치자, 그가 아직 살아 있음에 기뻐한 고구려군이 함성을 지르며 마침내 성벽에 올랐다.

“이 성을 그토록 원한다면 넘겨줘야지. 아무렴. 하하하.”

석보가 웃으며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의 목덜미를 끌고 성벽을 내려가 말에 오르니, 장솔이 재빨리 명을 내렸다.

“군량미 창고에 불을 지른 후 동문으로 나간다. 서둘러라!”

성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며, 마침내 고구려군이 성벽 아래도 점령해 북문을 여니, 경우와 막바우가 군을 이끌고 성 안으로 빠르게 진입하였다.

성 안에 들어선 경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이곳이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기 위해 신라의 진흥왕이 세운 적성비였다.

또한 그다음에 들어온 것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군량미 창고였다.

“아니… 이럴 수가… 빨리 불을 꺼라!”

군량미를 얻고자 희생을 감수하고도 강행한 공성이었으나, 승리를 취하고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군을 급히 안으로 모셔라!”

중상을 입은 온달을 살피기 위해 경우가 급히 명을 내려 성산산성 안으로 온달을 옮기고 진영도 옮겼다.

그러나, 이번엔 성을 무사히 빠져나간 석보가 성산 아래에 진을 치고는 고구려군이 성을 나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보급로마저 차단하였다.

“저 산성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어찌했는가?”

“우물에 독약을 풀고 시신들도 넣었으니, 고구려군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할 것입니다.”

장솔이 이렇듯 답하자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가 황망한 표정으로 석보와 장솔을 번갈아 살피며 물었다.

“그대들은 처음부터 적성산성을 넘겨주려 생각하고 있던 것이오?”

이 물음에 석보와 장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히죽히죽 웃을 뿐이었다.

온달의 고구려군은 성산 아래에 진을 쳤을 땐 북으로 회군하기 수월했으나, 막상 성을 점령하고 보니 도리어 길이 막힌 형국이 되었다.

“포기할 것 포기하고 내어줄 것 내어주니, 이처럼 편한 것을. 하하하, 쓸데없는 욕심이 꼭 화를 부르는 게야. 하하하.”

석보가 시원스레 웃던 이 순간.

위례성을 먼저 출발한 모용상과 단 사부는 기병 오백을 독려하며 쉬지 않고 적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들의 목적지인 적산의 성산 아래는 고구려군이 아닌 신라군이 진을 펼치고 있었으며, 상주정의 군사와 주변 성의 원군도 곧 당도할 예정이었다.

온달의 군에 무력이 뛰어난 장수가 많음에 비해 전장을 넓게 보며 책략을 담당할 장수가 없음이 이기고도 패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장솔, 이 전쟁에서 내가 영웅이 됨은 이제 기정사실이라, 저 어마어마한 무력의 온달에게 고마운 심정일세. 내일 날이 밝으면 성을 함락한 기쁨을 즐기게 목이나 축이라고 좋은 술 몇 동이 보내시게나. 하하하.”

석보의 이 명에 장솔이 웃으며 화답했다.

“명을 받아 독한 술로 몇 동이 올려 보내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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