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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검귀-114화 (114/328)

114화 온달의 무덤 (4)

“퇴각한다! 시원하게 한바탕 화살을 쏟아붓고 물러나 적성산성으로 간다.”

석보가 퇴각하면서도 시원스레 명을 내리니, 아직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고구려군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고구려군의 선두가 방책을 완벽히 무너뜨리고 덕절산 아래로 나올 때쯤에야 겨우 불길을 피할 공간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일다경이 지나 산 아래로 나온 온달이 겨우 숨을 돌리니, 거센 북서풍이 불어왔다.

활활 타오르던 덕절산이 이 거센 바람의 영향을 받아 더욱 거친 불길을 산 곳곳으로 날리며 태우기 시작했다.

온달이 조금만 지체하였어도 고구려군은 모두 덕절산에서 산 채로 화장될 뻔했으니, 그의 무모한 판단이 옳았던 셈이다.

“빠르게 성산 아래 진영으로 이동한다! 경우! 앞장서시게!”

같은 곳을 고구려는 성산이라 부르고 신라는 적성산이라 부르니 산도 제 이름이 무엇인지 헷갈릴 듯하다.

성산 아래 진영을 염려한 온달이 곧바로 명을 내리니, 경우가 선두에 서서 말을 몰아 달렸고, 온달과 막바우도 뒤따라 보병을 끌고 내달렸다.

경우가 이끈 기병들이 두 식경을 미친 듯한 속도로 질주해 달리자, 성산산성에서 내려온 신라군들을 맞아 싸우는 고구려 진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영 곳곳에서 불길이 솟고, 기범과 기훈이 앞장 서 목책을 사수하며 신라군을 향해 맹렬히 도끼질을 하였다.

전령과 보급부대를 책임지는 기룡은 군사들을 끌고 불 끄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성산산성에서 신라 놈들이 급습하였구나. 우리를 불태워 죽이려던 저 악랄한 신라 놈들의 뒤를 치거라!”

경우가 이를 바드득 갈며 외치자, 사지에서 생환한 고구려 기병들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도 크게 격분하여 맹렬히 돌격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고구려의 기병이 노도와 같이 들이닥치자, 신라군은 기겁하여 성산 위로 내빼기 바빴다.

경우가 신라군을 성산으로 쫓고 진영 내의 불을 끈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온달과 막바우가 보병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들 모두의 다리가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지쳐 보였다.

온달이 진영을 잠시 둘러보고는 운철 대검을 땅에 꽂고 두 손을 짚어 몸을 기대며 고개 들어 성산을 올려다보았다.

“피해는 어찌 되는가?”

온달의 물음에 기룡이 뛰어와 아뢰었다.

“적의 급습에 식량이 이틀 치정도 남고 거의 불탔습니다.”

이 보고에 온달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라군을 물리쳐 승리를 거두었어도 고구려군의 피해가 상당하였다.

기병 삼백 기와 보병 오백을 잃었고, 더구나 식량마저 불에 탔으니 앞으로의 전투가 문제였다.

“식량이 없으면 배고파 싸울 수 없습니다.”

막바우도 놀라 이렇듯 말하니, 경우가 빠르게 안을 내었다.

“위례성에 사람을 보내 보급을 명하시고, 위례성을 지키는 기악도 서둘러 오라 하십시오. 저 성산산성은 시일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오늘은 쉬고 내일 전군을 이끌고 몰아치시지요.”

고악 일대의 산성들은 크기가 작아 여유도 없을뿐더러 언제 배신하여 뒤를 칠지 모르기에, 위례성까지 전령을 보내자 한 것이다.

“그리합시다.”

온달이 경우의 안을 두 말하지 않고 받아들이자, 모두가 명을 받아 서둘러 움직였다.

* * *

고구려는 성산 또는 적산으로 부르고 그 위에 산성을 성산산성 혹은 적산산성이라 불렀으나, 신라는 진흥왕이 적성비를 세운 뒤로 적성산성이라 불렀다.

두 나라 장수들이 모여 이 산성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서로 다른 명칭에 무척 당황할 것이다.

“오늘 공격으로 어찌 우리 적성산성의 피해가 더 크오?”

적성산성에서 성주 대력부가 석보에게 항의를 하였으나, 석보는 태연히 두 팔을 벌리며 답하였다.

“성주, 오늘 전투는 우리의 승리였소. 온달이 비록 살았으나 말이요.”

“그 무스 궤변이오? 우리 적성산성 군사 일천이 목숨을 잃고 소성주도 귀산과 추항에게 내어 준 기병 오백과 보병 일천을 잃었는데, 승리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대력부가 버럭버럭 소리쳐도 석보는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였다.

“전쟁은 수를 헤아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를 헤아려 이문을 생각하면 그건 장사지요. 수를 세면 애초에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

“오늘 급습으로 저 고구려 진영의 식량은 바닥이 났을 터이니, 우린 수성하며 상주정과 주위 성의 원군을 기다리면 고구려 놈들은 식량이 떨어져 성급히 공격할 것입니다.”

“허나…….”

“급하면 실수가 생기는 법! 그때는 놈들이 필패할 것이고 우린 도주하는 고구려 놈들을 쫓으며 잃었던 성들을 수복하면 됩니다. 기다리면 이깁니다.”

석보가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하자, 대력부의 표정도 금세 풀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아하! 역시 당항성의 영웅, 소성주의 식견은 남다르오. 내 소성주만 믿고 따르겠소이다.”

* * *

평양성을 떠난 연태조와 평강은 기병 오백 기에 보병 일천을 이끌었는데, 위례성까지 여정은 무난하였다.

위례성에서 자신을 대신할 주둔군을 기다리던 기악은 연태조와 평강이 당도하자 크게 놀라 황급히 맞이했다.

“어찌 공주님과 합하께서?”

주둔군은 오지 않느냐는 물음을 돌려 말하니, 연태조가 냉정히 되물었다.

“그대는 위장군 온달의 명을 받아 이곳을 지키며 주둔군을 기다리던 중인가?”

“그렇사옵니다. 합하, 소장 모달 기악이라 하오며 주둔할 군을 기다리던 중이옵니다.”

“이제 기다릴 필요 없네. 자네를 대신할 주둔군은 없을 것일세. 우린 위장군의 회군을 돕기 위해 적산으로 가는 길이니, 자네도 성을 지킬 군사를 최소화한 후 따르게나.”

막리지 연태조의 명에 기악이 놀라 당황할 때, 온달이 보낸 전령이 들어와 급히 아뢰었다.

“위장군 온달의 명이십니다! 속히 군량을 보급할 준비를 하여 모달 기악이 직접 군을 이끌고 성산으로 오라 하시었습니다.”

이 소리에 연태조와 평강이 놀라 서로 마주 보니, 기악이 성산의 사정을 전령에게 자세히 물었다.

“위장군께서 큰 승리를 얻으셨으나, 적의 급습으로 군량이 불타 보급 조달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이 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평강이 애써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연태조가 자신의 뒤에 선 모용설과 모용상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상이는 단 사부와 함께 내일 일찍 기병을 끌고 적산으로 향하고, 설이는 공주님이 쉬실 수 있도록 침소를 마련하라.”

자신이 해야 할 일까지 연태조가 명을 내리자, 눈치 빠른 기악이 당주들을 불러 모용설과 모용상 남매를 돕도록 하였다.

“합하, 저도 내일 일찍 출병할 준비를 하겠나이다.”

기악이 이렇듯 말하고 자리를 뜨니, 연태조가 평강을 안심시켰다.

“어쨌든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우리가 군량을 제때 가져간다면 회군 길도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군사를 돌려 퇴각을 해도 사람은 먹어야 하니, 연태조는 군량을 싣고 가려는 것이다.

* * *

온달의 회군을 돕기 위해 연태조와 평강이 평양성을 떠날 무렵, 대장군 강이식은 요동으로 돌아와 바로 말갈 기병 일만과 개마무사 오만 기를 모으며 수의 영주 공략을 준비하였다.

수의 양견 역시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거란을 무력화시키고 돌궐의 충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계민가한에게 요서에 세력을 둔 거란을 공격하라 명하였다.

돌궐 기병 이만 기는 영주를 지나 요서에 마련된 고구려의 교역 시장으로 향하는 상단으로 꾸려 영주 인근의 거란을 급습하였고, 이는 곧 수나라 영주 총관 위충의 위세를 키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예기치 못한 돌궐의 급습으로 영주 일대의 거란이 패하자, 영주 선제공격을 준비하던 강이식의 고심도 함께 깊어졌다.

“허허, 저들이 돌궐로 하여금 거란을 친 것은 우리를 떠보기 위함이다. 영주는 이미 방비가 잘 되었을 것이니, 새로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반드시 영주를 소실시키지 않고도 수의 출병지를 뒤로 물릴 수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강이식의 고심이 깊어 가던 그때 서부총관 을지문덕이 들어오며 말하였다.

“그런 게 있소?”

“수나라가 우리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선 영주에 군을 집결시킨 후 출병하는 것이 진군로를 단축하는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음…….”

“보급 물자도 만리장성을 넘어와 영주에 비축한 후 조달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저들도 잘 알 것이지요.”

“…….”

“그러니 돌궐을 시켜 거란을 치게 한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 돌궐이 수의 편이고, 거란은 고구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 포고한 셈입니다.”

“그건 나도 생각한 바이니, 영주를 치지 않고 수의 출병지를 뒤로 돌릴 계책이나 어서 말해 보시오.”

강이식이 답답해하며 재촉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영주성을 공략해 소실시킴은 을지문덕이 이야기한 것처럼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영주성에서 수의 대군의 출병을 막는 한편 수의 보급로가 길어짐을 뜻하였다.

이는 곧 무의미한 전선이 길어져 만리장성 아래 하북 탁현에서 대군을 움직여야 하는 수의 부담이 가중되기에 개전 초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영주를 공략하는 것이 최선이라 언젠가 반드시 소실시켜야겠으나, 우리가 군을 움직일 때쯤엔 영주를 지키는 위충이 장안에서 돌아와 방비를 단단히 할 것이라 많이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충이 장안에서 돌아오기 전 급습하면 어떻겠소?”

“지금은 가을이라 거란을 급습한 돌궐의 기동력이 좋을 때라 그들이 영주를 돕는다면 공성 중인 우리의 피해가 상당할 것이며 수의 대군도 바로 영주로 향할 것이라 공략이 쉽진 않을 듯합니다.”

을지문덕이 바로 계책은 내놓지 않고 어렵다는 소리만 하니, 강이식은 더욱 답답해 재촉하였다.

“그래 나도 그것 때문에 고심 중이었는데, 총관이 다른 계책이 있다 하지 않았소? 어서 이야기 좀 해주시구려.”

“하하하, 해야지요. 자, 저 하늘을 보시면 가을 아닙니까?”

누구나 다 알 소리를 하니, 강이식이 버럭 화를 내려다가 꾹 참고 답했다.

“가을 맞소. 그리고 이 방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소이다. 천장만 보이오. 허허, 사람 참.”

“하늘을 보란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보란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뭐 이런…….”

“아무튼 탁현에 군을 집결해 임유관을 거쳐 영주까지 오려면, 수는 돌궐과 달리 보병이 주가 될 터라 군사를 지치지 않게 행군하면 두어 달 정도 걸릴 것입니다. 광야를 말 달려 진격한 돌궐에 비하면 무척 느린 진군 속도지요.”

“…….”

“지금 군을 움직이면 겨울 초입에 당도할 터라, 양견은 결코 올해 군을 움직이지 않고 내년 봄에 수륙 양쪽에서 군을 움직일 것입니다.”

“그것까진 나도 예상하였소.”

강이식이 빠르게 답하자, 을지문덕이 지도를 펼치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개전 시기는 수가 군을 움직이지 않을 겨울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영주가 아닌 이곳을 공략하여 탁현에 집결한 군대가 봄이 와도 영주로 향하지 못하게 하면 되지요.”

을지문덕이 가리킨 곳은 영주보다 더 남서쪽에 자리한 곳으로 만리장성 동단이었다.

“아니, 여기는 임유관 아니오? 영주보다 더 공략하기 어려운 곳인데… 여기를 어찌? 혹시 또 적봉진의 군사로?”

“소수의 적봉진 군사로 천하제일관인 임유관을 어찌 공략하겠습니까?”

“그러면?”

“대장군께서 영주를 공략하다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며 남서로 퇴각하시고는 임유관을 공략하십시오.”

“…….”

“적봉진은 탁현과 임유관 사이, 그리고 영주와 임유관 사이를 공격해 보급을 끊고, 대장군이 임유관으로 영주와 탁현의 태군을 유인하여 잡아두시면 그 후 요동에서 재차 군을 출병하여 영주성을 공략할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시원시원히 말하였으나, 실상 영주와 탁현의 수나라 정병은 물론이요.

만리장성의 수비군까지 모두 대적해야 할 상황인지라, 강이식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저들은 추워서 출병하지 않는 겨울부터 나보고 개고생하란 말이오?”

“그런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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