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검귀-113화 (113/328)

113화 온달의 무덤 (3)

경우의 물음에 귀산이 조롱섞인 눈빛으로 거칠게 답하였다.

“멍청한 고구려 놈들 같으니, 이곳은 너희의 무덤이 될 곳이다. 네놈이 가리킨 저 밑은 우리가 고개에 오르기도 전에 우리 신라군이 방책을 세워 길을 막았고, 네놈들이 모두 고개에 오른 뒤엔 적성산성의 석보 장군께서 네놈들이 올라온 고갯길도 방책을 세워 막으셨을 것이다.”

“이, 이놈들이…….”

“우린 이곳에서 네놈들을 죽음으로 유인한 것인데, 가소롭게도 네놈들이 나의 목숨을 안타까이 여긴단 말이더냐? 하하하.”

귀산의 이 말에 경우가 놀라 온달을 돌아보니, 온달도 적지 않이 놀란 듯 고개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군, 우리가 함정에 빠진 듯합니다.”

눈치 빠른 막바우도 이렇듯 말하는데, 온달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면서도 표정은 무척 평온하였다.

“어쨌든 살려 줄 테니, 너희는 저쪽으로 해서 산을 내려가거라. 혹여 화가 치민 우리 군사들이 너희를 먼저 죽일지도 모르지 않느냐?”

죽음으로 유인하였다는 귀산에게 온달이 살려주겠다 말하니 막바우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좋겠다. 무병장수해라. 요놈들아.”

끝까지 남아 죽겠다고 고집하는 포로들을 돌비수가 매질하며 풀어주고 난 뒤 소리죽여 물었다.

“장군, 저놈들을 적산 방면으로 풀어주시지 않으신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만, 그래도 잡아 두심이 옳지 않았습니까?”

이 물음에 온달이 담담히 답하였다.

“우리가 이쪽으로 다시 내려가 길을 뚫으려면 포로가 짐이 되지 않겠소? 그렇다고 몽땅 죽일 수도 없고 말이요. 아무튼 성산 아래 우리 진영을 신라군이 공격할 수 있으니, 서둘러 내려가 길을 뚫어봅시다.”

온달의 말투는 너무도 담담해 자신들을 유인한 신라군에게 분이 치미지 않아 보였다.

온달의 이 말에 경우가 지난 몇 해 동안 온달을 지켜보며 그가 단 한 번도 크게 화를 낸 일이 없음을 떠올렸다.

‘온달님은 참으로 무던한 사람이야. 어찌, 이 상황에서도 격분하지 않고 길을 뚫자고 말할 수 있을고. 참으로 배포가 큰 인물이다. 어쨌든 우린 꼼짝없이 이 산에 갇힌 형국인데, 빠져나갈 수를 어찌 찾으면 좋을까?’

온달처럼 길을 뚫자는 말이야 쉽지만, 좁은 길에 미리 방책을 세우고 대비한 신라군을 뚫고 성산 아래 진영까지 가기란 불가한 일이라 경우가 이렇듯 생각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거두고도 위험에 처한 상황에 고구려군 모두가 침통해 하는 가운데.

온달이 피 묻은 운철 대검을 닦고는 성큼성큼 고갯길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장군! 어디 가십니까?”

막바우가 급히 온달의 뒤를 쫓으며 물으니, 온달이 태연히 답하였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몰살당할 걸세. 내가 내려가 방책을 허물고 길을 내면 효시를 날릴 터이니, 그때를 기다려 고개를 천천히 내려오다가 효시가 울면 신라군을 몰아치시게.”

좁은 고갯길을 대군이 내려갈 시 방책 뒤에 숨은 신라군이 날린 화살에 그 피해가 클 것이다.

그렇기에 온달은 혼자 방책을 부순 뒤 신호를 보내 신라군의 포위를 뚫을 셈이었다.

“아니, 길을 어찌 혼자 뚫으시려 합니까? 나도 갑시다. 제기랄. 어차피 이곳에 있으면 굶주려 결국 배찰산의 사발략가한 꼴 나는 것 아니오. 갑시다!”

막바우가 존대 반 하대 반을 섞어 가며 말하니, 온달도 마냥 만류하기 어려웠다.

“그러세.”

이렇듯 온달과 막바우가 대책 없이 힘으로 방책을 뚫겠다며 고개를 내려갔다.

그러자 경우도 두고 볼 수 없어 돌비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고개를 내려갔다.

“이미 신라 놈들이 이중 삼중으로 방책을 세웠을 것인데, 대책 논의도 없이 무작정 뚫겠다니…….”

혼자 중얼거려 봤으나, 사실 경우로서도 다른 대책은 없었다.

‘오직, 죽을힘을 다해 길을 뚫는 수밖에.’

* * *

“불은 언제 붙일 셈인가?”

석보가 덕절산 아래 고갯길에 이중 삼중 방책을 세운 신라 진영 안에서 고개를 올려다보며 장솔에게 물었다.

장솔이 땅에 떨어진 낙엽 한 장을 주어 손바닥에 올리자, 바람이 일어 고갯길로 날아갔다.

이것을 바라보며 장솔이 히죽히죽 웃더니 유쾌히 답하였다.

“해질녘쯤 북서풍이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그때 불을 붙이면 가을 가뭄에 바짝 마른 산이라 아주 활활 잘 타겠지요. 하하하.”

“좋구먼. 좋아! 이리 쉬운걸. 하하하.”

화공이 아닌 아예 산을 통째로 불태울 계획마저 세워진 상황이었으니, 고구려군이 고갯마루에서 지체하다간 산 채로 화장될 처지였다.

“성주, 적성산성에선 어찌 되고 있습니까?”

석보가 유쾌한 심정으로 곁에 서 있는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에게 물었다.

“소성주가 말하신 대로 곧 군사들이 산 아래 고구려 진영을 급습하여 식량을 태울 것입니다.”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는 당항성의 젊은 소성주 석보의 제안을 따라 덕절산 고개 포위에 군을 동원한 한편.

고구려 진영을 급습하는 데도 군사를 동원하고 있었다.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온달이 불길 속을 탈출할 수도 없겠지만, 설령 하늘을 날아 탈출하여도 식량이 불타 사라지면 힘을 못 쓸 것입니다. 하하하.”

장솔의 책략을 받아들인 석보도 훌륭하고, 덕절산에 함정을 파고 고구려 진영마저 급습할 계책을 세운 장솔도 훌륭하며.

죽음을 감수하고 고구려군을 유인한 귀산과 추항도 훌륭하고, 석보를 따라 군사를 동원한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도 훌륭했다.

또한, 이중 삼중으로 튼튼히 세운 방책과 이를 지키는 신라군의 군세 역시 훌륭하였으나, 이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온달이 만부적이란 사실이었다.

석보가 아주 흡족해할 때, 고갯길을 주시하던 대대감 한 명이 소리쳐 알렸다.

“소성주! 고구려 놈들이 고개를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앉아서 당할 생각은 없겠지. 모두 꼼꼼히 활을 겨누고 사정거리가 되면 살을 날려 고구려 놈들을 고갯마루로 되돌려 보내거라.”

석보가 대수롭지 않게 명울 내리니, 방책 뒤에 신라군 모두가 고개를 내려오는 고구려군을 향해 활을 겨누었는데, 그 어느 누구 하나 두려운 기색 없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아주 줄지어 쓰러지겠구나. 하하하.”

석보가 즐거워 웃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고구려군의 선두에 시커먼 대검을 어깨에 멘 거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저놈이 온달이겠군. 항상 선두에 선다더니, 제일 먼저 죽겠구나. 한번 겨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

* * *

아직 북서풍이 강하게 불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군을 이끌고 고개를 내려오는 온달의 거침없는 기세를 지켜보던 장솔이 급히 석보에게 말하였다.

“화공을 지금 펼쳐야겠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은가? 왜 그러시나?”

석보가 물으니, 웬일로 장솔이 정색하며 답하였다.

“불길합니다. 속히 화공을 명하여 저 고구려 놈들을 고갯마루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장솔이 이토록 강하게 말하니, 석보가 의견을 받아들여 명하였다.

“불을 붙여라! 화공을 시작한다!”

석보의 명에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아직 사정거리 밖임에도 빈 고갯길을 향해 불붙인 화살을 날리고 투석기 두 대에 기름 항아리를 올려 날렸다.

기름 담은 항아리가 고갯길에 떨어져 박살 나 기름을 뿌리고 불붙은 화살이 고갯길은 물론이요.

마른 낙엽 가득한 덕절산을 불태우니 시커먼 연기가 자욱이 일어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온달이 화살에 맞아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자 했건만, 연기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아쉬운 일이다.”

석보가 이렇듯 중얼거릴 때, 기름 항아리가 고갯길에 떨어지고 불붙은 화살이 불길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고개를 내려오던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놀라 당황하였다.

“모두 불길을 피해 고갯마루로 퇴각하여 불길을 막을 돌과 흙을 쌓아라!”

영리한 경우가 급히 상황을 파악하여 명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온달과 막바우 이 두 무모한 사내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거센 불길 앞에 서서 당장이라고 돌진할 기미마저 보였다.

“장군! 피해야 하옵니다! 막바우 뭐하나? 장군을 모시고 피하게!”

경우가 이렇듯 외치니, 막바우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경우를 돌아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온달의 결심을 꺾을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온달을 두고 도망칠 마음도 없어 그저 고개만 저은 듯했다.

거센 불길이 시커먼 연기를 일으켜 끝내 온달과 막바우를 덮치니, 경우의 시야에서 불길 앞에 선 두 사내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메케하고 시커먼 연기와 뜨거운 화기에 막바우의 장신이 아득해질 때, 그의 곁에 선 온달이 운철 대검을 높이 치켜들며 불길을 향해 후려쳤다.

“파산귀검!”

온달이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치며 불길을 후려치니, 막바우가 온달을 향해 콜록거리며 외쳤다.

“장군! 콜록콜록, 입은 꽉 다물고 하십시오. 연기 들어갑니다.”

그제야 온달도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이미 연기가 한가득 들어와 한참 콜록거리다가 다시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쳤다.

파산귀검 초식에 가격당한 불길은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과 반대로 꿈틀거리더니, 땅이 파이고 불길을 날리며 화염을 산 아래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막바우가 고개 돌려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죽고자 하면 산 위로 오르고, 살고자 하면 저 불길을 뚫고 산을 내려가 싸워라!”

일장산성의 신라군을 산 매장한 막바우의 엄명인지라, 산 위로 도주하던 고구려군이 일제히 발을 멈추고 등을 돌릴 때.

또다시 온달이 파산귀검 초식을 연거푸 펼치며 고갯길을 질주하였다.

“우리도 장군을 따르자! 달려라! 돌격하라!”

경우도 막바우를 따라 명을 내리니, 모두가 일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산 아래로 돌진을 하였다.

이 순간 산 아래에 방책을 단단히 세우고 지키던 신라군들에게 강력한 바람이 고갯길에서 불어닥치며 불붙은 흙과 기름 먹은 나뭇잎을 실어 덮쳤다.

이어서 또다시 광풍이 일며 불붙은 나뭇가지와 돌조각까지 실어 재차 방책을 덮쳤다.

그리고 거대한 도끼로 후려친 듯 물리력을 동반한 광풍이 방책을 밀어붙이는데, 이중 삼중으로 세운 방책 중심이 부서지며 나뭇가지를 허공에 솟아 올렸다.

연이어 방책 뒤에 서 있던 신라군들이 가슴을 도끼로 후려 맞은 듯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뒤이어 고갯길을 불태우던 검은 연기가 거꾸로 산을 내려와 방책 앞 시야를 온통 가리고는 그 속에서 고구려군의 힘찬 함성이 우레처럼 들려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석보가 놀라 눈앞까지 다가온 검은 연기 속을 숨죽여 노려보았다.

그때, 거센 함성과 함께 갑자기 온달이 튀어나오며 운철 대검을 휘둘렀다.

그 뒤를 이어 불길에 그을린 고구려군들이 폭풍처럼 방책을 무너뜨리며 돌격해 왔다.

“막아라! 막아라!”

적성산성 성주 대력부가 미친 듯이 독려하다가 코앞까지 고구려군이 들이닥치니, 잽싸게 말에 올라 도망쳤다.

이 광경을 석보가 허망하게 바라보다가 커다란 가위를 단단히 쥐고 방책을 무너뜨리는 온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때 장솔이 그의 허리를 급히 잡으며 매달렸다.

“소성주! 퇴각하셔야 합니다. 놈들이 방책을 이미 넘은 이상 무리할 필요 없습니다.”

석보는 용맹하면서도 감정을 누를 수 있는 인물로 책사 장솔의 말을 잘 따르니,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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