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온달의 무덤 (2)
다음 날, 날이 밝자 온달은 산성을 공략하기 어려운 기병은 경우에게 맡겨 진영을 지키게 했다.
또한 전령과 보급을 담당한 기룡도 함께 진영에 남았다.
죽령 일대 지리에 능통한 온달이 성큼성큼 앞장서고, 그 뒤를 막바우가 장창병과 창보병을, 기범이 환도수를, 기훈이 노궁수를 이끌며 성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온달이 군을 이끌고 출발한 지 일다경도 못 되어 산 아래에서 북소리와 함성이 크게 들려왔다.
그들이 내려다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신라의 기병 한 무리가 진영을 급습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급습입니다! 신라 놈들의 계략인가 봅니다!”
기훈이 산 아래를 가리키며 급히 말하였다.
진영 곳곳에 불길이 이는 것으로 미뤄 짐작건대, 신라군의 목적은 식량을 불태우려 함이 분명하였다.
“신라 놈들이 몰래 군을 따로 준비해 우리가 산을 오르는 틈을 노려 급습하였습니다. 군량을 태우려는 수작입니다.”
기범도 이렇듯 말하니, 막바우가 격분해 소리쳤다.
“저놈들이! 장군, 군량이 불타면 우린 굶게 됩니다!”
막바우가 당연한 소리를 심각히 하는데, 아마도 굶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모양이었다.
온달이 적의 수를 헤아리니, 경우가 충분히 대적할 듯하여 모두를 진정시켰다.
“경우가 잘 막을 것이니, 우린 이대로 산을 올라 저 산성을 공략할 것이오.”
이렇듯 말하고 다시 산을 오르려 하였다.
그런데, 진영을 급습한 신라의 기병들이 급히 말 머리를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영 주위에 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경우가 기병 이천을 이끌고 추격하는 게 시야에 들어와 온달의 발을 멈추게 하였다.
“저 방향은?”
온달이 신라 기병이 도주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끝을 흐리자, 불안해진 막바우가 급히 물었다.
“저 방향에 어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저긴 기병이 오르기 힘든 곳이네. 안 되겠어. 경우의 뒤를 따라가 데려와야겠네.”
신라군이 도주한 방향은 덕절산으로 고개가 험해 신라의 기병도 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신라군이 향한 것은 필경 유인책이 분명하여 매복이 있으리라 온달이 판단한 것이다.
“산에 더 올라 산성에서 우리 뒤를 치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세.”
온달이 경우를 우려해 급히 군을 물려 산을 내려가고는 기훈과 기범에게 진영을 방비하라 명했다.
온달은 막바우와 함께 군을 이끌고 덕절산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경우가 이끈 고구려군과 진영을 급습한 신라군은 모두 기병이었다.
그에 비해 뒤를 쫓는 온달이 이끄는 군은 보병인지라, 급히 달려도 따라 집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 * *
경우는 진영을 급습한 신라군의 수장이 일전에 자신이 살려준 소년 장수 귀산임에 만만히 여기고 뒤를 쫓았다.
“기껏 살려 주니, 위례성에서 훼방을 놓고도 부족하여 우리 군량마저 불태우려 하다니, 건방진 꼬맹이 놈! 저놈을 혼내지 않으면 또다시 불장난하러 올 것이다! 못된 버릇 볼기를 쳐 고쳐 놓겠다.”
대응을 잘하여 그다지 식량은 불타지 않았으나, 후환을 남기지 않고자 경우가 맹추격하였다.
귀산의 신라 기병도 뒤를 잡히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도주하였다.
한참을 추격하여 어느덧 덕절산에 이르니, 귀산은 험한 고개로 군을 이끌고 올랐고, 고구려군도 이를 놓치지 않고자 살을 날리며 쫓았다.
화살에 맞아 널브러지면서도 신라군은 악착같이 고개를 오르며 도주하는데, 영리한 경우가 생각하건대 필경 매복이 있으리라 판단하여 군을 멈추었다.
“더는 좇지 않는다. 저 산에 분명 매복이 있을 것이야.”
고구려군이 고개를 오르지 않고 덕절산 아래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매복이 실패하였다고 느꼈는지 산 위에서 추항이 보병 일천을 이끌고 뛰어나와 공격하였다.
“하하하. 어설픈 매복이구나! 어린놈들이 생각도 어려 그새를 못 참고 나온 것이냐? 모두 저놈들을 짓밟아라!”
경우가 비웃으며 추항의 신라군을 향해 돌진하니, 추풍낙엽처럼 신라군이 쓰러졌고 마침내 추항도 군을 끌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뒤를 쫓아라! 섬멸하라!”
계속된 승리로 기세등등한 고구려군이 함성을 지르며 덕절산을 올랐고, 패주하는 신라군의 비명이 고개에 메아리쳤다.
경우가 매복한 신라군을 상대로 덕절산 아래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온달이 군을 이끌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으나, 그 사이 경우는 군을 이끌고 신라군의 뒤를 쫓아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아니, 저 친구는 뭐 그리 자꾸 쫓아가! 힘들게. 아이고 숨 차라. 장군님! 경우, 저 친구가 계속 이기는데, 좀 쉬었다 가시지요. 애들이 싸우기도 전에 뒈지려고 합니다.”
막바우가 턱 끝까지 찬 숨을 몰아쉬면서 이대로 계속 내달리다가는 군사들이 하나둘 뒤처질 것을 우려해 온달에게 잠시 쉬자 청하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온달의 반응이 냉정하였다.
“안 되네. 저 고개는 기병들이 보병들에게 밀리고, 먼저 고갯길에 자리 잡은 측의 군사 한 명이 열을 대적 가능한 곳이네. 서두르지 않으면 우리 기병이 몰살당할 것일세. 서두르세!”
온달의 이 말에 막바우가 깜짝 놀라 뒤처지는 군사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힘차게 앞서 달려 나갔다.
“나를 따라 고개를 오른다! 뒤처지는 놈은 거꾸로 매달아 볼기를 후려칠 것이니, 염통이 목구멍으로 나올 때까지 달려라!”
* * *
패주하는 추항의 보병을 쫓아 고개에 오른 경우는 암석이 많고 길이 굽이지며 좁아, 불길한 기운이 들어 되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먼저 고개에 올랐던 귀산이 험한 고갯길을 말 달려 내려오며 화살을 쏘니, 이 틈에 추항이 보병을 이끌고 고개를 뛰어올랐다.
귀산이 이끈 신라의 기병들은 고개를 내려오면서 말들이 발을 헛디뎌 고갯길에 연거푸 고꾸라지고 쓰러졌다.
이 광경에 경우가 또 한 번 공격 명령을 내렸다.
“천하의 둘도 없을 허술한 매복이다! 저 칠푼이, 반푼이 신라 놈들을 잡아라!”
귀산도 말이 고꾸라져 나뒹굴다가 간신히 일어나 고개 위로 도망쳤고.
그 뒤로 신라군들이 모두 말도 버린 채 급히 도망쳐 고개를 올랐다.
의심을 할 때마다 대놓고 매복임을 알리는 어설픈 공격에 경우의 의심은 적의 무능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고개 위까지 추항과 귀산을 쫓게 되었다.
* * *
고갯마루에 경우가 다다를 때쯤, 온달도 어느덧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고갯마루에선 아직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듯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멈추지도 헐떡이지도 마라! 숨도 쉬지 말고 뛰어라! 뛰다 죽어도 위에 올라 죽어라! 아이고 숨 차라.”
일장산성의 신라군을 산 채로 매장한 막바우가 숨을 컥컥 몰아쉬면서 독려하니, 어느 누구 하나 반발하지 못하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산 중턱에 원군이 죽을 둥 살 둥 뛰어오르는 것도 모른 채 경우는 드디어 고갯마루에 당도해 미리 길을 장악한 추항과 귀산을 노려보다가 주위를 살피었다.
‘이놈들이 고갯마루에 방책을 미리 세우고 유인했구나. 하지만 잡으러 와, 물러날 수야 없지.’
경우의 입꼬리가 실룩거리며 고갯마루를 선점해 방비를 단단히 한 신라군에게로 다시 시선이 옮겨졌다.
고갯길 양옆은 절벽이 병풍처럼 솟아 매복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갯마루의 신라군을 물리치지 않고 이제 와 군을 돌릴 경우 배후를 공격당할 수 있어 일전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일제 사격을 가한 후, 돌진한다!”
경우의 명에 고구려 기병들이 모두 정상을 향해 살을 날리고는 말을 재촉해 돌진하는데, 돌비수가 쇠망치를 들고 앞장섰다.
하지만 고갯길은 좁고 암석이 삐죽빼죽 솟은 터라 말이 속도를 내지 못할 뿐더러 고작 두 필의 말이 어깨를 맞대고 오를 정도로 폭이 좁았다.
공격은 어렵고 방비하는 신라군으로서는 대적하기 용이한 상황이었다.
“창으로 막고 살을 날려라!”
추항이 맨 앞에서 커다란 방패로 고구려군의 돌격을 방비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극과 구겸창을 쥔 군사들이 앞에 서고 활을 쥔 군사들이 살을 날렸다.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격돌하며 내지르는 함성은 곧 산 중턱에도 전해져 막바우가 더욱 군을 재촉해 모두가 죽기 살기로 뛰어올랐다.
고갯마루에선 고구려군의 일제 사격에 신라군의 피해도 상당했다.
그러나 말을 몰아 오르는 동안 신라군이 날린 화살에 쓰러져 길을 막는 아군의 시체로 고구려군의 발도 점점 묶였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린 신라군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말에서 내려라! 뛰어올라 놈들의 방책(防柵)을 무너뜨려야 한다!”
상황 파악이 빠른 경우가 급히 명을 내렸다.
고구려군은 즉시 말에서 내려 고갯마루로 뛰어올랐고, 덕분에 좁은 길을 그나마 많은 병력이 한 번에 오를 수 있었다.
“방패가 멋지구나!”
가장 앞에서 돌진한 돌비수가 크게 외치며 쇠망치로 추항의 방패를 후려치자, 힘에 밀린 추항이 방패와 함께 넘어지고 앳된 얼굴이 노출되었다.
“살 날이 더 많았을 것인데 안타깝구나.”
돌비수가 애석해하며 쇠망치로 추항의 머리를 노려 내리칠 때, 벗의 목숨을 구하고자 귀산이 창을 뻗으며 날아들었다.
귀산의 일격에 돌비수가 한발 물러서다 휘청였다.
그 틈에 추항이 잽싸게 몸을 빼고 귀산이 다시 돌비수의 목을 노려 창을 찔러왔다.
“어린놈이 어디서 창질이냐!”
이때 경우가 돌비수의 뒤에서 달려오더니 몸을 솟구쳐 뛰어올랐다.
경우는 돌비수의 목을 노리고 내지르던 귀산의 창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러 막았다.
“모두 돌격하여 고구려 놈들을 물리쳐라! 이곳에 놈들의 묫자리를 봐주거라!”
귀산이 경우와 돌비수를 동시에 상대하게 되자, 추항이 벗을 구하기 위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격하는 신라군이 고구려군보다 우위에 있어 승기는 신라군으로 점차 넘어가기 시작했다.
경우와 돌비수는 덤벼드는 신라군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났고, 이 틈에 귀산이 더욱 기세 올려 고구려군을 공격하였다.
“한 놈도 산 밑으로 내려가게 하지 마라! 계속 이곳에 발을 묶어 두어라!”
귀산의 외침은 고갯마루에 메아리쳐 먼 산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놈! 목청 한번 좋구나! 모두 죽을 지경까지 내달려 놈들을 고갯마루에서 밀어내라!”
그때, 귀산보다 더 우렁찬 외침이 고구려군의 뒤에서 울려왔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막바우가 여세를 몰아 신라군의 방책 앞까지 내달려온 것이다.
온달도 막바우의 뒤를 따라 달려오다가 백두검법의 호흡법을 되뇌며 땅을 박차니, 몸이 솟구쳐 단숨에 고갯마루까지 올랐다.
온달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기세 올랐던 신라군들이 놀라 당황하는 가운데 온달은 멈추지 않고 파산귀검의 초식을 펼쳐 땅을 후려쳤다.
땅이 파이며 운철 대검이 만들어 낸 검기가 쭉 뻗어 방책까지 허물며 길을 만들었다.
이에, 귀산과 추항을 비롯한 선두의 신라군들이 다리가 휘청여 주저앉고 말았다.
온달의 일격에 승기는 다시 고구려군에게로 옮겨 가고 좁은 고갯길을 오른 고구려군이 고갯마루의 신라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한 식경이 지나니, 치열한 고갯마루의 전투도 마무리되어 많은 신라군이 포로로 잡혔다.
경우가 지친 다리를 끌며 포로 속 귀산과 추항을 찾아 앞에 서고는 측은해 물었다.
“몇 살이더냐?”
“열다섯이다.”
귀산이 고개 들어 당당히 답하였으나, 앳된 얼굴에 경우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아직 죽기는 이르다. 살려 줄 테니 이대로 저쪽 방향으로 내려가 고향에 가겠느냐?”
경우가 가리킨 곳은 적산과 반대 방향으로 온달도 경우의 뒤에 서서 소년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하하, 가소롭구나. 자신들이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남 걱정하는 것이냐? 하하하.”
귀산의 이 맹랑한 답변에 온달과 막바우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당황한 경우가 재차 물었다.
“뭐라 했느냐?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