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온달의 무덤 (1)
위례성을 점령한 온달은 기악에게 평양성에서 도착할 주둔군을 기다리라 명한 후, 바로 군을 몰아 죽령으로 향하였다.
고악 일대의 규모가 작은 산성들을 취한 막바우도 합류하여 진군하는데.
단 한 차례의 작은 패배도 겪지 않은 온달 군의 사기는 드높았고 이들의 앞길을 막는 신라군은 없었다.
위례성에서 도주한 각간 김서현도 죽령으로 향하던 도중 패잔병 오백여 명을 이끈 김인문과 건품을 만나 그나마 군대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당항성에서 원군을 보냈을 것인데, 위례로 되돌아가 그들과 함께 성을 수복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김인문이 물었으나, 김서현은 한시라도 죽령을 넘고 싶은 마음에 대꾸조차 없었다.
한 시진 쯤, 더 남으로 내려가니 한 무리의 대군이 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시야에 당항성 성주 석원의 깃발이 보였다.
“각간! 원군이옵니다!”
김인문이 놀랍고 반가워 소리쳤다.
그러니, 당항성의 군사들도 이들이 위례성의 패잔병임을 알아보고 방향을 돌려 달려왔다.
“나는 당항성의 소성주 석보라 합니다. 그대들은 어디서 오는 군사들입니까?”
석보의 물음에 김서현이 반갑고도 부끄러워 김인문에게 대신 응답하라 시켰다.
“나는 왕의 사위이자 조카인 소판 김인문으로 서라벌에서 출병하여 각간 김서현 공을 모시고 승승장구 진격하며 고구려를 정벌하던 중이다. 이곳에 각간 김서현 공이 계시니, 어서 달려와 예를 올리거라!”
패주하면서도 체면을 챙기며 김인문이 말하니, 석보가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히 예를 올리며 화답하였다.
“천하의 명성이 드높은 김인문 공이시군요. 삼가 석보 예를 올리옵니다.”
이렇듯 석보가 정중히 예를 올리니, 김인문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김서현에게 석보를 데려갔다.
“공의 군사가 상당하니 온달을 대적함에 무리가 없어 보이는구려.”
김서현이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나이 어린 석보에게 존대를 하며 물었다.
“소인이 어리고 재주가 부족하여 온달을 대적함에 각간을 비롯한 여러 장군님들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석보가 눈치껏 패잔병들의 체면을 살리니, 김서현이 방긋 웃으며 말하였다.
“헌데 그대는 위례로 향하지 않고 어찌 죽령으로 향한 것이오?”
“소인이 아둔해 항시 책사 장솔의 의견을 따르온데, 그가 말하길 온달을 대적함에 두억산이나 덕절산까지 깊숙이 끌어들여 고구려 기병들의 발을 묶고, 대당(서라벌의 군대)이나 상주정의 도움을 받아 포위 섬멸함이 상책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로 아찬 박춘수도 주장했던 것으로 김서현이 놀랍고 슬퍼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였다.
“아찬! 아찬! 춘수여! 내 소중한 박춘수 공이여! 이 못난 내가 그대와 같은 현인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 꼴이 났구나. 아찬! 아찬이여!”
* * *
각간 김서현이 상주로 사람을 보내 상주정의 군사를 요청했다.
김서현은 더불어 서라벌에서도 대당을 요청하고는 자신은 죽령으로 향하며 석보에게 후일을 당부하였다.
“소성주 나는 서라벌로 돌아갈 것이네. 이곳을 그대에게 맡기고 나만 떠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나. 반드시 상주정과 대당이 늦지 않게 당도할 것이니, 부디 그대가 이곳에서 온달을 물리쳐 주시게나.”
“소인 각간의 명을 받습니다.”
석보가 늠름히 명을 받고 떠나는 김서현 일행을 배웅하니, 책사 장솔이 다가와 유쾌히 말하였다.
“보소서. 이제 소성주가 대군을 이끌고 온달을 물리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옵니다.”
“이름은 됐고. 왕이나 한번하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소. 하하하.”
석보는 보기보다 야망이 큰 사내였다.
“천하 교역의 요처인 당항성을 차지하면 동쪽 끝 서라벌 못지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솔, 저자들은 어찌 안 가고 남은 것인가?”
석보가 시선도 두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자신을 응시하는 두 소년에 관해 물으니, 장솔이 웃으며 답하였다.
“고구려군과 싸우겠다고 남은 아이들이옵니다. 화랑이지요.”
“아! 화랑… 그놈의 임전무퇴. 늙은이는 도망치며 어린애는 싸우라는 뭐 그런 것인가?”
석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니, 장솔이 냉정하게 답하였다.
“어쨌든 온달을 사지로 유인하고 죽을 장수가 필요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까?”
“허허, 이 사람. 뭐 어쨌든 자기들이 원한다면야 적당히 좋은 자리 찾아 죽어야겠지. 그래 이름이 뭔가?”
“귀산과 추항으로 소감과 소장이옵니다.”
“소감과 소장이라…….”
석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귀산과 추항의 앞에 섰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두 소년을 끌어안고는 반겼다.
“내 너희들에게 기병 오백과 보병 일천을 내줄 터이니, 죽음으로 온달을 유인할 수 있겠느냐?”
* * *
고악을 지나 죽령이 시작하는 적산현(赤山縣, 단양의 고구려 시대 지명)에 들어선 온달은 자신이 자란 이곳을 마저 수복하여 태왕의 명을 완수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뜩이나 붉은 적산현 일대는 가을을 맞아 온통 화염에 휩싸인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동 방면 깊숙이 들어설수록 신라군의 저항이 거셀 거로 예상했으나, 한동안 신라군과 전투가 없어 무척 의아한 상태였다.
“이 죽령만 넘으면 상주와 서라벌이 가까워질 터인데, 어찌 이리도 응전이 없는가?”
“그러게 말입니다. 결코 우리의 진군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데, 혹시 대군을 준비하고 있음이 아닐는지요.”
동일한 의문을 품고 있던 경우가 이렇듯 답하니, 온달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갈수록 산세가 험해지고 반드시 거센 저항도 있을 것이니,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죽령으로 들어가겠소.”
온달이 이렇듯 말하자, 고구려군은 죽령 아래에 진영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 *
“저 산 위에 큰 비석이 있는 산성이 있는데, 성산산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적산산성이라 부르기도 하네.”
죽령에서 자란 온달이 정면에 보이는 낮은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막바우와 경우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데, 산이 온통 붉게 물들어 주단을 깐 듯 곱고도 위험해 보였다.
온달이 진을 친 적산현(赤山縣)은 본시 고구려의 고토로 적성현으로도 불리었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이 이곳을 차지하며 비를 세우니, 이 비를 곧 진흥왕 적성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 신라 적성비에는 죽령을 차지하기 위해 진흥왕과 함께 전장에 참여해 공이 높은 이들도 이름을 새겼는데.
우산국을 토벌한 이사부와 각간 김서현의 부친이자, 훗날 신라의 흥무대왕 대장군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대아찬 비차부, 십성을 공략한 거칠부 등이 있었다.
이 비석을 세우고 성산 정상에 산성도 세우니, 사람들은 이를 적산성 혹은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리었다.
아단성은 그 둘레 일천오백이십삼 척이요, 높이는 십일 척의 석축성으로 성 중앙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한 개 있어,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산성을 세움에 목적은 을아조(乙阿朝, 단양 연춘)를 지키기 위함으로 성산의 동쪽은 죽령천(竹嶺川).
서쪽은 적산천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한수의 한 갈래인 긴 강(남한강)이 합류하여, 삼 면이 하천으로 둘러싸인 자연 해자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사통팔달 모든 곳으로 통하는 요충지라, 시일을 두면 주위 신라성에서 원군이 몰려올 것입니다.”
경우가 지도를 살피며 이야기하자, 온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저 성산산성을 포함한 주위 산성들은 험한 산세를 이용하고, 각 성들은 서로 오감이 수월한 길을 차지해 연결되어 있어, 경우의 말대로 신라군은 곧 동쪽과 남쪽에서 원군을 끌고 올 것일세.”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온달인지라 지도를 보지 않고도 신라 각 산성들의 움직임이 훤히 그려졌다.
아단성에서 남동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는 공문성(貢文城)이 자리하고.
서남쪽으로는 소이산 봉수(所伊山 烽燧)가 자리했으며.
아단성의 주변은 한수 남쪽 줄기의 상류와 하류가 흘러 수로로 이용할 수 있는데, 이 수로를 따라 동으로는 영월의 태화산성과 연결되었다.
이렇듯 동서 어느 방향으로든 벌령(伐嶺) 길이 트여 사방 어디로도 진출 가능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노고산성, 청량산성, 호잠산성, 독락산성, 대림산성 등이 인근에 있었고, 동북 방면으로 송계리산성, 애산리산성, 신월리산성, 백운산성, 고성리산성, 완택산성, 대야리산성 등이 자리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일단 내일 날이 밝으면 저 산부터 점령해야겠지요. 헌데 불이 붙은 듯 참으로 붉은 산입니다.”
경우가 성산을 올려다보며 이렇듯 말하니, 막바우가 주위를 가리키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 그런데 저 산 말고도 주변이 모두 지나칠 정도로 붉어 피 내음이 날 정도네.”
막바우가 이토록 말함은 사실 당연하였다.
오랜 세월을 거처 이 일대는 주인이 숱하게 바뀌며 산천이 항시 피를 머금고 있었다.
특히나 가을을 맞이한 적산 일대는 온통 붉은 빛이었는데, 장회나루에서 바라다보이는 구담봉을 비롯해 남조천의 사인암, 서쪽 아래 적산천변 선암계곡의 절벽 등 모두 불타듯 붉은빛(靑丹色)이 돌았다.
본디 이곳의 풍경이 너무도 불에 가깝다 하여 적산 또는 적성이라 불리다가.
붉은 것에 적이 아닌 붉을 단을 붙이길 좋아하는 신라인들이 단산, 단성 등의 이름 등으로 불렀고.
아주 먼 후대에 이르러 단양이란 명칭을 지니게 된다.
이곳에 성산보다 높은 두 개의 산이 있는데, 고개가 험한 덕절산과 상대적으로 고개가 완만한 두억산이었다.
바로 이 두 산에서 온달을 무찔러야함을 박춘수가 주장했고, 석보의 책사 장솔도 책략을 내었으니, 필경 이 두 산 중 한 곳에서 온달 군 모르게 결전이 준비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 *
“온달이 왔습니다.”
장솔이 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하니, 이미 보고 있던 석보가 심드렁히 말했다.
“나도 잘 보고 있소. 이보시오, 장솔 책사. 아는 것 말고 모르는 것을 말해야 훌륭한 책사라오.”
석보의 이 말에 장솔이 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온달은 내일 이 적산을 오르려 할 것입니다.”
“나도 아는 바요. 산에 왔으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이번에도 석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니, 장솔이 또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였다.
“헌데 온달은 이 산이 아닌 덕절산으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 명을 달리할 것입니다.”
“그래? 준비가 된 것이오? 이번에 그 소린 참 듣기가 좋소. 어디 그럼 내일 임전무퇴를 행할 우리 장수들과 술이나 한잔해야겠구려. 꽃은 아름다울 때 지는 법이니, 우리의 꽃보다 아름다운 화랑 귀산과 추항은 어디 있을까나?”
석보가 환히 웃으며 죽음으로 온달을 유인할 소년 장수들에게 술을 권하겠다 말하니, 장솔이 손을 내저으며 만류하였다.
“몸을 정갈히 씻고 내일의 죽음을 맞고자 결의를 다지는 중이오니, 술은 저와 하시지요.”
“그런가? 하긴 젖비린내 나는 애들과 술은 좀 그렇지요. 하하하.”
장솔의 의견에 석보가 동의하며 껄껄껄 웃는 폼이 꽤나 유쾌해 보였다.
“상주정과 인근 산성에서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온달의 수급을 취한다면야 이보다 좋을 수야 없겠지. 아무렴 말이야. 하하하.”